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삶의 일상을 완전히 앗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에 갇혔고, 학교와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기업은 멈춰 버렸고, 정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바이러스 전파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삶의 방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 바꿔 말하면 삶에서 우리가 행동으로 구현해내던 내러티브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근간을 흔들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불안함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팀 켈러는 이것이 바로 고난이 인간에게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본문 중)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⑨: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읽기

내러티브를 알아야 삶이 보인다

 

김상일(보스턴대학교, 실천신학 박사과정)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발한 이후 벌써 5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중국과 한국에서는 바이러스로 인한 피해가 소강상태를 보이는 반면, 미국을 비롯한 북미와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피해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확진자 수가 760,000명, 사망자는 40,000명을 넘겼습니다.1) 뉴욕 주에 바이러스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후인 지난 3월 19일, 팀 켈러는 “기독교에 묻다”(Questioning Christianity)라는 강의 시리즈의 첫 번째 주제였던 “우리는 교회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Can We Live Without the Church?)를 뒤로 미루고, “고난과 불확실성 가운데서의 평화”(Peace in Times of Suffering and Uncertainty)라는 좀 더 시의적절한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했습니다.2)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시리즈의 마지막 글인 이번 글에서는, 팀 켈러의 3월 19일의 강연 내용과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를 ‘내러티브’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삶에서 내러티브가 가지는 중요성을 간략히 짚어본 다음, 켈러가 현재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이 가져온 고통과 불확실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복음의 적실성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그의 강연과 책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Walking with God through Pain and Suffering』(좌)와 두란노에서 번역출간한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우).

 

복음을 믿는 삶에서 내러티브가 가지는 의미

앞의 글들에서는 내러티브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켈러가 내러티브라는 개념을 그의 모든 저작에서 드러내 놓고 강조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러티브 개념은 켈러의 사상의 바탕에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내러티브 구조는 우리 삶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의 세계관이나 사회적 상상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어떻게 내러티브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내러티브가 어떻게 세계관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켈러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오락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내러티브는 사고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요소인지라 삶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좌우한다. ‘벨탄샤우웅’(Weltanschauung)에서 파생된 세계관(worldview)이란 말은 현실을 해석하는 토대가 되는 포괄적인 시각을 뜻한다. 하지만 몇 가지 철학적으로 중요한 항목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a)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b)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c)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이렇게 커다란 질문들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대답하려면 세상을 설명하는 스토리, 곧 모든 사물에 관한 내러티브, 한마디로 세계관을 채택해야 한다. (『일과 영성』, 195-196)

하지만, 앞의 글들에서도 계속해서 강조했듯이,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세계관이나 내러티브가 우리가 실제 몸으로 살아 내는 세계관이나 내러티브는 아닐 수 있습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가슴으로 알고 있는 것 사이에는 항상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켈러는 영향력 있는 철학자인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를 인용하면서 다음 내용을 덧붙입니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의 행동이란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주는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살아 내고 있다. 환경을 지키자는 등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이야기든지, 불리한 사회적 신분과 기대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려는 갈망과 씨름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는 한 가정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끌어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들의 편견에 저항해서 저만의 성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한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커다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일과 영성』, 196-197)

여기서 사람의 행동이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그 내러티브 안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가서 온몸으로 살아 낸다는 점이, 켈러에게 내러티브가 복음을 믿고 살아 내는 삶에서 중요한 이유를 잘 보여 줍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에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습득하게 된 가치관이 우리의 몸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단, 우리의 몸에 스며든 가치관은 우리가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가치관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우리가 몸으로 구현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수준에서 전해져야만, 실제로 우리가 몸으로 살아 내고 있는 가치관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켈러의 주장입니다.

아울러, 만약 켈러의 주장이 맞다면, 우리의 구원은 틀림없이 몸의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즉, 우리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가 우리의 몸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몸을 입고 오셔서 몸으로 고난당하시고 돌아가셨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몸으로 행하신 일들이 그가 어떤 분이셨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셨는지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3) 이렇게 보면 왜 켈러가,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간절히 바라고 욕망하는 것들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하며(감정이나 욕망이 우리 몸의 일부인 이상, 그것도 우리가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에 속할 수밖에 없으므로), 또한, 복음이 그런 우리 존재의 면면을 건드리고 재정향(reorient)하지 않고는 우리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가 잘 설명됩니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계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즉 우리가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처함에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내러티브를 구현하는 몸, 그리고 고난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삶의 일상을 완전히 앗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집안에 갇혔고, 학교와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기업은 멈춰 섰습니다. 정부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바이러스 전파를 막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가 삶의 방식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 바꿔 말하면 삶에서 우리가 행동으로 구현해 내던 내러티브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근간을 흔들고, 우리로 하여금 온갖 불안함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팀 켈러는 이것이 바로 고난이 인간에게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사랑과 기쁨, 안전처럼 인간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들을 앗아가 버린다.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평정심, 더 나아가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63)

그러므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가 어려움을 겪는 이 시점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과연 어떤 내러티브를 우리의 몸으로 구현하면서 살아왔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상황 속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고 동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런 감정적 동요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해 주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내러티브를 몸으로 구현하면서 살아왔습니까? 당신은 지금의 이 사태를 이겨 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당신의 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내러티브가 있습니까?

