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네. 사실 내가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누누이 말하긴 하지만, 나의 신학과 사역에 루터가 끼친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지. 다만 내가 루터의 영향을 받기 전에 이미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성경을 복음적으로 읽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두게.”(본문 중)

우병훈(고신대학교 교수, 교의학)

 

올해는 개혁주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519년 1월 1일,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신약성경을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복음 중심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지난번 글에 이어서 츠빙글리와의 가상 대화를 계속 이어갑니다.[1]

 

울리히 츠빙글리와의 대화 1편 보기

 

에라스무스의 교회 재생 운동

츠빙글리(이하 츠) _ 에라스무스가 나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은 헬라어 성경과 교부들을 읽게 해 준 것이지.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에라스무스는 ‘윤리의 중요성’을 나에게 각인시켜 주었네. 에라스무스는 그것을 기독교의 “재생”이라고 불렀네.

나 _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츠 _ “재생”(renewal)이란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곧 기독교라는 것을 말한다네. 에라스무스는 “성경적 인문주의”(biblical humanism)를 통하여 그 일을 시도했네.[2] 그는 사람들이 믿는 교리와 그들의 실제 삶이 모두 복음에 일치되기를 기대했지.

나 _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의 기획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전혀 차이가 없는 겁니까? 츠빙글리 선생님은 두 사람 모두의 영향을 받은 건가요?

츠 _ 좋은 질문이네. 에라스무스의 교회 재생 운동과 루터의 교회 개혁 운동은 처음에는 크게 구분되지 않았네. 루터 역시 에라스무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거든. 에라스무스를 위시해서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의 개혁을 처음에는 열렬히 지지했지.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라틴어에서 각국 언어로 번역한 것도 여러 인문주의자들이었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城)에 숨어서 11주 만에 독일어로 번역했던 헬라어 신약성경도 에라스무스가 편집해서 1516년에 출간한 헬라어 성경이었지.[3]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부속 교회당 건물에 ’95개조 반박문’을 못박은 마르틴 루터. 1872년 페르디난트 포웰스가 그린 작품이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나 _ 그럼 어쩌다가 루터와 에라스무스 사이에 관계가 그렇게 갈라지게 된 겁니까?

츠 _ 그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 때문이었네. 1524년에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라는 책을 쓰게 되지. 그것은 후기 중세 교회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네.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협동한다는 관점 말이야. 일종의 반(半)펠라기우스주의였던 셈이지.[4]

나 _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열렬하게 주장하던 루터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을 것 같은데요?

츠 _ 그렇지. 1525년에 루터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이란 작품을 써서 에라스무스를 거세게 반박했네. 루터는 말하기를, 인간의 의지는 일종의 말과 같다고 했지. 사탄이 그 말 위에 올라서 조종하면 의지는 사탄의 조종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 말 위에서 조종하시면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지. 이처럼 인간의 의지는 항상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다고 루터는 말했다네.[5]

 

마르틴 루터의 저서 ‘노예의지론’. (출처: wikipedia)

 

나 _ 자유의지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가 교회 개혁에 대한 이해까지도 다르게 보도록 한 건가요?

츠 _ 그렇다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양심과 자유에 근거하여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어. 하지만 루터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그런 기대가 영적 영역에서 인간이 가진 한계를 무시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지. 결국 두 사람의 차이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네.

나 _ 그래서 두 사람이 갈라진 것이군요.

츠 _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차이는 그 외에도 더 있지. 사실 그들의 자유의지 논쟁은 또한 성경관에 대한 논쟁이기도 했어. 에라스무스는 종종 말하기를 성경에는 불명료하고 모순되는 점이 있어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건전한 교리를 형성하려면 전통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어. 성경과 전통에 거의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 셈이지.[6]

나 _ 여기서도 루터가 가만히 있지 않았겠는데요?

츠 _ 당연하지. 루터는 성경이 가지는 명백성과 권위성을 철저하게 주장했다네. 그는 “성경이 성경 자신의 해석자(Scriptura ipsius interpres)”이기에 성경으로 충분히 성경을 설명할 수 있다고 봤어. 신자는 성령과 믿음으로 성경을 잘 배울 수 있다고 보았지.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전통의 의미를 깡그리 무시한 것은 아냐. 다만 전통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 아래에 종속돼야만 한다고 주장한 거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의 의미가 그런 거야. 성경만 보고 다른 건 안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지.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최종 권위가 된다는 거야.

