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루터의 견해를 ‘공재설’(共在設)이라고 부르지.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아래(sub), 그 안에(in), 그와 함께(cum)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계신다는 주장이야. 루터가 보기에는 그리스도는 그 신성과 인성이 모두 편재하기에 성찬에도 육체적으로 계신다고 했지. … 나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한다기보다는 다만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본문 중)

우병훈(고신대학교 교수, 교의학)

이번 글로써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가상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1] 그의 생애 후반부를 같이 한번 살펴보실까요?

 

울리히 츠빙글리와의 대화 1편 보기

울리히 츠빙글리와의 대화 2편 보기

 

제 1, 2차 취리히 논쟁

_ 1523년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츠빙글리(이하 츠) _ 그해 1월 29일에 있었던 “제1차 취리히 논쟁”과 10월 26-28일에 있었던 “제2차 취리히 논쟁”을 말하는구먼.

_ 예. 맞습니다.

_ 당시에 토론회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전파하고 확립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지. 나는 취리히에서 그 일을 시도한 거야. 특히 제1차 취리히 논쟁이 중요하지. 1523년 초에 내가 요청하여 취리히의 대·소의회는 일종의 종교담화를 갖기로 결정했지. 그때 600명 이상이 토론회에 참여했어.

_ 취리히 시민의 10분의 1이상이 참여한 대단한 모임이었군요.

_ 그렇지. 나는 그때까지 설교한 내용을 “67개 조항”이라는 글로 새롭게 정리하여 발표하였다네.[2] 나는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학문적 토론에서 사용하는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를 사용하였지.

_ 종교개혁자들이 학문적 논의는 라틴어로 다루고, 설교나 대중 강연은 모국어로 했던 것이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_ 그렇다네.

_ 제 1차 취리히 논쟁의 결과는 어땠는가요?

_ 의회는 최종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었지.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어. “울리히 츠빙글리 선생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부터도 거룩한 복음과 참된 성경을 원하는 만큼 계속해서 설교할 수 있다. 그가 더 나은 것을 배우게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기로 한다.”[3]

_ 드디어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의 승리가 쟁취되었군요!

_ 그렇지.

 

제1차 취리히 논쟁.

 

성찬의 개혁

_ 나는 여세를 몰아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네. 1525년에 처음으로 개혁된 형식의 성만찬이 거행되었지. 자네는 로마 가톨릭의 성찬론을 아는가?

_ 화체설이지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사상이지요.

_ 맞네. 그들이 그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성찬을 일종의 희생제사로 보기 때문일세.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 희생제사를 다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_ 네. 하지만 개혁자들은 성찬은 결코 희생제사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지요?

_ 그렇다네.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찬은 제사가 아니라, ‘식사’라네. 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지.

_ 맞습니다. 하지만 성찬에 대한 다른 견해 때문에 루터와 논쟁도 하셨지요?

_ 그렇다네. 그 얘긴 좀 있다 하기로 하겠네.

 

선지자 학교의 설립

_ 1525년 얘기를 좀 더 하고서 말일세. 그해 6월에는 “선지자 학교”(Prophezei)가 세워졌지.

_ “선지자 학교”가 뭔가요?

_ “선지자 학교”는 일종의 신학교라네. 우리는 일주일에 다섯 차례 모여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성경 원전을 연구했지. 나는 성경 원어에 대한 이해가 신약에 나오는 방언의 은사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겼어.

_ 하나님의 말씀을 원전으로 연구하는 학교! 아주 멋지네요.

_ 사실 신학교를 이런 형식으로 세운 것에는 이유가 있어. 당시에는 종교개혁에 대하여 보수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로 양편의 입장이 팽팽하게 갈라져 있었다네. 보수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을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지.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수구적 전통에 얽매여 있었어. 반대로 급진주의자들은 재세례파처럼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정부나 군대, 공권력을 아예 멀리 하던 사람들이었어. 특히 많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들이 직통 계시로 받은 성령의 내밀한 음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곤 했지.

