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상을 어찌 보면 가차 없는 법칙과 엄중한 질서를 가지고 일관되게 만드셨습니다. (중략) 이러한 성질과 법칙은 어떤 특정한 창조물의 요구에만 편향되게 치우쳐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동의 은혜로 주어지는 똑같은 조건이 되지 않으면 공동의 좋은 공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C. S. 루이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윤리는, 중립적이고 외부적인 물질로 구성된,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무정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과 시간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고 갈파했습니다.(본문 중)

[따듯한 사회를 위한 공동선③]

함께 춤출 수 있는 무대가 되려면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하나님은 아마도 셋 중 하나일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악을 없애고 싶어도 능력이 없거나, 능력은 있는데 그럴 마음이 없거나, 아니면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거나. 원하는데 능력이 없는 신은 무능한 존재일 것이며, 능력은 있는데 원하지 않는다면 악한 존재일 것이며, 신이 능력도 있고 악을 없앨 마음도 있는 선하면서 전능한 존재라면, 어째서 세상에 악이 존재한단 말인가?[1] 그렇게 일갈했지요. 이는 인류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술에 취한 운전자의 차가 중앙선을 넘어 성가대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아리따운 여대생의 차를 들이받는 걸 막지 않으신 걸까요? 비탄에 젖은 작가 셸던 베노켄(Sheldon Vanauken)은 ‘만일 악당들이나 사기꾼, 혹은 나쁜 사람들만 허리가 부러진다든가 암이나 파킨슨병과 같은 나쁜 병에 걸린다든가 한다면, 그나마 우주 안에 시행되는 천상의 정의를 조금은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2] 아침저녁으로 뉴스를 볼 때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참사가 끊이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봅니다.

 

1977년 출간된 셸던 베노켄(Sheldon Vanauken)의 자서전 『Severe Mercy』. 표지 사진 좌측이 셸던 베노켄이다. (출처: wikipedia)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보기에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처음 한 페이지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 보았을 말씀입니다. 여섯 날 동안 지으신 모든 창조물을 보시며 좋지 않다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몽땅 다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연의 가차 없는 냉혹함과 무정함은 계속되어 왔다는 것을. 그것이 인간의 타락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만 말하기에는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도덕적인 차원의 악과 구분되는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악도 있기 때문이지요. 설사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큰 파도에 휩쓸렸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신학자 밀리오리가 지적한 것처럼, 타락 여부와 상관없이 도전과 투쟁을 하고 고통을 겪는 일은 인간 삶의 근본적 구조에 속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세운 자연 질서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느 정도 한계를 절감하고 때로 상처도 받을 가능성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선함에 내재해 있는 셈입니다.[3] 그래서 태곳적부터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수많은 유익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자연과 접하면서 겪는 수많은 고통에서 면제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이 갖는 중립적인 장으로서의 역할과 물질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 특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어찌 보면 가차 없는 법칙과 엄중한 질서를 가지고 일관되게 만드셨습니다. 그 물질은 변함없는 성질과 일관된 법칙을 따르고 있지요. 이러한 성질과 법칙은 어떤 특정한 창조물의 요구에만 편향되게 치우쳐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동의 은혜로 주어지는 똑같은 조건이 되지 않으면 공동의 좋은 공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C. S. 루이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윤리는, 중립적이고 외부적인 물질로 구성된,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무정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과 시간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고 갈파했습니다.[4] 그의 면도날 같은 분석은 에피쿠로스의 조롱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카운터 펀치 같습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자유란 무엇일까요?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각품이 조각가에게 침을 뱉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라고. 연극배우가 자기 마음대로 대사를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라고.[5] 그러한 자유를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은 그 자유를 기꺼이 베풀었다는 것이지요. 자유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구성하는 법칙과 질서, 물질이라는 외부적이고 중립적인 매개체가 없다면 인간들이 서로 자유롭게 자기 의지를 발현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윤리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살아갈 기본 환경이 마련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도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고, 나 외에 더 많은 것들을 창조하셨고,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6] 모든 피조물은 고독한 존재도 아니고 독재적 존재도 아니라 철저하게 공존하고 상호 의존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7]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셔도 때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하시지만 때로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어떤 특정한 존재가 갈망하는 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변덕스럽게 다루신다면 과연 그런 세상은 공정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마법사 엄마가 일일이 개입해서 바로 잡아주는 집안을 상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큰 애가 작은 애를 빗자루로 때리려 할 때마다 (동생의 바람대로) 엄마는 얼마든지 그걸 부드러운 헝겊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이 다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동생을 괴롭히려는 형의 마음까지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동생이 맞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형이 뉘우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형이 바짝 약이 올라 동생을 더 괴롭히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마의 역할은 집안의 물건들을 가지고 형과 아우가 사이좋게 지내도록 교육하는 것이지 기적과 같은 마법을 끝도 없이 반복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의 공동선은 변덕스러운 마법과 빈번한 기적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식구끼리 서로 존중하며 호의적이고 이타적으로 서로의 짐을 덜어주며 따듯하게 행동할 때 세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을 따르는 자연 질서로 공동의 공간과 시간을 짜 놓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최고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와 우주가 아닌 또 다른 방식의 시공간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속삭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혹시 하나님이 지금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공동선을 이루어가는 우주와 지구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질문에 루이스는 고개를 흔들면서 “아마 지금 이 우주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우주들 중에 가장 좋은 우주가 아니라,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우주일 것”이라고 응수한 바 있습니다.[8]

