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내내 김지영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쳤다. 단지 같은 성별이라서 느끼는 동질감이 아니라 그의 삶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김지영이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기 띠로 아기를 메고 가방을 들고 급하게 찾아 들어간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카메라를 떠올리며 다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대낮에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에 모여든 엄마들을 떠올리게 한다.(본문 중)
한선미(81년생, 평신도)
“내가 아는 애 중에 네 팔자가 제일 좋대.” 오랜만에 대학 선배들과 밥을 먹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제일 좋대? 누가?” “우리 신랑이.” 내가 그 선배의 남편과 사는 것도 아닌데, 그는 나의 무엇을 보고 팔자가 좋다고 생각했을까? 또 그 선배는 왜 그 말을 나에게 전한 것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돌아보니 나를 팔자 좋은 여자라고 생각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나는 집에서 살림하고, 취미 생활도 하고, 책도 읽으며 살고 있으며, 심지어 애도 (그것도 무려 여자애) 하나만 키우고 사는 ‘집에서 노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얼마 전 시작한 경력 단절 여성 재취업 프로그램을 따라가느라 매일 틈날 때마다 온라인 강의를 듣고, 한참 전의 경력을 이렇게 저렇게 포장하느라 머리를 쥐어뜯는다. 집 근처에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지 시간제 일자리는 없는지 취업 사이트를 뒤지다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잠들 때까지 아이 챙기랴 집안일 하랴 허둥댄다. 이런 생활 속에서 다시 나의 일을 찾는 것이 가능할까 수십 번 고민하고 밤새 쓴 이력서를 내 보지만 면접은커녕 서류 통과도 요원하다. 육아도 경력 단절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경력을 쌓는 것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그런 말은 왠지 우리끼리의 리그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에게 팔자 운운하던 그 선배의 삶은 어떠한가? 매일 아침 통근 버스 타느라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신발부터 던져 놓고, 양말은 늘 버스에서 신는다고 한다. 계속 해왔던 일을 좀 쉬고 싶다가도 영영 다시 돌아갈 곳이 없을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누구의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제작 단계부터 참 말이 많았다. 출연을 결심한 여배우의 SNS 계정에는 “왜 그런 영화에 출연하느냐”, “실망했다”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봉 전에도 후에도 계속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지금도 영화 후기에 감상평이 달리며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책이 출간되었을 때 독서 모임에서 엄마들과 함께 이 책을 읽었다. 마침 우리들이 딱 81년생, 82년생들이라 이해와 공감의 밀도가 높았다. 주인공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을 넣어도 하나 다를 것 없는 이야기였다. 억울해하며, 서글퍼하며, 때로는 ‘어쩔 수 없었지’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면서 자기 이야기처럼 읽었다. 하지만 그 삶을 이해한다고 해서, 나의 삶이 새롭게 정의된다고 해서, 당장 현실에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 모임도 아이가 아프거나 갑자기 집안일이 생겨서 참석 못한 엄마들이 절반이나 되었다. 실컷 감정을 토로하고 이야기해보지만 소설이 아닌 지금 이곳을 사는 나의 이야기는 답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보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나 자신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다가도 누군가가 몰래 찍은 내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보는 나 자신이 낯설어 보이고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81년생 한선미’의 모습이 ‘82년생 김지영’의 모습을 통해 보일 때, 그 답답한 나를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김지영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쳤다. 단지 같은 성별이라서 느끼는 동질감이 아니라 그의 삶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영화에서 김지영이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기 띠로 아기를 메고 가방을 들고 급하게 찾아 들어간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 카메라를 떠올리며 다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대낮에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에 모여든 엄마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그냥 시간이 많거나 무얼 소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곳에는 다른 곳 화장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아기 기저귀 교환대가 있고, 화장실 괴담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적다고 느껴지며, 밥 먹을 때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아기용 의자가 있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그런 이유들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여성안심귀가서비스’, ‘여성안심무인택배함’만으로 진정 이 사회가 여자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고, ‘여자만 위해 주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귀갓길에 마주친 위협적인 남성에 대한 공포는 부당한 것이고, 위협을 가하는 남성에 대한 분노와 훈계 대신에 ‘아무한테나 웃지 말고 옷 단정히 입고 다녀야 한다’라는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이 익숙한 해결 방식은 영화 속에서나 여기서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 김지영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안 남편 정대현은 김지영에게 “이번 명절에는 양가에 가지 말고 우리끼리 쉴까?”