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천 년 동안 모든 교회는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어느 마구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낳은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여관에서 빈방을 찾지 못해 말과 소와 양이 지내는 마구간에 태어나신 걸까요? (중략) 이스라엘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 마구간이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밝히려고 오랫동안 씨름했습니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유년 주일학교 시절 성탄절이 다가오면 교회는 성극 준비로 떠들썩했습니다. 늘 동방박사 시리즈만 상연하다가 어느 해인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연극 제목은 “빈방 있습니까?”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의 성탄절 성극에서 바보 소년 덕구가 베들레헴의 여관 주인 역을 맡습니다. 덕구가 해야 할 대사는 하나뿐입니다. “빈방 없어요.” 한겨울에 찾아온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를 그 한마디로 단칼에 거절해야 하는데, 덕구는 차마 그러질 못합니다. 한참 망설이다 “빈방이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라고 말하는 바람에 연극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집에 돌아온 덕구는 방에서 혼자 울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한테 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요.” 연극은 찡한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렸습니다.

 

연극 <빈 방 있습니까?> 이미지. ⓒ극단 증언

 

이렇듯 지난 이천 년 동안 모든 (특히 서방) 교회는 마리아와 요셉이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어느 마구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낳은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여관에서 빈방을 찾지 못해 말과 소와 양이 지내는 마구간에 태어나신 걸까요?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람이 마구간에서 태어난다는 사실 자체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성서 고고학자들은 그 마구간이 과연 어떤 곳이었는지 밝히려고 오랫동안 씨름했습니다.

영국의 신약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당시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 말이 안 될 정도로 원시적인 수준이었다고 말합니다.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가 도움을 청할 친척이 없어 유숙할 여관을 찾았다면, 그들은 먼저 당시 베들레헴 마을 중앙에 자리한 공용하는 뜰로 갔을 것입니다. 일종의 자그마한 마을 광장입니다. 거기에는 동물들을 위한 마구 시설들이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일렬로 세워진 헛간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헛간 수준의 방들이 나그네들이 하룻밤을 묵는 잠자리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골의 허름한 헛간보다 훨씬 못한 것이었지요. 당시 여관은 식사 시설도 갖추지 못해 여행자는 자기 식사를 알아서 해결해야 했고, 여관 주인이 하는 일이란 고작 요리할 불과 동물들을 먹일 사료를 꺼내주는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호적조사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혼잡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 초라한 헛간 같은 방도 얻지 못하여 마을 광장 한가운데 여행자들이 동물들을 매어두었던 공동 마구간으로 가서 아기를 해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의 작품 “Where was Jesus born?” (소장: Scrovegni Chapel)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이 마을 광장의 마구간이라니요! 낮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밤에는 동물들을 매어 놓는 마을 광장, 누구나 지나갈 수 있고 누구나 동물을 매어 놓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태어나신 셈입니다. 제대로 된 지붕이나 벽 같은 것도 갖추지 못했던, 그저 동물들을 매는 기둥과 구유만 덩그러니 놓인 공용 마구간…. 만약 그날이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면 아기 예수는 밤새 함박눈을 맞아야 했을 것이고, 블루 크리스마스였다면 겨울비에 흠씬 젖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아기 예수가 이러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은 메시아가 극도로 비정한 사회에서 최하층으로 전락한 사람들, 즉 레미제라블(les miserable)의 자리에 찾아오신 사건일 것입니다. 바클레이의 마구간은, 영적으로는 하늘의 왕자가 영광의 예복을 벗고 이 땅의 거지의 옷으로 갈아입었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들레헴이라는 전통 사회 구성원의 덕성이 밑바닥이었다는 오명을 역사에 길이 남기게 됩니다. 바클레이의 마구간 이미지는 19세기 유럽 사회에서 일어났던 아동 노동 착취를 고발하는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성냥팔이 소녀』같이 학대 받고 소외된 가난한 아이들의 애달픈 사연에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40년 동안 중동 지방에 머무르며 신약학자로 활동한 미국의 케네스 베일리는 위와 같은 전통적인 입장을 반박하는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난 마구간은 베들레헴 중앙 광장의 공용 마구간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베일리는 성서고고학과 문화인류학의 수준에서 이를 논증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2:6을 원어로 살펴보면 “거기 있을 그 때에”는 “거기 있는 동안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들어간 바로 그날 마리아가 진통을 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며칠, 길게는 몇 주가 지난 후에 해산했을 것이며, 요셉은 마리아의 해산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몰락했어도 여전히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고, 베들레헴에는 친척들이 있었고 옆 마을에는 마리아의 사촌도 있었습니다. 베일리는 중동 지역이 그때나 지금이나 친족 중심의 대가족 공동체 망으로 되어 있던 것에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마을 광장의 공동 마구간으로 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좌)윌리엄 바클레이(1907~1978), (우)케네스 베일리(1930~2016).