_ 상황이 단순하지 않았군요.

_ 그렇다네. 이런 ‘복잡한 상황’을 나는 ‘단순한 해법’으로 이겨내고자 했네. 그것이 바로 선지자 학교였지. 나는 성경에 정통한 설교자는 인간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고 믿었어.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의 ‘잘못된 전통주의’와 급진주의자들의 ‘지나친 신령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고 믿었지.

_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혁파 교회의 특징이 선생님의 선지자 학교에 기인하는 것이로군요.

_ 물론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야. 당시에 루터와 부쩌 그리고 이후에 칼뱅과 불링거 모두 그렇게 생각했어. 아무튼 나는 개혁파 목사는 성경을 원전으로 연구함으로써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나 재세례파의 순회설교자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했어.

_ 정말 멋진 전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성경 외에 다른 책들을 읽어서는 안 되는 건가요?

_ 그건 아닐세. 나 역시도 교부 연구를 통해서 매우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인생의 위대한 스승이었네. 사람들은 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됐는지, 아니면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기에 그 결과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이르렀는지 토론하기도 하네. 하지만 정말 부질없는 일이야! 왜냐하면 나에게 그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지.

_ 신학과 성경을 대립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_ 그렇다네. 특히 고대 교부들의 신학은 우리에게 성경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주네. 그 역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교부 연구와 성경 연구는 상호풍요화 과정에 있는 것이지, 결코 서로 대립되어서는 안 되네.

_ 예. 명심하겠습니다.

 

수구적 보수와 과격한 급진 사이에서

_ 이후의 개혁은 순탄했는지요?

_ 이 사람아, 순탄했을 리가 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따라 살려는 인생은 결코 순탄한 법이 없다네.

_ 맞습니다, 선생님. 사도 바울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말씀하셨지요.

_ ‘아멘’이네. 나는 수구적 보수주의자들과 과격한 급진주의자들 사이에서 곤혹을 치렀지. 수구적 보수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네. 나는 이들을 토론을 통해 설득시켰지. 하지만 나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자들이 있었다네. 그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어.

_ 그들이 누구지요?

_ 펠릭스 만츠(Felix Manz)와 콘라트 그레벨(Conrad Grebel)이 급진주의자들의 대표자들이었다네. 그들은 성경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하였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모든 관습은 다 없애버리려고 하였지.

_ 예를 들어 어떤 관습들이었나요?

_ 가령, 급진주의자들은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어. 성찬 예복도 입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 그들은 또한 십자가 성호를 긋는 관습도 거부하였네. 심지어 교회 내부와 외부에 있던 조각상들과 성상들을 파괴하거나 불태워버렸지. 무엇보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유아세례를 거부하였다네.

_ 과격한 엄격주의자들이었군요.

_ 그렇지. 나는 그런 주장에 대해서, 관용의 필요성을 역설했어. 나는 성찬 예복을 입을 수도 있으며,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어. 그 외에도 성만찬을 언제 얼마나 자주 거행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찬에서 누룩 없는 무교병을 사용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들을 개별 교회의 자유에 맡겨 두었다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유아세례도 인정해 줘야 한다고 보았지.

_ 그러셨군요…. 선생님은 급진주의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자 했나요?

_ 나는 그들을 자주 만났다네. 뭐든지 이견(異見)이 있을 때에는 만나서 얘기하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토론회도 개최하였지. 수구주의자들은 토론회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는 토론회를 통해서 급진주의자들을 설득하길 원했네. 결국 우리는 1524년 6월에 성상들과 조각상들을 제거하기로 했지.

_ 점진적이었지만 그래도 점점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관행들을 제거해 나가셨군요.

_ 그렇다네. 나는 가급적 시의회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때까지 개혁을 미루기도 했네. 그런 점에서 나는 수구적 보수주의도 반대했지만, 과격한 급진주의에도 동조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네. ‘개혁’이란 언제나 중심과 균형을 잡는 것이지, 결코 ‘혁명’은 아니거든.

