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은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이단은 화장으로 꾸민다. 꾸미는 솜씨가 대단하지만, 그래 봐야 꾸몄을 뿐이다. 꾸민 것은 얼마 못 가게 마련이다. 아리우스도 사벨리우스도 그러했다. 그들은 경건한 듯 보였지만, 진리를 수호하다 광야로 쫓기던 젊은 아타나시우스의 초라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교세를 자랑했지만, 처음부터 가짜였다. 그들은 끝이 달라서 이단이 아니라, 근본이 달라서 이단이었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장로회신학대학교 겸임교수)

 

무엇이 정통이고 이단일까? 미국 UCLA 대학교 교회사 교수 옥성득은 이단(異端)은 끝이 다른 것이 아니라, 시작이 다른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다. 신학에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은 간결하다. 기본 교리와 삶의 열매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와 예수님의 신성·인성을 진실로 고백하고 그 고백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정통의 기준으로 삼았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에 따른 제자도의 삶이 기독교의 시작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정통이라는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돼 있고, 이단이라는 나쁜 나무는 추한 열매를 맺게 돼 있다. 얼핏 보면 결과가 다른 것 같아도, 근원이 다르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열매로 드러나겠지만, 문제는 봄과 여름이다. 그때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지 판별이 쉽지 않다. 이리가 양의 옷을 지어 입듯이 자신을 위장하기 때문이다.

 

칼뱅의 ‘기독교강요’는 교회사에 등장했던 이단의 양대 산맥,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자신의 신학적 정체를 교묘하게 감추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고 고백하면서 초대교회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교세가 커지고 추종자들이 급증하자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했다. 사벨리우스도 처음에는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시늉을 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자신의 고백을 교묘하게 뒤틀며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칼뱅은 이단의 정체를 “꾸몄다. 고백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라는 말로 분별하고 폭로한다.

 

그러나 정통은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꾸밀 이유도 없고 꾸밀 필요도 없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단은 화장으로 꾸민다. 꾸미는 솜씨가 대단하지만, 그래 봐야 꾸몄을 뿐이다. 꾸민 것은 얼마 못 가게 마련이다. 아리우스도 사벨리우스도 그러했다. 그들은 경건한 듯 보였지만, 진리를 수호하다 광야로 쫓기던 젊은 아타나시우스의 초라함과는 비교되지 않는 교세를 자랑했지만, 처음부터 가짜였다. 그들은 끝이 달라서 이단이 아니라, 근본이 달라서 이단이었다. 시작이 이질적이었다. 아름다운 복음의 나팔소리 행세를 했지만 지옥의 북소리에 불과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을 꾸미는 기술도 정교하고 치밀해진다. 자꾸 무언가를 꾸미려는 공동체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화장을 짙게 하는 교회와 학교, 정당과 단체들을 주의하자. 든든한 바위인 줄 알았는데 그 밑이 죄다 모래사장이다. 하지만 뿌리만 확인하면 될 일을 이단인지 아닌지 감별한다면서, 가지나 잎의 모양으로 섣불리 속단하지는 말자. 어떤 과일도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과만 해도 후지, 양광, 조나골드, 화홍, 아오리, 육오 등 다양한 품종이 있지 않은가. 서로 사과가 아니라고 깎아내려도 되는 걸까. 어떤 품종인지가 중요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고의 색깔과 향기, 과즙과 당도를 지녔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 주님은 효능이 충분한 좋은 열매면 됐지, 그 품종까지 까다롭게 따지진 않으실 듯하다.

 

이단 판별은 사과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지, 후지인가 조나골드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행실은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한다. 썩은 사과가 열린 병든 나무인 셈이다. 정통 교단에 속했다고 자처하기 전에 자신이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온 건 아닌지 성찰하는 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경건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척 가꾸진 않았는지, 의롭지 않으면서 의로운 척 행세하진 않았는지. 꾸민 것은 늦가을이 되면 다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는지, 세상의 배설물을 더 좋아했는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라이너 마리아 릴케)

본 글은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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