나 _ 그렇군요.

츠 _ 전통과 이성을 성경의 권위와 거의 동일하게 두는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은 루터에겐 성경을 상대화시키는 태도로 보였지.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 원리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7]

나 _ 하지만 에라스무스도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 해석을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츠 _ 옳은 지적이야. 하지만 루터만큼 철저하지는 않았지.

나 _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떤 입장이세요?

츠 _ 나는 사실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네. 사실 내가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누누이 말하긴 하지만, 나의 신학과 사역에 루터가 끼친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지. 다만 내가 루터의 영향을 받기 전에 이미 에라스무스의 영향으로 성경을 복음적으로 읽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 두게.

 

에라스무스와 츠빙글리

나 _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와 선생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뭐죠?

츠 _ 우리 둘은 많은 공통점이 있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했고, 인간의 영혼을 강조했으며, 외적인 경건보다 내적인 경건을 더 강조한 점이 그것이라네.

나 _ 영, 영혼, 내면 모두 관련이 되는 것 같군요.

츠 _ 그렇다네. 이것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이라 볼 수 있지. 그 외에도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철학을 좋아하였다는 점이 에라스무스와 나의 공통점이야.

나 _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츠 _ 아무래도 내가 에라스무스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 말일세. 그와 함께 인간의 의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나는 에라스무스보다는 루터 쪽에 더 가까워. 사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에라스무스가 나의 작품, 『아르케텔레스』(Archeteles; 시작과 끝)를 비판하기도 했지.

나 _ 그런데도 선생님은 루터처럼 에라스무스와 갈라서지 않으셨죠?

츠 _ 그래.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을 한 이후로 완전히 갈라서고 말았지. 그래서 에라스무스를 따르던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와 등지게 됐어. 루터도 “나는 에라스무스에게 하나도 배운 것이 없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지. 하지만 나는 일평생 에라스무스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네. 특별히 에라스무스가 ‘윤리’에 대해 강조한 것을 나는 평생 기억하며 살았어.

 

스위스의 취리히

나 _ 이제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개혁 활동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당시에 취리히의 인구는 어느 정도였나요?

츠 _ 당시 취리히 인구는 대략 5,000명 정도였어. 스위스 전체가 50,000명 정도였으니 취리히가 스위스에서 작은 도시는 아니었던 셈이지. 그리고 취리히는 한 사람이 아니라 소의회와 대의회가 권한을 행사하는 공화정 체제였어.

나 _ 그렇군요. 당시 스위스는 어땠나요?

츠 _ 스위스는 이후에 칸톤(canton)이라 불리게 된 13개 주(州)들의 연합이었지.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 루체른(Lucerne), 취리히(Zürich), 글라루스(Glarus), 추크(Zug), 베른(Berne), 프리부르(Fribourg), 졸로투른(Solothurn), 바젤(Basel),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아펜첼(Appenzell)이 그것이야. 이 중에서도 당시에 바젤, 베른, 취리히는 번성하는 주들이었어. 이 모든 주들이 크기와 무관하게 법적으로 동등하고 독립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이것은 종교개혁이 확산될 때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했어.

나 _ 취리히는 종교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나요?

츠 _ 당연히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었지. 취리히는 자체적으로 주교가 없었어. 그래서 콘스탄츠 주교관구에 속해 있었다네. 주교관구란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말하네. 콘스탄츠 주교관구의 주교는 후고 폰 호헨란트베르크(Hugo von Hohenlandberg)였어. 이 주교관구에는 약 1,800개의 본당과 15,000명이 넘는 사제들이 있었지. 당시에 로마 가톨릭은 위세가 등등해서 어떤 도시에는 인구의 10%가 사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어.[8]

나 _ 당시에 로마 가톨릭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군요.

츠 _ 맞아.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사제들이 복음에는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는 거지. 단지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심지어 돈이나 쾌락을 위해서 사제가 되는 경우도 많았어.