_ 그렇군요. 루터나 칼뱅도 역시 그런 길을 간 것 같습니다.

_ 맞아. 하지만 나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에서 의회가 차지하는 지위를 다른 종교개혁자들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네. 나는 이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지. 물론 나는 의회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리고 의회는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암묵적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보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쩌, 오이콜람파디우스, 칼뱅과는 달리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의회의 역할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네.

_ 교회와 의회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주장한 것이군요.

_ 그렇다네. 부쩌, 오이콜람파디우스, 칼뱅이 교회의 독자성을 보다 강조했다면, 나는 의회의 책무를 좀 더 강조했다고 볼 수 있지.

_ 왜 그러셨나요?

_ 나는 교회가 함께 모여 의논하다 보면 분열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의회의 대의제(代議制)를 통한 의결방식이야말로 개혁을 평화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

_ 취리히의 상황에서는 의회의 도움을 얻어서 개혁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 것이군요.

_ 그렇다네. 하지만 나는 상황에 따라 그렇게 본 게 아니라, 신학적 이유에서 그렇게 본 것임을 기억해 주게.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göttliche Gerechtigkeit)와 “인간의 정의”(menschliche Gerechtigkeit)라는 관점에서 개진했지.

_ 좀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_ “인간의 정의”란 율법의 외적인 준수를 뜻하지. 이는 인간들의 공생을 위하여 주신 율법의 기능을 가리키지. 이것은 비단 신자만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네. 반면에, “하나님의 정의”란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오직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이야.

_ 그렇군요.

_ 좀 더 설명하자면, 성령은 복음 설교를 통해서 신자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선행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신다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도록 하시지.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는 신자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성령의 능력부여를 통해 가능하다네. 이 과정에서 신자는 잔존하는 죄를 극복하며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야.[4]

_ 츠빙글리 선생님의 주장은 루터 선생보다는 성화의 과정이 좀 더 균형 있게 신자들의 삶에 안착하도록 돕는 것 같습니다.

_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네, 허허허….

 

예배의 개혁

_ 특별히 나는 예배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어. 종교개혁은 예배 개혁 운동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지.

_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_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사를 성만찬으로 대체시킨 것이지. 1525년 부활절에 드디어 그 일이 성취되었네. 정면을 향해 서서 사제와 신자들이 제사 드리듯이 드리는 미사를 이제 말씀과 성찬 중심의 예배로 개혁했네. 성찬상은 제일 앞에 두던 것을 약간 뒤로 빼어, 찬양대석과 회중석 사이에 두었지.

_ 그렇군요.

_ 금잔이나 은잔과 같은 화려한 잔도 제거했네. 빵은 나무접시에 담고, 포도주는 나무잔에 채웠지. 언어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진행했다네.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남녀가 나눠앉게 했고, 지정된 목회자들이 빵과 포도주 둘 다를 분배했지.

_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일반 신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았지요?

_ 그렇다네. 그들은 떡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고,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생각했어. 떡이나 포도주 중에 조금이라도 흘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었지. 그래서 떡은 웨이퍼 모양으로 만들어서 신자의 입에 사제가 직접 넣어주었어. 하지만 포도주는 아무래도 쏟기가 쉬웠지. 그래서 아예 주지를 않고 사제만 포도주를 마셨지.

_ 로마 가톨릭은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빵과 포도주 둘 중에 하나만 받아도 둘 다를 받은 것과 같다는 “콘코미탄티아”(concomitantia) 교리를 분명하게 천명했지요.[5]

_ 그렇다네. 다 잘못된 사상이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까 말일세.

_ 말씀의 개혁도 빼놓을 수 없지요.

_ 맞아. 예배의 개혁은 말씀의 개혁이었지. 당시에 로마 가톨릭 미사에서는 설교가 아주 형식적이었지.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어. 있다 하더라도 성인(聖人)들에 대한 예화 중심의 설교가 흔했지. 하지만 나는 철저하게 성경 말씀을 강해하는 설교를 주장했지.

_ 선지자 학교의 정신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군요.

