가짜뉴스로 의심되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만일 그것이 참일 경우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도 물어봐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뉴스인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한 개인이나 그룹, 또는 어떤 지역이나 정당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 낸 뉴스일 가능성이 없는지를 고려해 봐야 할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짜뉴스, 거짓 뉴스와 소식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합니다.(본문 중)

강영안(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이 글은 2019년 7월 11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웹진 <좋은나무> 1주년 기념 강연회 강연과 질의응답 내용을 박신호, 태동열, 정병오 님이 녹취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글로서 세 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이 글은 두 번째 글로서 강의 후반부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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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1일, 기윤실은 <좋은나무> 발간 1주년 기념으로 강영안 교수를 모시고 “Post-truth: 거짓과 진실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강연을 개최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포스트트루스의 상황은 여러 영역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정치나 종교 영역이 아무래도 대표적인 영역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과학의 영역에서도 포스트트루스가 생산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예는 담배와 암의 관련성 문제입니다. 담배가 암을 유발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한 논쟁은 이미 195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의학계에서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자 담배 회사는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담배와 폐암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연구 결과를 60년대, 70년대에 학계에 퍼뜨렸습니다. 두 번째 예로는 백신, 곧 예방접종과 관련된 것입니다. 1998년 앤드루 웨이크필드(Andrew Wakefield)라는 영국 의사가 MMR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런 주장에 영향을 받아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래서 다 사라진 줄로 알았던 홍역이 다시 번지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논문은 조작된 것임이 밝혀져 철회되었습니다. 세 번째 예는 지구의 기후변화와 이산화탄소 배출 간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계속 내는 사람들입니다. 백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나 이산화탄소 배출과 지구 온난화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는 정치가(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들을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반과학적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인 동기나 정치적인 동기, 또는 종교적 동기가 포스트트루스를 만들어 내고 있음을 이런 예들에서 보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한걸음 물러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엇이 참이라고 말할 때, 어떤 현실, 어떤 삶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그것이 사실의 문제인지, 논리의 문제인지,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인지,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인지, 어떤 영역, 어떤 성격의 문제인지에 따라 참의 성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가 폐암의 원인인가 아닌가, 탄산가스 배출과 지구 온난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는 사실의 문제이고, 이러한 사실의 문제는 과학 연구를 통해서 밝힐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는 참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논리학에서 배우는 규칙 가운데 ‘긍정 논법’과 ‘부정 논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긍정 논법’은 “P는 Q이다. P이다. 그러므로 Q이다”로 표현됩니다. ‘부정논법’은 이렇게 표현됩니다. “P이면 Q이다. Q가 아니다(Not Q). 따라서 P가 아니다(Not P).” 이러한 논법은 논리적 형식으로 인해서 참이거나 거짓이 되는 논법입니다.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라는 전제가 참이라고 하면,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비가 온다. 그러므로 땅이 젖는다” 또는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땅이 젖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았다”라고 참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때의 참은 논리적인 형식 때문에 언제나 참인 그런 성격의 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지요.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 명제는 “이 책상이 네모나다”라는 사실은 서술하는 명제입니다. 그래서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는 진술은 이 책상이 네모나다는 사실을 통해서 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상이 네모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책상은 둥글 수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세모난 책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주어진 사실이 내가 지금 “이 책상이 네모나다”라고 말하는 진술을 참되게 만드는 트루스메이커(truth maker) 역할을 합니다. 사실과 관련된 진술의 참과 거짓은 실제로 서술된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들어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확인해 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참은 이와는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이 세종대왕이 실제로 자기 혼자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하여 수년간 연구한 결과 한글이라고 하는 문자 체계가 나왔고 그것을 나중에 발표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을 거짓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의미의 참은 사실과 연관되지만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는 진술의 성격과는 구별됩니다. 이 경우에는 문헌의 뒷받침도 있고, 문헌이 이야기하는 사건이 실제로 있었어야 그와 관련된 진술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서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라는 말을 들 수 있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진술은 여호와께서 나의 반석, 곧 내가 의지하고 기댈 곳이 되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포함된 진술이 될 것입니다. 이때의 참을 “그게 사실인가?”라는 물음으로만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속에는 사실에 대한 진술과 감사와 찬양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연인들끼리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진술에는 사실에 대한 표현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과 신뢰를 표현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표현 속에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에 대한 고백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함과 다짐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현재 상태의 서술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한 약속이 곁들어진 진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때의 ‘참’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와 관련해서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다짐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위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거나 참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참은 이처럼 다양한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포스트트루스가 통용되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실재론의 중요성이라 생각합니다. 