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을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취약계층이 처해 있는 현실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양식에 대한 미시적 분석이 시급히 요구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천편일률적인 복지 정책 자체도 문제이지만, 해당 정책이 실제로 취약계층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 효과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영향평가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다.(본문 중)

김부열 (KDI 국제정책대학원)

 

2019년 노벨경제학상은 MIT대 아브히지트 배너지(Abhijit Banerjee) 교수와 에스더 듀플로(Esther Duflo) 교수, 그리고 하버드대 마이클 크레머(Michael Kremer) 교수에게 수여되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3명의 개발경제학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개발도상국에서 교육, 보건, 농업, 환경, 성 평등, 제도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빈곤퇴치 연구를 수행하였고, 그들의 연구 결과는 개도국 정부, 원조 공여국 정부, 국제기구 등의 빈곤퇴치 정책에 반영되어 수천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왼쪽부터 아브히지트 베너지, 에스더 듀플로, 마이클 크레머. (출처: Nobel Media 트위터 갈무리)

 

기존 개발경제학 논의는 한 국가의 성장, 발전 동인을 탐구하는 거시적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자본투자가 경제성장의 핵심 요인이라는 헤로드-도마 경제성장 모델(Harrod-Domar Model), 자본투자의 수확체감현상을 고려하게 되면 기술 발전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이라는 소로우 경제성장 모델(Solow Growth Model), 그리고 성장의 핵심 요인인 기술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연구한 로머의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 모두 국가 단위의 거시적 분석모형이고, 이를 실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개발경제학 연구들 역시 국가 간 비교연구가 대부분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개발경제학은 국가 단위의 거시적 분석에서 개인 단위의 미시적 분석으로 조금씩 그 중심을 이동하면서, 국가 단위 분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개개인의 행동양식을 살펴보게 되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직면한 삶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프로그램 및 정책의 효과성을 엄밀하게 평가하였다.

일례로 크레머 교수는 아프리카 케냐 시골지역 초등학생들의 높은 결석률과 낮은 학업성취도를 개선하기 위해 먼저 그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해당 지역 아동들의 기생충 감염이 매우 심각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3년에 걸쳐 초등학교 75개교에 구충제 보급 사업을 실시하였고, 구충제를 처방받은 학생들의 출석률, 학업성취도가 크게 향상되었음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다. 크레머 교수의 연구를 통해 케냐 정부는 구충제 보급 사업을 전국 단위로 확대하였고, 전 세계 수많은 원조기구도 개발도상국에서 교육 및 보건 사업을 진행할 때 구충제 보급 사업을 포함시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수천만 명의 아동들이 크레머 교수의 연구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고 학업성취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크레머 교수가 케냐에서 실시한 다양한 교육지원 사업 중 기대했던 효과가 나오지 않은 연구도 있었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교과서 없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교과서 보급 사업을 실시하였는데, 교과서를 받은 학생과 받지 않은 학생 간의 학업성취도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를 분석한 결과,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 대다수가 초등학교 1~2학년 수준의 국어실력과 산수실력조차 갖추지 못해 제공받은 교과서를 활용할 수 없는 상태임이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크레머 교수의 교과서 보급 사업은 기대했던 긍정적인 효과를 얻지 못했지만, 개발도상국 학생들의 저조한 학습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배너지 교수와 듀플로 교수가 인도에서 실시한 보충학습 프로그램에 반영되었다. 학습 성과가 저조한 학생들을 기존 학급에서 분리하여 별도로 집중적인 기초 보충학습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인도 정부는 이를 전국 단위로 확대하여 자기 학년 공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수천만 명의 학생들이 보충 학습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에스더 듀플로(가운데 주황색 가디건)와 마이클 크레머(뒷줄 좌측)이 케냐에서 연구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 테드 미구엘(UC 버클리 경제학 교수, 우측에서 세번째)도 이 연구에 함께 참여하였다.(출처: UC 버클리 뉴스 갈무리)

 

한편, 이러한 미시적 개발경제학 연구가 크게 확산되고 올해 노벨경제학상까지 받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무작위통제실험에 기반을 둔 과학적 영향평가 분석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작위통제실험은 제비뽑기와 같은 무작위 방식으로 실험군과 대조군을 나누고 실험군에게만 효능을 입증하려고 하는 치료약(프로그램 또는 정책)을 제공한 후, 그 차이를 비교하는 연구방식이다. 의학 분야에서 치료약의 효능을 가장 엄밀하게 입증하는 연구방법론으로 무작위통제실험 방식이 주로 사용되고 있는데, 1990년 중반부터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3명의 개발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무작위통제실험 연구방법론을 개발경제학 연구에 적극 도입하였다.

치료약 때문에 실제로 질병이 치료되는지를 연구한다는 것은 치료약과 질병치료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관계를 엄밀히 입증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락변수편의, 측정오류, 역인과관계, 선택편의 등의 내생성 문제로 인해 무작위통제실험과 같은 연구방법론 없이는 엄밀한 인과관계를 분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과학적 증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정책 평가는 보통 정파적·정략적 입장에서 소모적 논쟁에 빠지기 쉬운데, 최근 개발경제학 연구는 무작위통제실험 방법론을 통해 빈곤퇴치정책이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를 엄밀하게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적 증거에 기반을 둔 빈곤퇴치 정책을 설계할 수 있었고, 전 세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국내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을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취약계층이 처해 있는 현실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양식에 대한 미시적 분석이 시급히 요구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천편일률적인 복지 정책 자체도 문제이지만, 해당 정책이 실제로 취약계층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그 효과를 엄밀하게 평가하는 영향평가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다. 올해 기획재정부는 경제정책방향에서 무작위통제실험 방식을 통해 신규 사회정책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평가한 후 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정책실험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현하지는 못하였다.

앞으로 국내외 취약계층을 돕기 위한 다양한 사회, 복지, 원조 및 개발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할 때,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3명의 개발경제학자들과 같이 ‘지극히 작은 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미시적 분석 관점과 해당 정책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실험적 방법론을 적극 도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경제학도 그저 차갑고 음울한 학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따듯한 학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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