_ 그렇다네. 그런 점에서 1525년은 취리에서 중요한 해였어. 그 해에 처음으로 개혁된 형식의 성만찬이 거행되었고, 6월에는 선지자 학교가 제도화되었기 때문이지.

_ 감사한 해로군요.

_ 맞아. 하지만 아픔도 있었네.

_ 그게 뭐죠?

_ 1525년 1월 21일에 유아세례를 반대하던 급진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재세례를 베풀었네. 콘라트 그레벨은 게오르게 블라우록(George Blaurock)에게 세례를 주었고, 블라우록은 다시 다른 열다섯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지.

_ 상황이 심각해졌군요.

_ 맞아. 나는 급진주의자들과 대화하고자 했지만 사실 아무런 결실이 없었지. 결국 1526년 3월 7일 취리히 의회는 재세례를 행하는 자들은 수장시키겠다고 위협하였어. 그리고 1527년 1월 5일 펠릭스 만츠가 그 형벌을 당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

_ 그렇군요…. 가슴이 아픕니다.

_ 하지만 나는 개혁을 멈출 수 없었네. 1525년 1월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률이, 5월에는 결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도록 했지. 1528년과 이후 여러 해 동안 종교대회의 소집과 더불어 또 다른 형태의 규제가 이루어졌고, 1530년 5월에는 중요한 도덕규율이 제정되었지.

_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셨군요.

_ 나는 예배의 개혁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법률 제정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예배가 그야말로 가식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네. 나는 공동체 ‘전체의 삶’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에 놓여야 한다고 보았다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인정이야말로 내 종교개혁의 모토라고 할 수 있지.[6]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

_ 이제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을 설명해 주실 시간인 것 같습니다.

_ 나와 루터 사이에 신학적 논쟁은 이미 1523년부터 그 불씨가 시작되었다네. 특히 1527년과 1528년에 나와 루터는 성만찬론에서 서로를 반대하는 중요한 작품들을 썼지.

_ 그러던 차에 1529년 헤센의 필립이 자신의 성(城) 마르부르크로 개혁자들을 초청하여 서로 대화하게 했지요?

_ 그렇다네. 로마 가톨릭의 반대가 점점 심해져서 일치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지. 마르부르크 회담은 그해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지속되었다네. 루터 편에서는 멜란히톤이, 그리고 내 편에서는 부쩌와 오이콜람파디우스가 중재하고자 했지.

_ 최근에 학자들은 차이점보다는 일치점도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_ 그렇다네. 양측이 합의조항들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는 했지만, 마르부르크 회담은 상당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어. 15개 조항 가운데 14개 조항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말일세. 성만찬에 관한 15번째 조항에서도 부수적인 한 가지를 뺀 나머지 다섯 가지 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네.

_ 하지만 루터 선생에게는 바로 그 한 가지 불일치 사항이 너무나 큰 문제였지요?

_ 맞아. 루터는 끝까지 성만찬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주장을 했지. 결국 루터는 나를 형제로 보려고 하지 않았어. 그 때문에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연합의 길이 막혀버렸지.

_ 그렇군요.

_ 보통 루터의 견해를 ‘공재설’(共在設)이라고 부르지.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아래(sub), 그 안에(in), 그와 함께(cum)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계신다는 주장이야. 루터가 보기에는 그리스도는 그 신성과 인성이 모두 편재하기에 성찬에도 육체적으로 계신다고 했지.

_ 선생님의 견해는 ‘기념설’(紀念設)이라고 부르지요?

_ 맞아. 나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한다기보다는 다만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

_ 두 의견의 차이는 결국 좁혀지지 않았군요.

_ 마르부르크 회담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극심한 갈등으로 끝나고 말았어. 루터는 “우리는 다른 영을 가졌다”라며 나를 거부해 버렸네. 그래서 나는 루터파와 동맹을 이루지 못했지. 반면, 로마 가톨릭의 반대는 날로 심해졌다네.

_ 그랬군요.

