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은 그렇게 크게 기념했으면서도,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은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 생각해 보게. 한국 장로교의 뿌리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던가? 사실 루터의 사상보다는 부쩌(1491-1551), 칼빈(1509-1564), 불링거(1504-1575), 그리고 내가 전개했던 사상이 오늘날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의 원류가 아니겠는가 말일세.”(본문 중)

우병훈(고신대학교 교수, 교의학)

 

올해는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2017년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 해라면, 올해는 츠빙글리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그래서 츠빙글리와의 가상 대화를 한번 엮어보았습니다.[1]

 

 

츠빙글리(1484-1531)의 교회개혁의 시작

츠빙글리(이하 츠) _ 나는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은 그렇게 크게 기념했으면서도,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은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

나 _ 츠빙글리 선생님을 루터 선생님보다 주목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것인가요?

 _ 허허, 자네는…. 일평생 하나님의 주권만을 부르짖었던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 같은가?

나 _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쉬워하시는지요?

츠 _ 아니, 생각해 보게. 한국 장로교의 뿌리는 개혁주의 신앙이 아니던가? 사실 루터의 사상보다는 부쩌(1491-1551), 칼빈(1509-1564), 불링거(1504-1575), 그리고 내가 전개했던 사상이 오늘날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의 원류가 아니겠는가 말일세.

나 _ 맞습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학교에서 가르칠 때 개혁주의 4인방으로 츠빙글리, 부쩌, 불링거, 그리고 칼빈을 언급합니다.

츠 _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보다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일세. 내가 단지 내 명예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네.

나 _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왜 올해가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말하는지부터 설명해 주시지요.

츠 _ 1519년 1월 1일부터 나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예배당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2일부터 마태복음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지.

나 _ 1519년 1월 1일이라면 선생께서 서른다섯 번째 생신을 맞이하신 날이로군요.

츠 _ 맞아. 루터가 1483년 11월 10일생이고, 내가 태어난 날이 바로 이듬해인 1484년 1월 1일이니까, 1518년이면 나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이지.

나 _ 그런데 마태복음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설교를 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츠 _ 방법과 내용 면에서 그러하네. 당시의 교회[2]에서 예배는 미사 형식으로 드려졌지. 설교가 없는 경우도 많았네. 성경 봉독은 전례에 따라 순서대로, 그저 기계적으로 읽었어. 하지만 나는 그런 관행을 개혁했네. 주어진 그날의 본문을 읽는 대신, 마태복음 제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면서 강해 설교를 시작했네.

나 _ 당시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츠빙글리 선생님의 그 설교가 시작점이 되어서 이후에 개혁주의가 기틀이 잡혔기에 1519년을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잡는군요.

츠 _ 그렇다네. 사실 종교개혁은 루터나 나, 혹은 칼빈이나 낙스 같은 몇몇 사람들이 이룬 것이 아니라네. 종교개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그리고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 일에 쓰셨어. 16-17세기에 루터파 개혁자들만 해도 1,500명이 넘고, 개혁파 종교개혁자들도 2,600명이 넘는다네.[3] 당시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났지. 나도 다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였을 뿐이네.

 

성경책과 칼을 들고 있는 츠빙글리 동상.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나 _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네요. 그리고 이 시대 저에게 주신 사명이 뭘까도 고민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계속 신약성경을 설교하셨지요.

츠 _ 그렇다네. 마태복음에 이어, 디모데전서, 갈라디아서, 디모데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를 선택해서 강해하였지. 그 이후에는 구약 성경도 설교했어. 그렇게 하여 거의 성경 전체를 설교했지.

나 _ 당시 교회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텐데,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필 성경 강해를 교회개혁의 수단으로 삼으신 것에 이유가 있는지요?

츠 _ 오히려 내가 한 가지 묻겠네. 자네는 종교개혁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 _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중세 시대의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한 것을 뜻하는 거 아닙니까?

츠 _ 아니, 그런 두루뭉술한 표현 말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당시 교회의 어떤 점을 개혁했다는 건가?

나 _ 으음, 글쎄요…. 당시 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개혁한 것 아닐까요?

츠 _ 아니, 그 관행 중에 뭐가 떠오르냐는 질문이야.

나 _ 뭐…, 대표적으로 면벌부(혹은 면죄부)도 판매도 있겠고….[4]

츠 _ 그래, 이쯤 하지. 자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하네. 종교개혁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가에 따라 내가 한 강해설교가 왜 종교개혁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일세.

