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함께’라는 com과 ‘선물’이라는 munus가 모인 말입니다. 공동체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는 모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서로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공동 선물을 받아 서로 공유하는 유기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은 그의 소유 일부를 떼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몸으로 참여하는 가시적 공동체가 필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본문 중)
송용원(은혜와선물교회 목사)
한국교회는 어디서 났을까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공동의 것”이라는 루터의 말이 요즘처럼 실감되는 시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전 세계인이 글로벌 바이러스 코로나19 사태로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르노빌 시대에 못지않게 ‘죽음의 현실성’을 공동으로 재발견하는 중입니다. 이른바 100세 시대에 살면서 죽음을 그저 남의 일이나 먼 훗날의 일로만 여기던 우리에게 죽음이 얼마든지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공포와 함께 다가옵니다. 시인 T. S. 엘리엇이 1차 대전 후에 지은 시, 『텅 빈 사람들』의 마지막 구절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한다. 굉음을 내면서가 아니라 흐느끼며”(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a whimper). 그런 가운데 한국교회는 주일 예배에 모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세계화로 모든 지역과 분야가 온통 연동되어 있는 지구촌이 예상치 못하던 ‘포스트 코로나 시대’ 속으로 진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인해 허물어지던 콘택트(contact, 대면접촉) 시대가 마침내 급격히 저물고, 지구 온난화와 원시림 파괴로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찾아올 각종 바이러스에 대비하고 적응하며 형성될 언택트(untact, 비대면) 시대가 ‘새로운 표준’(New Normal)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이에 따라서 ‘흩어지는 교회’가 더욱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이 쏟아지니 기독교계는 기존의 ‘모이는 교회’가 급속히 쇠락하면 어떡하나 하여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시작을 기억해 보면 관점이 다소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존재 자체를 뒤흔들 만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자신의 처음 시절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아마도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이나 처음 모였던 공간을 본능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전염병이 만연했던 장안 길거리 한복판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쓴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을 보면, 구한말 한양 도성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초기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병원을 설치하여 수많은 감염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고치다가 순직하였고, 그 지극한 헌신에 정부 각료들조차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침내 전염병이 지나가자,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서양 귀신이라 조롱하며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던 “나라 안의 빈부귀천 모든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외국인이 우리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국교회에 계층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전염병 전이 아니라 그 후였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본격적으로 모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전염병과 함께 흩어져 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모인다는 것
누가 뭐래도 모여야 교회입니다. 신약성서는 교회란 에클레시아, 즉, 가시적 모임 혹은 회중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고양이’라는 단어가 모든 골목 담벼락에 빼곡히 씌어 있다 해도, 정작 어느 곳에도 톰이든 네로든 단비든 실제 고양이가 단 한 마리도 없다면, 고양이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교회’란 말이 있어도 실제로 눈에 보이게 모인 교회들이 없다면 교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만 내 이름으로 모여도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혼자 있어서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신체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일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늘 원수들 가운데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따라 세상 속에서 원수들 한가운데서 사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수 있는 영적 호사를 미리 맛보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감옥에 갇힌 자들,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 가난한 노인들, 집이 없는 노숙인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억압된 지역에 사는 이들, 전쟁으로 난민이 된 이들, 휴일도 없이 일터에 묶인 이들, 멀리 오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반면,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편안하게 드리는 그리스도인이나, 여행과 레저를 즐기느라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인했듯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이 되어 준다는 것
본래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함께’라는 com과 ‘선물’이라는 munus가 모인 말입니다. 공동체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는 모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서로 선물이 되어주는 모임일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공동 선물을 받아 서로 공유하는 유기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선물은 그의 소유 일부를 떼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그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는 선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몸으로 참여하는 가시적 공동체가 필연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는 선물이 되고자 친히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친히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친히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빵과 떡도 친히 떼어 주셨습니다.
선물을 건네주신 분이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오셔서 악수를 청하신다면, 선물을 받는 자도 마땅히 가상공간이 아니라 내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현장에 직접 와야 하지 않겠나요! 그래서 성육신의 교회는 언택트 모임이 될 수 없고, 컨택트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컨택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커넥트(connect)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는 나와 너가 물리적으로 만날 때 그 사이에 서 계십니다.1) 사랑하는 관계라면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수십 차례 통화하거나 문자를 나누는 것과 단 한번이라도 직접 만나는 것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까요?