라고 묻는다. 물론 아내의 상태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지만 김지영이 느끼는 며느리, 딸로서의 무게를 충분히 체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김지영이 다시 일하고 싶지만 베이비시터가 구해지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아픈 것 같아 만류하는 것 같지만, 만약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과연 적극적으로 육아휴직을 언급하고 직접 베이비시터를 구하려고 노력했을까? 김지영은 말한다. “나만 전쟁이야.” 집에 있으면 혼자 도태될 것 같아서 아이가 유치원 가면 수학 문제집을 풀고, 회사에서는 아이 떼어놓고 일 열심히 한다고 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영화 속 김지영 주위의 다른 김지영들은 이렇게 느낀다. “저 벽을 돌아가면 출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벽이 있고…. 처음부터 출구는 없던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탈출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김지영의 엄마 미숙은 본인의 삶을 중단하고 김지영의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딸 김지영을 다시 문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엄마 미숙은 자신의 삶 대신 남의 삶을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하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포기했고 미싱에 손을 다쳐 가면서 오빠들의 공부를 도왔다. 금쪽같은 소중한 딸을 위해서 자신의 가게, 시간을 포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한국 사회에서 독박육아와 경력 단절에서 딸들을 구원해 줄 구원 투수들은 제도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다. 바로 미숙과 같은 친정엄마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지점에서 김지영의 입을 통해 말한다.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살라’고. 누군가를 대신하는 인생 대신, 자기 것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소설과 영화의 결말은 조금 다르게 펼쳐진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김지영의 이야기, 김지영의 병이 발생하게 된 이런 이유들을 다 듣고 공감하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 각자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선택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김지영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는 것처럼 보였던 의사조차 자신의 간호사가 결혼 문제로 퇴사하게 되자 ‘다음 간호사는 미혼을 뽑아야겠어’라고 말한다.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다. 그 안에 연대는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김지영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통해 힘을 얻고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맘충’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의하고 그에 대해 자신이 해야 할 마땅한 말을 한다. 영화 초반의 비슷한 장면에서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마는 김지영과는 다른 모습이다. 자신의 수첩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나만 전쟁이야’라고 내뱉던 독백에서 함께하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없이 그저 머물러 있던 남편은 이제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함께 살고 자라왔지만 김지영이 어떤 빵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김지영의 남동생과 아버지는 이제 김지영의 존재에 적절한 호칭을 지어주고 그녀의 사소한 일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어쩌면 82년생 김지영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찾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요구되는 역할에 가려진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벽을 돌면 다시 벽이 나오는 김지영들이 탈출할 수 있는 문이 아닐까. 교회 공동체 안에도 82년생 김지영들이 가득하다. 아마 자모실에는 김지영이 있고, 식당 봉사실에는 지영이 엄마 미숙이가 있을 것 같다. ‘가정을 돌보는 일은 성경이 명하는 귀한 일이니 소명의식을 갖고 아이와 남편을 잘 세워라’ 등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82년생 김지영들은 어디에서 자신의 이름과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랑과 헌신은 소중한 가치이지만, 존재를 잃고 텅 비어 버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자신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김지영들에게 우리 공동체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지금의 교회는 이 시대의 김지영들에게 영화 속 누구의 모습으로 비칠까? 또 훗날 다가오는 숱한 92년생, 02년생, 12년생 김지영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까? 영화는 우리에게 편을 가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10분도 보지 않고’, ‘상처 주기 위해’ 타인을 판단하고 혐오하며,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에 존재하는 인생의 무게와 고통의 깊이를 모른 척하고 마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초대하는 것 같았다. 그 초대에 어떤 삶으로 응답하며 살아갈 것인지, 우리 곁의 김지영들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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