실재론은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저의 어떤 인격적 표현을 하는 경우, 예를 들어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그 사랑한다는 말이 단순한 감정의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사실을 일차적으로 진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한다’는 그 사실을 언어 속에 담아서 표현한 것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내가 당신을 사랑해’라고 한다면 그건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속임이 아니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진실한 마음의 사실을 언어 속에 담아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은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말이나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고 단순히 사실을 서술한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훨씬 더 인격적인 개입과 참여가 들어간 서술이고 인격적 관계에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이런 말은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실재론(realism)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소박한(naïve) 실재론과는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 책상은 네모나다”라는 말은 누가 보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은 사실을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며 앞으로도 신실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주관, 느낌,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실재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격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저의 말이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다른 예를 더 들어보죠.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나의 감정이나 느낌, 내가 원하는 것을 그냥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이미 주어진 사실이 근거로서 존재합니다. 역사와 관련된 진실은 사실 없는 진실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되 그 사실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진실입니다. 그런 방식의 진리 추구가 역사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진리는 그러므로 단순히 내 앞에 있는 책상에 대해 말하는 것과는, 연관은 되지만, 다른 차원의 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진리 또는 참에는 단순히 과학적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종교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미적, 예술적 진리도 있을 수 있고, 인격적 진리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리의 다양성에 대한 수용과 그 바탕에는 역시 사실이 깔려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의 실재론을 저는 ‘비판적 실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진술이 참인가 거짓인가, 그러니까 지금 유통되고 있는 말을 참으로 받아들여야 되는가 아닌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인의 33%가 북한의 핵을 제재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하고, 그때 백만 명 이상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는 우리말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계속 체크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워싱턴 포스트>에 실제로 그런 조사 결과가 보도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나서야 이런 조사가 거짓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도대체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하기에 백만 명이나 죽어도 핵무기를 써서 북한 핵을 저지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문자 메시지나 유튜브 방송 내용에 대해 우선 의심을 품어 보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 이것이 참일까, 거짓일까?’ 물어볼 필요가 있고 보도한 매체가 믿을 만한 매체인가 아니면 개인이 자신의 신념을 선전하는 매체인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경우 판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언론 보도일 경우에는 보도한 매체가 신뢰할 수 있는 매체인지, 신뢰할 수 있는 매체라도 다른 매체와 비교해 보고 또 확인해 봄으로써 최종 판단에 이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하자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비판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비판적(critical)이라는 말은 원래 “가려낸다”, “참과 거짓을 가려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려고 하는 비판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가짜뉴스로 의심되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만일 그것이 참일 경우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도 물어봐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뉴스인지,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어떤 한 개인이나 그룹, 또는 어떤 지역이나 정당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 낸 뉴스일 가능성이 없는지를 고려해 봐야 할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짜뉴스, 거짓뉴스와 소식이 워낙 많이 돌아다니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특별히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에 이어 세 번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스트트루스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말하는 공의로운 태도, 공정한 태도, 공평과 정의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평과 공정은 무엇보다도 사실을 그대로, 정직하게 말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과 거짓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 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무엇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참이고, 무엇이 아닌 것을 무엇이라 말하고 무엇인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다.” 위대한 철학자가 말했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물어봐도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엇인 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해도 믿지 않고 무엇이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이 지금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 것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무엇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사실 그대로 정직하게 보고, 정직하고 말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이 점에서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실을 대할 때, 그리고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외모로 취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말고, 공정하고 정직하게 보려고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

 

이제 끝으로 물어봅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말한 이 세 가지 노력을 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도 어느 한쪽 편에 서서 다른 쪽을 공박하고 배척해야 하지 않을까요? 강의 모두(冒頭)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뢰 없이는, 믿음 없이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건강하게 될 수 없고 굳건하게 설 수 없습니다. 신뢰 받는 사회, 신뢰가 있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참과 거짓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짓이 진실을 뒤덮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4:13-14)

그리스도의 정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라는 권유를 사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 권유의 목적은,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의 표지는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느냐 빠지지 않느냐’입니다. 제가 설명한 방식으로 말하면, ‘비판적인 사고 또는 회의적인 사고를 통해서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내고자 하는 자리에 이르느냐, 이르지 않느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5)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는 “참된 것을 말하여” 또는 “참된 것을 행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말하되” 또는 “참된 것을 행하되” “사랑 안에서” 행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 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에까지 자라 가야 하는데, 그 기준 또는 표시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말하되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사람과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 가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처럼 이렇게 의견이 분열되고 편 가르기가 심한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어느 편에 서서 좌파냐 우파냐 편 가르기에 편승하는 것보다 무엇이 참인가, 무엇이 사실인가를 가려내고 또 그 참된 것에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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