 

베일리는 신약성경의 주 무대가 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옥 구조에서 다른 마구간의 단서를 찾아냈습니다.[1] 당시 평범한 농부들은 대부분 방이 하나 혹은 둘이 있는 소박한 가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집의 맨 왼쪽 낮은 곳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실내 마구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쪽 오른편에 작은 계단이 있어 올라가면 그곳이 방입니다. 여기에 아기 예수의 출생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고 가난했습니다. 자기 집에 소, 나귀, 양을 몇 마리만 갖고 살았습니다. 이 짐승들은 귀한 재산이자 식구였습니다. 잃어버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집 안에 같이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밤이 춥습니다. 난방 시설이 따로 없었습니다. 현관문 입구 쪽에 있던 마구간의 동물들과 벽도 없이 이어진 위쪽 방의 식구들이 함께 체온으로 추위를 덜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집 안에 방이 둘 있는데 낮은 방은 마구간이요 높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사이에 벽은 없었던 것입니다. 경사지게 되어 있어 안방을 물로 청소하면 곧장 마구간으로 흘러내려 갑니다. 구유는 마구간 바닥이 아니라, 높은 쪽 가족 방 끝에다가 방바닥을 정성껏 파서 만들었습니다. 소나 나귀는 가족 방 쪽으로 목을 내밀어 구유에 놓인 여물을 먹었습니다. 키가 작은 양들은 마구간 바닥에 만든 작은 구유에서 먹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셨던 ‘등잔불을 안방에 켜 두면 그 불이 온 집을 환하게 비추었던’(마 5:15) 옛날식 가옥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베일리에 의하면, 들판의 목자들이 마구간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보았다는 누가의 기록이나(눅 2:7, 12), 동방박사들이 어느 집 안에 들어가 아기를 보았다는 마태의 기록(마 2:11)이나, 하나의 같은 마구간에 대한 리포트인 것입니다. 목자들도 박사들도 마을 광장의 공용 마구간을 찾아간 게 아니라, 어느 소박한 농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아기를 뉘었던 구유(파트네)는 그 농가의 단칸방과 실내 마구간이 만나는 부분에, 정확히 말하면 마구간이 아니라 단칸방 구석에, 더 정확히 말하면 안방의 가장 뜨듯한 구들장에 있었습니다. (새 창조의 새 언약은 인간 만 아니라 동식물 피조세계 모두 공유할 축복이니 그 지점에 구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차가운 광장의 길바닥이 아니라 어느 평범한 농가의 안방 따스한 구들장에서 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집의 문간 마구간에서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만삭의 여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대접일 것입니다. 대신에 마리아는 서너 계단을 힘들게 오르며 들어간 안방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당시 전통에 따라 남자들은 방을 비우고 나갔고, 여인들은 산파를 데리고 와서 해산을 도왔을 것입니다. 요셉은 옆집이나 이웃집에서 찾아온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릅니다.