나 _ 타락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그래서 선생님은 복음 설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츠빙글리가 설교했던 스위스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출처: Pixabay)

 

츠빙글리의 설교 사역

츠 _ 내가 에라스무스에게 배운 것이 그것이야. 나는 1506년부터 1516년까지 글라루스에서 목회하고, 1516년부터 1518년까지는 아인지델른에서 목회를 했지. 그러다가 1519년부터는 취리히의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어.

나 _ 에라스무스는 언제 만나셨다고 하셨죠?

츠 _ 1516년 바젤에서 에라스무스를 만났다네. 1519년, 취리히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이미 나는 나름의 복음적 관점을 갖고 있었지. 그래서 1519년 1월 2일부터 신약성경을 복음적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네. 먼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강해했지.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서 디모데전서, 갈라디아서, 디모데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를 선택해서 설교했어.

나 _ 신약만 설교하신 건가요?

츠 _ 그건 아니야. 구약도 설교했어. 그래서 내가 사역하는 동안 거의 성경 전체를 설교했지.

나 _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츠 _ 굉장했어. 1519년 말경에는 2,000명이 복음을 경청하고 있었어. 1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열심히 복음만을 전했더니 성도들은 점차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었던 거야.

 

흑사병(黑死病)

나 _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츠 _ 왜 없었겠어. 사실 취리히에서 첫 해는 파란만장한 해였어. 복음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가 했더니, 곧 페스트가 닥쳤어. 당시에 페스트는 한 마을을 완전히 몰살시킬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지. 취리히도 마찬가지였어. 그해 8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취리히 시민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이 페스트로 죽었지. 아…,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구먼….

나 _ 페스트는 피부에 검은색 종기를 생기게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불리지요. 선생님은 무사하셨습니까?

츠 _ 아닐세. 그해 9월에 나도 흑사병에 걸려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었어. 아…, 그때를 생각해 보면 고통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구먼….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은혜가 있었네.

나 _ 무슨 말씀이신지요?

츠 _ 병에 걸려 누워있는 동안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대해 묵상하며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됐다네. 병에서 회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흑사병의 노래” 즉, 『역병가』(Pestlied; The Plague Song)라는 시를 지었지. 거기에 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나의 고백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나의 순종을 담아냈지.

나 _ 정말 대단하십니다. 흑사병에 걸리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묵상하고, 다시 일어나 복음을 설교하셨군요!

츠 _ 그게 다 하나님의 은혜야. 내가 한 것은 하나도 없다네. 1519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더 소개해야겠네. 그해 7월에 루터가 라이프치히 논쟁을 했지. 그때 루터는 교황제도가 신적인 권한을 지닌다는 로마 가톨릭의 사상에 반대했어. 루터의 그 발언은 나에게 굉장히 영향을 미쳤어. 그래서 나는 루터를 “새로운 엘리야”로 칭송했지. 그리고 이듬해 나는 성직자가 되고 나서부터 계속 받아 오던 교황청의 성직록(聖職祿)을 거부하기 시작했어.

나 _ 교황청에서 받던 돈을 거부한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겠어요.

츠 _ 그렇지. 칼빈도 종교개혁사상을 접하고 나서 그렇게 했지. 내가 1520년부터 성직록을 거부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때부터 내가 종교개혁 쪽으로 전향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러 차례 말하지만 나는 그 이전부터 복음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설교하고 있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길 바라겠네.[9]

나 _ 네. 꼭 꼭 그렇게 기억하고 기록해 놓겠습니다. ^^😊

츠 _ 1520년에 드디어 취리히 의회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네. 설교는 반드시 성경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지. 이로써 나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네.

 

소시지 사건

나 _ 1522년에는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있죠? 역사가들이 흔히들 “소시지 사건”이라고 부르는 그 사건 말입니다.

츠 _ 그해 3월이었지. 취리히의 유명한 출판업자인 크리스토프 프로샤우어(Christoph Froschauer)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사순절에 소시지를 먹은 거야. 당시 로마 가톨릭은 사순절을 공로주의적이고 미신적으로 지켰어. 사순절에 고기를 안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야.