이런 내러티브는 당연히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개인의 내러티브 또한 공동체적이고 집단적인 이야기 나눔과 별개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고난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내러티브 또한 한 개인의 것이 아닌,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화의 산물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화는, 그 자체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어 고통과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살아내고 견뎌야 할지를 문화의 구성원들에게 은연중에 주입한다는 뜻입니다. 켈러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였던 앤드류 델방코(Andrew Delbanco)의 책,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The Real American Dream: A Meditation on Hope)을 인용하면서 문화 내러티브가 이런 면에서 두 가지 목적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설명합니다.

모든 문화는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다시 말해 경험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앤드류 델방코는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이란 책에서 우리 문화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두 가지 목표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소망을 주어야 한다. “‘인간이란 불합리한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일 뿐이다’라는 의식 이면에 도사린 희미한 의혹을 차단하고, 저마다 받아 가진 눈곱만한 날수와 시간을 뛰어넘는 삶의 결말을 상상하게 하는” 경우에만, 그리고 “우리가 얻고 소모하는 모든 것이 죽을 날을 기다리며 벌이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숨은 의심을” 이겨 내는 경우에만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둘째로, 그 내러티브는 사회를 콩가루처럼 잘게 부숴 놓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응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자아와 자아가 맞닿은 경계선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필수적인 감각을 두루 전달해서 스스로의 이해를 떠나 공동체를 위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야 한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23-124)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문화는 우리에게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내러티브를 제공할까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현대 문화의 지배적 내러티브는 어떤 소망을 주고, 어떤 응집력을 제공할까요? 켈러는 저명한 신학자인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의 경험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은 사역 초기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교회에 나오는 산모 하나가 막 아기를 낳았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을 찾아갔다. 병실로 올라가 보니, 여인은 “아기에게 문제가 좀 있다”는 불길한 통보를 받고 주치의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곧이어 나타난 의사는 부부에게 아기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상대적으로 가볍고 치료가 가능한 호흡기 질환도 있음을 알린 뒤에 말했다. “따로 손을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는 쪽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럼 아마 며칠 안으로 문제가 다 해결될 겁니다.” 현재 상태 그대로 방치하면 아기는 “자연스럽게” 숨이 끊어질 것이 뻔했다. 부부는 어리둥절해 하며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부부를 바라보며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채 성장하게 되면 가정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기게 마련이라면서 다운증후군 자녀를 둔 부부 가운데 상당수가 별거하거나 이혼한다는 연구 결과까지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다른 두 자녀에게 이런 어려움을 떠안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내러티브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가 없이 ‘부정적’이다. … 인간의 욕망을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아 삶을 평가하는 까닭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27-128)

정확히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아니 현대의 지배적인 문화적 내러티브에서 고통이나 고난이 차지하는 어떤 역할이나 의미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고난은 현대인들 대다수가 살아 내는 내러티브 바깥에 존재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 특별히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한 내러티브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는 행복을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는 것이지요. 델방코가 위에서 제시한 내러티브가 답해야 할 두 가지 질문에 비추어 보면, 만약 행복이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라면, 고난이나 고통이 닥쳤을 때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가 제공할 수 있는 소망은 사라집니다. 애초에 고난이나 고통은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가 그리는 그림 안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는 그 부부가 행복해지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고, 의사의 제안은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에 비추어 보면 매우 합리적인 것이 됩니다.

아울러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는 행복 중에서도 각자 개인의 행복을 최대치로 추구하라고 말하기 때문에, 고통이나 고난 앞에서 어떤 응집력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부부의 두 아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동생은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낫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수많은 현대인들이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켈러는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가 가진 이런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찾는 것이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목표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어떤 조건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판단해서 열심히 일한다. 행복을 얻기 위해 산다는 말은 곧 삶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난이 닥쳐오면 행복의 조건들이 모두 사라진다. 시련은 삶을 지속할 이유를 모조리 짓밟아 버린다. 하지만 “의미를 위해 산다”라는 것은 인생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삶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개인적인 자유와 행복보다 더 중요한,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할 때에만 우리는 의미를 갖게 된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16)