마구간과 구유에 대한 의문은 이렇게 풀리게 되는데, 여전히 여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2:7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판도케이온’ 여관은 여행객을 위한 숙소입니다(눅 10:34). 베들레헴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여관’도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있을 곳이 없었다”(눅 2:7)라고 한 여관은 ‘카탈뤼마’로 불리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옛날 사랑방이나 요즘 게스트룸같이, 일반 가정집 안에 있는 손님방을 말합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촌락 가옥은 대부분 단칸방 가옥이었지만, 약간 여유가 있는 집은 약간 더 높은 위치에 다락방이 하나 더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말 성경에 여관으로 번역된 사랑방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서민의 집이 아니라 넉넉한 중산층 집에서 해산했으면 더 편했겠지만, 인구조사로 판도케이온(여관)은 물론이고 카탈뤼마(사랑방)까지 죄다 만원이었던 것입니다.

 

케네스 베일리의 마구간 이미지. (일러스트: 이영진)

 

여태껏 많은 사람들이 바클레이의 마구간만 알고 지냈습니다. 베들레헴의 마을 광장이 배경이 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거절당한 아기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베일리의 마구간이 배경이 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베들레헴의 어느 소박한 농가에서 따듯한 환대를 받은 아기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인 것은 모두가 그분을 외면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평범한 농부가 자기 집 안방을 마리아에게 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모티프를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서 찾은 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대천사 미하일이 하나님께 벌을 받고 땅에 내려와 알몸으로 어느 교회당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춥고 고독하고 배고팠고 병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있습니다. 지나가던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몬이 그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천사라도 미하일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저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 벌거벗은 대천사 미카엘을 구해주는 장면.

 

베일리의 마구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먼저 상류사회 저택도 아니고, 중산층 높은 아파트도 아니라, 도시 서민의 평범한 주거지를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골 초가집 안방도 얼마든지 해당되겠지요. 그러니 크리스마스 하면 떠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화려한 백화점의 샹들리에가 아니라, 안방 구들장은 따듯하고 부엌에선 미역국이 모락모락 끓고 마구간에서는 소들이 음매 소리를 내는 시골집의 정겨운 풍경이 아닐까요? 평범한 가정의 보통 아이(common child)로 오신 아기 예수의 말구유 탄생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구수한 환대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했지만 자기들 형편에서 정성을 다해 아기 예수를 영접한 베들레헴 서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극한 최고의 선(the supreme good)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통 사람들(common people)의 집에 오신 까닭은, 그 집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평범한 공간(commonplace)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기 예수는 시작부터 모두를 위한 공동의 선(common good)이 되어줍니다. 누구라도 아기 예수를 영접하러 갈 수 있어서 다들 좋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스하게 환대했던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슨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만 주님을 내 삶의 자리에 모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꼭 엄청난 고난을 겪고 기막힌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그저 누구나 언제든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내가 비록 조그만 임대 아파트에 산다고 해도, 오늘 저녁 찬거리가 변변치 않아도, 그런 우리 집에도 주님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찾아올 수 있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스토리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무대를 망쳐버린 바보 덕구 같은 사람들의 방으로 찾아오십니다. 살다 보면 한 편의 연극 같은 자기 인생의 어느 막을 실수로 망쳐버릴 때도 있지요.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속삭입니다. 그런 나의 조그만 단칸방에도 가장 좋으신 예수님을 얼마든지 모실 수 있다고, 그런 나의 소박한 밥상으로도 가장 선하신 예수님을 얼마든지 영접할 수 있다고, 그런 나에게도 조그만 마구간 같은 것만 있으면 언제든지 아기 예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웃을 따스하게 환대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표준새번역)

<참고도서>

케네스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새물결플러스, 2016).

윌리엄 바클레이, 『바클레이 성경 주석』(기독교문사, 2009).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문예출판사, 2015).


[1] 베일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자기가 사는 집과 분리된 별도의 창고와 마구간을 가지고 있었지만(눅 12:18), 아기 예수는 그런 부자의 창고에 딸린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어느 부자가 창고의 마구간을 내주었다면, 산모와 아기를 그런 환경에서 며칠 혹은 몇 주를 지내게 한 것은 베들레헴이 비정한 마을이라고 온 이스라엘에 광고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도 무능한 가장이란 오명을 씻을 수 없고, 마구간 구유에 놓인 아기를 구경만 하고 그대로 돌아간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은 정말 한심한 부류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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