 

1940년 출간된 C.S.Lewis의 저작 『The Problem of pain』 (출처: wikipedia)

 

무슨 말인가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격들이 서로 동등하게 만나는 공동의 무대가 없다면, ‘공동선’이라는 춤은 아예 시도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물질의 가차 없는 중립성, 이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빠져버린 무대에서는, 악의 가능성을 염려할 필요가 없을지는 몰라도, 그런 무대는 한마디로 말하면 조악한 B급 무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무대를 그렇게 B급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악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너희는 인간 이하가 되고 만물은 만물 이하가 되긴 했으나, 쾌락과 변덕으로 범벅이 된 안전과 안녕(이런 말을 쓰기에도 민망하지만 어쨌든)은 넘치니 심히 좋다’고 경탄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물론,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위험도 전혀 없는 감각적인 쾌락으로 가득한 세상은 될지 몰라도, 대신에 사랑과 기쁨,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그리고 다른 무수한 성령의 열매들을 피워 낼 씨앗들이 애초부터 모조리 말라 죽어버린 정원이라면 무슨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잡초가 있어도 꽃이 피어야 정원이지, 잡초가 없다지만 아예 꽃도 없다면 그건 정원이라 부를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좋으신 하나님의 선한 형상은 고사하고 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빈 공터일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선으로 물들어 있는 우주는 고통이 없는 우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정원으로 지으셨지, 악은 없지만 선도 없는 허무한 빈 공터로 조성하지 않으셨습니다. 혼돈과 공허는 창조의 반대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도 걷다 보면 길에 패인 구멍이나 바닥에 널린 돌멩이로 인해 방해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유진 피터슨의 고백처럼, 우리 안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어떤 사랑이 생겨났다면, 자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마음을 쓰는 사랑이 피어났다면,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자라났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게 되었다면,[9] 평탄하지 않았던 그 역경과 고난의 길이 다름 아닌 최고선으로 가는 길이자 공동선으로 이끄는 좋은 길이었음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1] 김용규, 『신』(IVP), 623-624.

[2] 리 스트로벨, 『특종! 믿음 사건』(두란노), 34.

[3]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조직신학개론』(새물결출판사), 219.

[4]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홍성사), 43-46.

[5] 필립 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좋은씨앗), 73.

[6] 루터, 『The Small Catechism』, 2.2.

[7]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조직신학개론』(새물결출판사), 195.

[8]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홍성사), 51.

[9] 유진 피터슨, 『메시지』(복있는사람), 고린도전서 13장,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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