나 _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츠 _ 흔히들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16세기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들을 척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그게 틀린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그것은 바로 ‘교리의 개혁’이지. 여기서 ‘교리’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말한다네. 루터가 했던 것 역시 교리의 개혁이었다네. 그가 당시 교회의 면벌부 판매만을 비판했다면 그는 단지 외면적 개혁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야. 하지만 루터의 위대성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회복했다는 데 있네. 교회개혁이 다만 외적 제도나 관행의 개혁에 그쳐서는 안 되네. 중세에도 그런 것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많았지. 하지만 루터가 교회의 역사에 개혁자로 남은 것은 교회의 내면, 정신, 곧 교리를 개혁하였기 때문이야.

나 _ 선생님도 그런 점에서 성경을 강해하신 것이었군요.

츠 _ 그렇다네.

 

복음의 공공성

나 _ 루터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가요?

츠 _ (큰 소리로) 아닐세!

나 _ 예??

츠 _ 나는 1517년 10월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당에 걸기 전부터 이미 성경을 복음적으로 묵상하고 있었어.

나 _ 그러시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츠 _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원전으로 읽게 되면서부터였다네. 그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가 루터와는 결이 약간 다른 개혁자로 걸어가게 된 과정을 먼저 말할게. 나는 베센, 바젤, 베른에서 유년기 교육을 받고, 빈과 바젤에서 대학 생활을 했지. 그리고 1506년에 글라루스(Glarus)에서 사제가 되어 1516년까지 10년간 목회를 했다네.

나 _ 22세부터 목회를 하신 셈이군요.

츠 _ 그렇지. 그 기간 동안 나는 군목으로 전투에도 여러 차례 참전했다네.

나 _ 당시의 스위스 용병들은 그 명성이 대단했지요!

츠 _ 맞아. 하지만 나는 용병제도를 반대했다네.

나 _ 왜죠?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애국자로서 스위스의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처럼 추측되는데요?

츠 _ 전혀 반대라네. 자네 말처럼 나는 일평생 나의 조국 스위스를 사랑하는 애국자로서 살았다네. 스위스를 비방하는 자들은 용납하지 않았지. 하지만 나의 애국심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어. 그런데 실제로 전투에 참가해서 실상을 보니, 용병제도는 너무나 비성경적이었어. 용병들은 돈에 눈이 멀었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지. 용병들을 값을 주고 산 사람들은 역시 권력과 탐욕의 노예들이었네. 나는 용병제도 역시 단지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로 보았네. ‘하나님의 정의’가 용병제도로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네.

나 _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종교개혁은 처음부터 복음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것이었군요.

츠 _ 그렇다네. 젊은 시절 루터의 질문은 “죄인인 내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지. 젊은 시절 나의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의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편만하게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단지 개인의 구원 문제였고, 나의 종교개혁이 단지 사회의 변화 문제였다고 말할 수 없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기억해 두게. 나는 복음은 반드시 공적인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드러내야 하다고 생각하네.

나 _ 선생님의 설교에도 그런 것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츠 _ 잘 보았네. 나는 기독교인의 삶이 단지 한 개인의 내적인 삶으로 한정될 수 없다고 보네. 참된 종교란 영혼의 가장 깊은 성소에 놓여 있는 내적 존재를 넘어 외적으로 표현되어야 하지. 그렇기에 공적 영역의 문제는 기독교 설교에서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물론 설교에서 직접적인 사회적 이슈를 언급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점은 종교개혁자들마다 달랐네.

나 _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설교에서 직접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 않고 다만 간접적인 원리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칼빈이 그렇지요.

츠 _ 맞아. 하지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설교 시간에 사회적 이슈를 다루었네.

나 _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츠 _ 글쎄. 이 문제에 정답은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칼빈이나 불링거보다는 더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원했지. 어떤 전략을 취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복음이 가지는 공공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나 _ 예. 맞습니다.

츠 _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복음의 공공성을 논할 때 복음이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오히려 복음이 정치에 이용당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나 _ 정치적 당파 싸움에 복음이 종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군요.

츠 _ 그게 바로 내가 말했던 ‘신정’(神政)의 의미라네. 나는 국가 위정자나 정치가들이 교회나 목회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신정을 말하지 않네. 그건 또한 설교자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네. 내가 말하는 ‘신정’이란 정치가들과 목회자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네.

나 _ 선생님은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으신가요?

츠 _ 취리히에서 사역하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정치가로 활동한 적이 없네. 당시 취리히 시의회는 16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대의회와 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소의회가 있었지. 나는 다만 이런 조직에 ‘조언’을 하는 정도로만 나의 자리를 지켰네. 설교 시간에 정치 현안에 대해 언급할 때도 복음의 증진’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그 외의 정치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은 없다네.

