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의 공범자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제대로 상상할 능력이 없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범죄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뒤늦게 공포를 느끼며 목숨마저 스스로 끊으려 하는 것은 그동안 사이버 세상에서 몽롱하게 살다가 갑자기 현실이 자기 앞에 구체적인 위협으로 들이닥치기 때문이다.(본문 중)
손화철(한동대학교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 기술철학)
1996년 벨기에는 마르크 뒤트루(Marc Dutroux)라는 사람이 저지른 범죄로 떠들썩했다. 6명의 아이들을 납치해 가두고 성적으로 학대하여 그중 네 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는데, 이후로도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수사 당국에 대한 불만이 오랫동안 벨기에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벨기에로 막 유학을 떠났던 필자는, 아동 성 착취 문제에 놀라기도 했지만 유럽에서 그 역사가 매우 길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의 부유층 중에는 동남아에서 아이들을 들여와 사냥터에 벌거벗긴 채 풀어 놓고 사냥을 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인간의 변태적 욕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기간 현실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듣기만 해도 마음이 어려워지는 이야기들이 날마다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소위 ‘n번 방 사건’은 그 사건 자체뿐 아니라, 그 사건을 접하는 우리의 미묘한 관음증을 드러내기에 더욱 불편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동들의 학대 장면을 보기 위해 비용을 지불했다는 것에 혀를 차는 독자들도 관련 기사들에 묘사된 자극적인 내용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기사를 클릭하는 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가짜뉴스 보도도 서슴지 않는 우리나라의 저열한 언론이 총선 관련 기사보다 10배나 많은 n번 방 기사를 올리고 있다는 사실(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2020년 3월 31일 자 방송)이 그 은밀한 방증이다. 이 사건은 충격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최근 시작된 일이 아니고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일이다.
문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악한 생각이 마음껏 현실화 될 수 있는 공간이 기술을 통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류가 많은 유익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권력과 힘이 있는 소수에게만 허용(?)되고 제약이 많았던 악행이, 이제 광범위하고도 손쉽게 행해질 수 있는 장이 열렸다. 모두가 접근 가능한 인터넷, 가학적인 사진과 동영상을 직접 찍어 올릴 수 있는 휴대 전화, 그렇게 디지털 상태로 만들어져 무한 복제가 가능한 정보, 개인의 신상을 밝히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SNS와 가상 화폐 등 이번 n번 방 사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첨단 기술이 있다. 사실 이번 사건이 더 극악했을 뿐, 정보소통기술(ICT)은 그 상용화 초기부터 성적 착취와 방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고, 심지어 그런 산업들이 기술 발전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첨단 정보소통기술은 단순히 과거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정보에 접근하기 쉽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듣는 대상과 시간적 공간적으로 괴리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 둔감하게 만든다. 전쟁과 공포를 직접 경험한다면 끔찍하겠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 하더라도 화면을 통해 보게 되면 나의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 갈리는 현장이, 나에게는 그냥 생생한 볼거리가 되고 만다. 미국의 뉴스 방송인 CNN이 이라크 전쟁의 생생한 보도를 통해 주요 방송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나, n번 방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드나들게 된 것이나, 또 그 피해자들에 대한 악플을 올리면서 2차 가해를 하는 것이나 그 구조는 동일하다.
기술이 사람을 둔감하게 만들었고 사람은 본래 악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n번 방 사건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괴롭힐 수 있는지, 그리고 스스로의 잔인함에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서운 경고다. 과거에도 잔인한 일을 하는 자들은 스스로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누리는 기술은 그 관대함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 위험에 우리 모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사악해지지 않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흔히 기술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개발하기 위한 창의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개발된 기술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창의력보다 공감과 상상의 능력이 더 필요하다. 이때의 상상력이란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도 현실처럼 인식하고 공감하여 실제를 더 실감 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내가 보는 동영상 속의 장면 안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실체와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게 도달했는지 애써 상상하려 노력해야 한다. 익명으로 내게 다가와 유혹하는 자들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쓰는 악성 댓글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충격이 될지를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현실과 가상을 마구 섞어 현실을 왜곡하는 변태적인 자기기만과 다르다. 성적 욕구를 채울 때는 가상을 현실이라 생각하고, 남을 괴롭힐 때는 현실을 가상으로 받아들이는 편리한 습관은 정상적인 상상력일 수 없다.
n번 방 사건의 공범자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제대로 상상할 능력이 없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범죄에 연루된 것이 드러나자 뒤늦게 공포를 느끼며 목숨마저 스스로 끊으려 하는 것은 그동안 사이버 세상에서 몽롱하게 살다가 갑자기 현실이 자기 앞에 구체적인 위협으로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이들이 디지털 세상에 태어난 젊은 세대와 아이들이다. 이들은 아날로그 시절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로 이민을 온 기성세대와 달리, 디지털 환경에서 물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이다. 문제는 기성세대가 이들에게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새로운 환경에 필요한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키워 주기 힘들다는 점이다. 자기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최소화된 반면 영상으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현실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해 주는 상상력과 공감력을 길러줄 것인가. 이번 n번 방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놀랄 정도로 어리다는 사실은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고 위급한지를 잘 보여 준다.
이번 사건의 연루자들을 엄벌하고 피해자들을 최대한 구제하며 범죄의 매개가 된 기술적 연결고리들을 잘 관리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몇몇 악한들의 극악한 범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땅을 딛고 서 있으며 고통을 느끼는 몸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고 급격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필요한 감수성과 윤리적 기준을 모색하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 피 흘리며 고통당하신 때를 온라인 예배로 기억해야 하는 오늘, 더욱 절박하게 느껴지는 어려운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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