나 _ 그래서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츠 _ 나 개인적으로는 사순절 금식규례를 범하지 않았다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의 신앙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지. 프로샤우어는 평소와는 달리 업무가 너무 과중하여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어.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그들을 지지하는 설교를 했다네.

나 _ 그 설교는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지요?

츠 _ 그렇다네. 멀리 독일에까지 전해졌지. 그래서 이 사건을 일명 “소시지 사건”이라고 부른다네.

나 _ 루터는 스위스 사람들은 소시지 가지고 저렇게 난리법석인지 모르겠다며 비웃기도 했다는데요?

츠 _ 원래 루터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비아냥거리고 조소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 아니던가? 그의 태도에는 스위스 사람에 대한 독일인의 우월감 같은 것도 있을 걸세.

나 _ 종교개혁자들이라고 해서 다 완전한 사람은 아니죠, 뭐.

츠 _ 맞아. 나를 비롯해서 사람은 누구나 온전할 수가 없지.

나 _ 1522년 5월에는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책도 내셨지요?

츠 _ 그렇다네. 나는 『엄중한 경고』(A Solemn Exhortation)라는 책에서 복음이란 단지 종교적인 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모든 삶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네.

나 _ 사회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선생님의 그러한 관심은 취리히 종교개혁의 전반적인 특징이 되었지요.

츠 _ 나는 다만 그 모든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호소하였을 뿐이네.

나 _ 헤르만 바빙크가 선생님의 사상으로 『울리히 츠빙글리의 윤리』라는 박사논문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역시 그 사실을 강조했더군요. 바빙크는 선생께서 “루터보다 사회적 삶의 중요성을 그 전체적 측면 가운데 더욱 깊이 고찰하였다”라고 쓰고 있어요. 또한 그는 “기독교란 전체 사회에 스며드는 누룩이며, 세상을 다스리기 전까지는 쉬지 아니하는 이 땅의 소금이며 힘이라는 것을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츠빙글리보다 더 잘 인식한 사람은 없었다”라고도 적고 있지요.[10]

츠 _ 그래? 허, 바빙크 그 사람…, 쑥스럽게도 지나친 칭찬을 했구먼.

 

다음 편 보기(클릭)

 

네덜란드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출처: wikipedia)

 


[1] 이 가상 대화를 작성하며 아래 자료들을 참조했다. W. P.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박경수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J. V. Pollet, “L’image de Zwingli dans l’historiographie contemporaine,” Bulletin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 130 (1984): 435–69; 주도홍,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정요석 편집, 『한 권으로 읽는 츠빙글리의 신학』(서울: 세움북스, 2019), 13-32.

[2] 에라스무스의 “성경적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라. C. A. L. Jarrott, “Erasmus’ Biblical Humanism,” Studies in the Renaissance 17 (1970): 119–52.

[3] 에라스무스가 이 헬라어 신약성경을 출간하게 된 경위는 Jarrott, “Erasmus’ Biblical Humanism,” 120를 보라.

[4]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반(半)펠라기우스주의는 구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이지만, 그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 공로가 되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상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에 잘 드러난다. 하지만 개혁신학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지는 것이며, 인간의 믿음과 선행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의 산물이요 열매라고 가르친다.

[5] 우병훈, 『처음 만나는 루터』(서울: IVP, 2017), 174-76을 참조하라.

[6] 에라스무스의 생각은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로마 가톨릭의 공식적 입장이다.

[7] Wolf-Dieter Hauschild, Lehrbuch der Kirchen- und Dogmengeschichte, vol. 2, Reformation und Neuzeit, 2nd ed.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2001), 298-99를 보라.

[8] Scott H. Hendrix, Martin Luther: Visionary Reform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5), 24: “1500년대 독일에서는 한 마을 인구의 10퍼센트가 성직자라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9] 츠빙글리가 언제부터 개혁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1516년이라 보기도 하고, 더 늦춰서 1522년이라 보기도 한다. 아마도 1516년부터 시작된 그의 복음적 여정이 1522년 무렵에 완전히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자신이 1516년 그리스도와 성서를 향하고 있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50-51쪽을 참조.

[10] Herman Bavinck, De ethiek van Ulrich Zwingli (Kampen: G.Ph. Zalsman, 1880),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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