 

 

츠빙글리의 마지막 날, 그리고 새로운 시작

_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네. 이미 취리히는 1527년 콘스탄츠와, 1528년 베른 및 장크트갈렌과 동맹을 맺었지. 그리고 1529년 바젤, 샤프하우젠, 빌, 뮐하우젠과, 1530년 헤센과 동맹관계를 더 맺었다네.

_ 로마 가톨릭도 세력을 넓혔지요? 우리, 슈비츠, 추크, 루체른, 운터발덴의 다섯 주들은 1524년에 이미 취리히의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고, 1529년에는 오스트리아 국왕 페르디난트와 제휴한 상태였지요.

_ 맞아. 로마 가톨릭 세력과 취리히는 점점 갈등이 깊어지다가, 결국 1531년 10월 9일에 우리, 슈비츠, 추크, 루체른, 운터발덴의 다섯 주의 군대가 결집하여, 취리히의 주 경계를 넘어왔어. 취리히 시는 불과 20킬로미터 밖에 있었다네. 취리히 의회가 황급히 모인 후에, 전위부대가 도시를 출발하였어. 1,500명으로 구성된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지.

_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_ 나는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톨릭 주들을 이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기에 앞장 서 나갔지. 스위스의 관습에 따라 나는 군목으로서 말을 타고 깃발을 들었어. 먼저 전장에 가 있는 1,200명을 지원하기 위해 1,500명의 군사를 전쟁터로 재촉하였다네. 그러나 지치고,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데다가 수적으로도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길 수 없었지. 그리고 나도 결국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최후를 맞이했지.

_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군요….

_ 괘씸하게도 루터는 나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어. 하지만 부쩌는 나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며칠 후 멜란히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네.

그는 실로 경건한 사람으로, 주님을 믿고 참된 학문을 매우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백성들에게 널리 진작시켰습니다. … 참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조국의 구원만을 바랐습니다.[7]

_ 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일하셨지요?

_ 그렇다네. 개혁은 원래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아니겠는가? 1531년 10월 11일, 나의 죽음과 카펠에서의 패배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잠시 중단시켰다네. 하지만 취리히에서 젊은 하인리히 불링거가 나를 계승하여 내가 시작한 일을 이어나갔다네. 그리고 몇 년 후 제네바에서도 칼뱅의 지도 아래 종교개혁이 새롭게 숨쉬기 시작했지.

_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주님께 충성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_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큰 뜻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네.

_ 선생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삶에서처럼 이 대화를 읽는 모든 이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바랍니다.

_ Soli Deo Gloria(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_ 아멘!


[1] 이 가상 대화를 작성하며 아래 자료들을 참조했다. W. P.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박경수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J.V. Pollet, “L’image de Zwingli dans l’historiographie contemporaine,” Bulletin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 130 (1984): 435–69; 주도홍,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정요석 편집, 『한 권으로 읽는 츠빙글리의 신학』(서울: 세움북스, 2019), 13-32.

[2] 츠빙글리의 67개 조항은 루터의 95개 논제보다 더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67개 조항과 그에 대한 츠빙글리의 해설은 취리히 종교개혁의 시작이 전면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49.

[3] 독일어로는 아래와 같다. “dass Meister Huldrych Zwingli fortfahre und von nun an wie bisher das heilige Evangelium und die wahre heilige Schrift verkünde, so lange und so viel, bis er eines Besseren belehrt werde.”

[4] Wolf-Dieter Hauschild, Lehrbuch der Kirchen- und Dogmengeschichte, vol. 2, Reformation und Neuzeit, 2nd ed.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2001), 335.

[5] 루터는 화체설과 “콘코미탄티아” 교리 모두를 반대했다(Luther’s Works, 17:82의 각주 19 참조). 한편, 멜란히톤이 작성하고 루터도 승인했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의 제22조에서는 “추기경 쿠사누스(Cusanus, †1464)는 이러한 방법이 시행되었다고 말하지만, 성찬의 한 요소만 취하는 이러한 관행이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6]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220.

[7] 스티븐스,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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