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습관을 바꿨다. 지구에 사는 한, 인간 종인 나는 영영 가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면 그 피해를 줄이고 싶었다. 나의 입맛이나 취향이 다른 어떤 생명의 비참함과 고통에 기반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비인간 동물들은 ‘합리적’ 언어로 인간과 소통할 수 없고, 권리의 문제로도 취급받지 못한다. 따라서 약자 중 약자일 수밖에 없는 비인간 생명체에게 마음이 쓰였다.(본문 중)

김다혜(<복음과상황> 기자)

 

“햄이랑 계란, 맛살, 오뎅, 다 빼주세요.”

빼달라는 주문이 주문처럼 입에 익었다. 이름은 ‘야채 김밥’이라도 동물성 재료를 넣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보니 주문을 받는 사람도 번거롭지만, 주문을 하는 쪽도 힘이 빠진다. 어떤 곳에서는 ‘채소만 먹어서 어떻게 힘을 쓰냐’,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 텐데…’ 등의 충고도 따라온다. 주방에서는 내 요청을 잊고 평소대로 내 놓을 때도 있어서, 어떨 때는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음식 하나를 주문하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번거로운 손님이 되어야 하며, 때론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작년 여름,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기독교 월간지 회사에 입사했다. 매달 기사를 기획하는데, 공장식 축산 문제를 짚어보는 ‘돼지를 생각하다’를 다루기로 했다. 주제에 관해 아는 게 없던 나는 책과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내가 먹는 ‘고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 더 깊이 살펴보지 못했다. 신경 써야 할 ‘인간’의 이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공장식 축산 문제가 그저 동물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라는 것이 지극히 인간·소비자 중심적인 관점이라는 것도.

 

대량생산/대량소비를 위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고기를 생산해내기 위한 ‘공장식 축산’ 시스템.

 

식탁에 올라온 돈가스와 치킨을 볼 때, 나는 동물을 떠올리지 않았다. 식용이 된 동물을 떠올려 본 기억조차 없었다. 소나 돼지는 모두 목장에서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소, 돼지, 닭을 비롯한 모든 가축화 된 동물들에게 ‘목초’나 ‘농장’은 없다. 99%의 가축화 된 동물들은 공장식 설비인 스톨이나 케이지 안에서 다닥다닥 붙은 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단기간에 살을 찌우도록 성장 촉진제가 섞인 사료를 먹는다. 밀집된 사육 환경에서는 전염병이 돌기 쉬워 항생제도 잔뜩 투여 당한다. 그래서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기구(IARC)는 가공육을 담배, 석면과 같은 발암물질 1군으로 분류하고, 붉은색 고기를 그 2A군으로 분류했다. 그럼에도 육류 소비를 장려하는 자본에 의해 육식은 일상의 문화가 되었고, 우리는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선 반드시 육식을 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혔다.[1]

그즈음 다큐멘터리 <도미니언>(2018)을 봤다. 몰래 설치한 카메라로 호주의 공장식 축산 농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동물들이 ‘처분’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동물이 병들거나 장애를 가졌으면 간단하게 밟아 죽였다. 한 마리를 돌보거나 적절한 안락사 과정을 밟기엔 비용이 들기에 분쇄기에 돌리거나 밟아 죽이거나, 목을 비틀어버렸다. 수컷은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갈려지거나 도축 당한다. 정액을 주입 당하는 암컷은 죽을 때까지 임신과 출산, 수유, 착유를 반복하며 새끼마저 빼앗긴다. 교차하지 않는 페미니즘을 비판해왔으면서도, 나의 페미니즘도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이었음을 절감했고, 때문에 아팠다. 또한 비인간 생명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 세계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역량이 있을지 낙관할 수 없었다. 실제로 축산 농가 가까이에 살거나 도축업을 하는 사람은 비교적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인데, 그 결과로 그들이 입은 신체적·정신적 피해 또한 막심하다. 지난 2010년 구제역 사태 때는 살처분 작업에 투입되었다가 트라우마를 경험한 한 축협 직원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이후 업무상 재해로 인정을 받았던 사례도 있다.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의 썸네일 이미지.

 

더 놀라웠던 것은, 다름 아닌 육식이 환경 파괴의 ‘가장 큰 주범’이라는 사실이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조사 보고서 『축산업의 긴 그림자』(Livestock’s long Shadow, 2006)에 의하면, 축산업에서 비롯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체의 18%로 전 세계 모든 교통수단의 배출량을 합한 것보다 많다. 가축이 뿜어내는 분뇨 등이 기후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천연자원보호협회(NRDC)도 동물성 식품(소고기, 양고기, 버터, 치즈,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10가지 기후파괴 식품’으로 선정했다. 지난해 큰 이슈가 되었던 8월 아마존 산불도 축산 시설과 축산업에 필요한 곡물 재배를 위한 불법 방화 및 무분별한 훼손이 원인으로 꼽혔다. 이런 현실은 도회시한 채 한국의 정치인들은 ‘돼지 탈’을 쓴 채 안심하고 돼지를 먹으라는 홍보에 나섰고, 대중매체의 ‘먹방’ 프로그램은 날로 흥행하고 있다.

나는 식습관을 바꿨다. 지구에 사는 한, 인간 종인 나는 영영 가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면 그 피해를 줄이고 싶었다. 나의 입맛이나 취향이 다른 어떤 생명의 비참함과 고통에 기반한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비인간 동물들은 ‘합리적’ 언어로 인간과 소통할 수 없고, 권리의 문제로도 취급받지 못한다. 따라서 약자 중 약자일 수밖에 없는 비인간 생명체에게 마음이 쓰였다.

 

ⓒUnsplash.

 

물론 나의 이러한 다짐과 결심은 실패할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일상의 선택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아니라, 실패를 하더라도 내가 정한 한계 안에 머물기 위해 계속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식습관과 소비 습관에 한계를 정하면 내가 소비하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게 왔고 또 어떤 문제를 낳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고, 자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개신교 사상가 자끄 엘륄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할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기를 택하는 일, 곧 ‘비능력’이라고 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을 피하지 않고, 높아지는 일이 아닌 낮아지는 길을 택한 비능력의 사건이었다. 오늘날 인간의 무절제함과 한없이 높아진 교만이 비인간 동물과 이 땅의 모든 생명체에 폭력을 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다시 오실 주님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실까? 이런 현실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가 정의가 세워지고 폭력이 사라진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까?


[1] 육식을 피하면서도 단백질 섭취 및 영양 관리를 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편집자 주). 삼성서울병원 임상영양팀, “채식의 세계: 운동하는 채식주의자가 알아야 할 것”, http://bitly.kr/mwjroPIh (2020. 02. 13.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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