우리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영국의 변증가 C. S. 루이스는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고 성자는 우리 옆에 계시다면 성령은 우리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실재가 이러하기에 어떤 이가 “우리 한국교회는 앞으로는 주로 가상공간에서 만나도 충분한 것 아닌가요? 아니면 기왕에 이렇게 된 것 그냥 가나안 교인으로 지내도 괜찮은 것 아닌가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에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실 이유가 있었을까요? 굳이 그대가 오늘도 가족이 있는 집으로 퇴근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 굳이 그 먼 나라까지 비싼 돈 들여가며 여행 갈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 가상공간으로 충분할 텐데요.” TV 화면만으로는 알프스의 싱그러운 꽃들을 보아도 그 향기는 맡을 수 없고, 시베리아의 휘청거리는 자작나무들을 보아도 정작 그 바람을 맞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모이느냐, 흩어지느냐’가 아니라 ‘갈망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갈망하고 사랑해야만 몸소 찾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했고 조선의 백성을 사랑했기에 전염병이 창궐한 사대문 안으로 직접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형제들끼리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고자 반드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다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현존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로서 우리는 서로를 인간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먼저 신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를 형제자매로 만납니다. 하지만 본회퍼가 솔직하게 고백했듯이, 서로가 없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길도 요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혼자 막연히 사색하는 것보다, 내 앞에 있는 형제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말로 고백하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 식으로 말하자면, 가시적 공동체로 모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따로 계십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발생하는 영적 실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적 반영입니다. 형제1 앞에 있는 형제2 안에 성부께서 현존하시고, 형제1 옆에 있는 형제3 안에 성자께서 현존하시며, 형제1 뒤에 있는 형제4 안에는 성령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온전한 하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말씀과 공동 기도, 공동 찬송과 공동 성찬, 공동 고백과 공동 섬김을 통해 이 땅에 그대로 비추어집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신적인 거울이 되는 사건을 가리켜 성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언택트 도성이 갈망과 무정, 소외와 불안, 단절과 배제로 치달을수록,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삼위일체적인 감사와 온유, 우애와 평안, 연대와 포용이 가득한 하나님의 컨택트 도성으로 드러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껴안는 날이 오면
구약성서의 전도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합니다. 그러니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미물에게도 정해진 기한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옛적에 끝없이 몰아치려 하던 원시 바다를 향해 ‘너는 여기까지만 오거라. 더는 오지 말고 여기서 멈추라’라고 꾸짖으시며 금을 그으시니 바다가 꼼짝 없이 가두어졌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 바이러스를 가두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울 때이지만, 곧 웃을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죽는 때이지만, 곧 치료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것을 잃을 때이지만 머지않아 다시 찾을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 안는 일을 멀리할 때이지만 머지않아 다시 안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 글로벌 신종 바이러스는 마치 전도서에 등장했던 바람처럼, 아니 중세 유럽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떠나버렸던 흑사병처럼,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겠지만, 결국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전 1:6).
신학자 틸리히의 말처럼,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우리가 바라지 않음에도 우리를 붙들고 있는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함께하는 날’만 은혜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날’도 선물로 건네십니다. 고독이 없이는 제기할 수 없는 진리와 자유와 창조의 문제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홀로 지내신 주님께도 고독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독이 영원한 현존이 되시는 하나님 손에 붙들리는 시간이 된다면,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사회에서 외로운 군중으로 사는데 만족하지 않으며, 물리적 고립과 단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다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홀로 있던 날이 적지 않았고, 함께했던 날이 그립기만 합니다.2) 얼마나 더 이러한 기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그분의 삼위일체적 사랑에 참여하고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공동체로 탈바꿈할 기회로서 이렇게 홀로 있어야 하는 날들을 일부러 두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 한국교회는 소비주의, 개인주의, 기복주의, 번영 신앙에 물들어 꽃길만 걷고 싶어 하던 교회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코로나19 이후에 한국교회는 약함, 착함, 주변성을 선택하며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는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심판의 고통이 아니라 재생의 진통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모인다 해도 예전처럼 너와 내가 만나는 ‘정신적 공동체’가 된다면 차라리 모이지 않고 흩어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코로나19 방학을 마치고 다시 등교하는 한국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교세’는 혹시 꺾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누룩으로서 갖는 ‘권세’는 빛날 것입니다.
코로나19는 (하나님과 교회와의 올바른 관계인) 영적 공동선의 철이 무뎌지지 않도록 (교회와 세상과의 올바른 관계인) 사회적 공동선의 철과 맞부딪히는 사건입니다.3) 톨스토이의 단편 『두 노인』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난 잘 사는 예핌과 평범한 예리세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리세이는 도중에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한 농가 식구를 돌보느라 성지 순례를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반면 손해라고는 일절 모르는 예핌은 자기 길만 잘 챙기며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핌이 그리스도의 무덤을 보러 갔을 때 그는 군중에 떠밀려 맨 뒤 줄에 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기 맨 앞줄에 예리세이가 빛나는 모습으로 손을 들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하지만 나중에 예핌이 고향에 돌아와서 예리세이가 예루살렘에 가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자기 친구는 영혼으로 그곳에 가있었는데 정작 자신은 몸만 다녀왔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예리세이를 닮은 초기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영적 사랑으로 태어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더 이상 눈으로 사랑을 그리는 예배나, 입술로 사랑을 말하는 교제를 멈추어야 합니다. 지난날 우리가 정겹게 부르던 노래처럼, ‘가난함도 부요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참 사랑의 교제, ‘나의 가장 귀한 것, 그것을 주는’ 만남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한 책들
디트리히 본회퍼. 정지련, 손규태 옮김. 『신도들의 공동생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C. S. 루이스. 이종태, 장경철 옮김. 『순전한 기독교』. 서울: 홍성사. 2001.
Paul Tillich. The Eternal Now. SCM Press. 1963.
다니엘 밀리오리. 신옥수, 백충현 옮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
T. S. 엘리엇. 『텅 빈 사람들』(The Hollow Men). 1925.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톨스토이 단편선』. 서울: 인디북. 2003.
1) 본회퍼 목사는 교회란 너와 내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너와 나 사이에서 직접적인 정신적 사랑을 꽃피우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사랑이 맺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2)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있는 날’과 ‘함께 있는 날’ 사이에서 ‘주의 날’을 맞이할 소망을 가지고 사는 새 언약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신학자 밀리오리는 오늘날처럼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시대, 고삐 풀린 소비주의의 강력한 원심력이 진리, 개인, 공동체를 파편화하는 시대의 적절한 교회 모델은 ‘교제의 교회’(ecclesiology of communion)라고 말한다.
3)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 27:17).
* 이 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감염증 사태에 대응하는 신학/목회/교육 성찰 시리즈 『재난과 교회』에 실린 것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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