나 _ 구체적으로 설교 때 어떤 언급을 한 것인가요?

츠 _ 가령, 시의회는 복음적 설교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지. 그리고 도시가 더 복음적으로 되기 위해서 정치가들도 노력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어. 주로 그런 것들이야.

나 _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복음의 공공성과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츠빙글리가 설교했던 스위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 (출처: Pixabay)

 

에라스무스의 영향

츠 _ 제일 먼저, 나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네. 나는 1516년에 에라스무스를 만났어. 그때의 경험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지. 그는 정말 박식했어. 내 생애에 그렇게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지. 그는 말 그대로 “인문주의의 황제”였다네.

나 _ 인문주의란 무엇인지요?

츠 _ 인문주의는 무엇보다 ‘원천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들을 직접 원전으로 읽고 주석하는 지적 흐름이었지.

나 _ 그게 종교개혁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츠 _ 어떻게 보면 인문주의자들이 읽었던 그리스-로마 문헌들 자체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도 많았어.

나 _ 그래서 요즘도 어떤 사람들은 ‘인문주의’(人文主義)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혼동하기도 하는군요. (웃음)

츠 _ 인문주의가 인본주의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인문주의는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중세 말기 지성인들의 독특한 운동이었어.[5] 인문주의 덕택에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성경을 원전으로 읽기 시작했지. 무엇보다 교부들의 작품 역시 원전으로 읽기 시작했어. 직접 성경과 교부를 원전으로 읽어보니, 웬걸, 이건 완전히 별세계였어. 당시 교회가 가르쳐 주던 것들 가운데 엉터리가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나 _ 선생님께서도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으셨나요?

츠 _ 당연하지!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할 때부터 벌써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네. 특히 글라루스에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인문주의자들의 책들을 많이 수집했지.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데모스테네스, 호메로스, 유베날리스, 리비우스, 플리니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주석판들 말일세.

나 _ 아니 목회를 하셨다기보다는 인문주의 학자로 사셨군요.

츠 _ (머리를 긁적이며) 글쎄…, 그런 셈이지. 허허…. 아무튼 나는 에라스무스를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어. 그는 그리스-로마 문헌뿐 아니라, 성경과 교부작품에도 정통했지. 그는 신약성경을 격조 높은 라틴어로 번역도 했어.

나 _ 그것이 선생님의 종교개혁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츠 _ 여러 가지 점에서 에라스무스는 나에게 영향을 끼쳤네. 첫째는 원전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야. 나는 글라루스의 사제 시절부터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읽었다네. 그래서 복음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지. 이것이 내가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이유야. 하지만 에라스무스를 만나고 나서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었어. 그래서 나중에 내가 일종의 신학교인 ‘선지자 학교’를 만들게 됐을 때 그 주요 수업 내용은 원전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되었지.

나 _ 둘째는 뭡니까?

츠 _ 둘째는 교부들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야. 에라스무스가 가진 그 방대한 교부학 지식은 탄복이 절로 나오게 했네. 그는 교부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원류를 보여주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교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지. 암브로시우스,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바실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 키프리아누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오리게네스, 키릴루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이레나이우스,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그리고 락탄티우스의 작품들 말일세.

나 _ 어마어마하군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교부가 있으신가요?

츠 _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야.

나 _ 왜 그런가요?

츠 _ 그는 나에게 성경을 성경답게 읽도록 길을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이지.

나 _ 에라스무스의 다른 영향은 무엇인가요?

츠 _ 그건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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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이자 신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 (출처: wikipedia)


[1] 이 가상 대화를 작성하는 데, W. P.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박경수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이 많은 도움이 됐다.

[2] 여기에서 “당시의 교회”라고 할 때에 16세기 당시의 부패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생각하면 된다. 당시 유럽에서 기독교회는 모두 로마 가톨릭 교회였고, 또한 츠빙글리가 처음 사역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가 이제 막 분리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기에, 위의 글에서도 그냥 “교회”라고 불렀다. 이하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표현을 쓰게 될 텐데 이런 역사적 정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라. http://www.prdl.org/ 이 사이트는 리처드 멀러 교수와 그 제자들이 만든 것인데, 16-17세기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들을 제공한다.

[4] 면벌부, 면죄부에 대한 용어 선택에 대해서는 아래 책을 참조하라. 우병훈, 『처음 만나는 루터』(서울: IVP, 2017), 281.

[5] 물론 중세와 근대를 너무 날카롭게 나누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중세에도 역시 원전에 대한 관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한 역사적 세부 사항들을 이 글에서는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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