그러므로 만약 행복이 고난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삶의 내러티브가 기초한 토대는 너무나 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고난을 피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삶을 살면서 고난이나 고통을 경험합니다. 고난이나 고통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남자든 여자든, 권력자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빈부와 권력 유무, 인종이나 성별, 나이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들 중 몇몇이 다행히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해 간다고 해도, 누군가는 또 다른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파산하거나, 관계의 파멸을 경험하거나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는 애초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인생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함과 동시에, 행복을 고통이 부재한 상태라고 생각하게 하고, 이미 주어진 고통과 고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고통과 고난에 제대로 맞서게 해주는 삶의 내러티브가 필요합니다. 그런 내러티브를 살아 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코로나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고통과 고난의 순간을 잘 견뎌 낼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사실 이 말은 결국 우리의 삶이 고통이나 고난이 흔들 수 없는 것, 앗아갈 수 없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만, 고통과 고난에 용감히 맞서 싸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에 인생의 의미를 둘 때에만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 이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난이 파괴할 수 없는 본질’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63)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질문은, 과연 복음이라는 내러티브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과 고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월 19일 강연에서 켈러는 복음 내러티브가 말하는 세 가지, 곧, 1)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2) 죽음 이후의 소망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3) 부활은 어떤 것인가가 복음을 살아 내려는(즉, 복음을 몸으로 구현하는 내러티브로 삼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소망과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제공해 준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로, 복음 내러티브가 말하는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셨던 하나님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에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고난받는 신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우십니다. 울부짖으십니다. … 여러분들 중에 혹시 자녀를 잃으신 분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아들을 잃으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배신당하거나 버림받거나 불의한 일에 희생된 경험을 하신 분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모든 일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의를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을 경험했을 때,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듯이, 울부짖어도 되는 근거가 되십니다.4)

그러므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일을 겪으셨던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나 불의한 일을 경험할 때, 하나님 또한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신 분이심을 기억하며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분의 올바른 치리가 있을 것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복음을 몸으로 살아 내려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다스리는 세계’라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켈러는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합니다. 불교는 죽음 이후에 모든 개인의 인격성이 사라지고(사실 불교에서는 인격성 또한 환상이라고 가르칩니다) 모두 다 ‘하나’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우리의 본질적 갈망, 즉, 죽음 이후에도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18세기 일본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코바야시 잇사(Kobayashi Issa, 1763-1828)의 하이쿠5)를 인용합니다.

露の世は

露の世ながら

さりながら

 

이슬의 세상은 (the world of dew)

이슬의 세상이지만 (the world of dew it is indeed)

그렇지만6) (and yet, and yet)

고바야시는 부모님과 자녀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을 겪은 후에 이 시를 읊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고바야시의 안타까운 마음이 이 시에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는 모든 인격성이 사라지고 ‘하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움은 특히 마지막 구절 ‘그렇지만’에서 강하게 느껴집니다. 켈러에 의하면, 이런 불교의 내러티브와 달리 복음의 내러티브는, 각 사람의 인격성이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는 사랑이 지배하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의 함의는,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이번 생에서 잃어버린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두 회복시키시는 날,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이 복음 내러티브 안에 있습니다. 켈러는 부활이란 단지 우리에게 현재의 고난이나 고통에 대한 위로만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의 전적인 회복을 약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우리가 상상하고 꿈꾸는 것을 훨씬 넘어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복음 내러티브가 이런 약속들을 담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복음이 말하는 바를 정말 우리의 몸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구현해 내고자 한다면, 켈러는 우리가 1) 믿는 가운데 울부짖을 수 있으며(weep but trust), 2) 생각하는 가운데 기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pray but think), 3) 우리가 애착하는 것들의 순서를 재조정(reorder your loves and hope) 할 수 있게 되며, 마지막으로 4) 소망할(hope)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믿는 가운데 울부짖는다는 것은, 욥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도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하는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욥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항의하고 자신이 겪는 불공정한 일들에 대해 논리를 펴며 다투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애착하는 것들의 순서를 재조정한다는 것은, 고난과 고통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던 내러티브를 흔들어 놓기 때문에, 이 기회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대신에 애착하며 살고 있었던 것들을 떼어 놓고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하는 삶, 즉 복음의 내러티브를 구현하는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 즉, 사랑, 온전한 관계, 행복 등을 하나님 안에서 결국 얻게 되리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바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우리 삶의 근간을 재점검할 기회를 얻습니다. 복음 안에서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진 우리가 이 복음의 내러티브를 살아내고 세상과 교회 양쪽을 향해 이 소망을 선포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러티브를 알아야 삶이 보입니다. 복음의 내러티브가 우리 모두의 삶을 비춰 주기를 바라면서 [팀 켈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 4/20 기준 확진자 764,265명, 전일 대비 24,114명 증가. 사망자 40,565명, 전일 대비 1,497명 증가. https://coronaboard.kr/

2) https://www.youtube.com/watch?v=-a3j26a05H0&t=765s

3)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필자가 다루어 온 켈러의 주요 논의들은 모두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독자들도 이처럼 내러티브라는 관점에서 켈러의 저서와 강연들을 음미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이 어떤 내러티브인지를 고민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4) 필자의 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a3j26a05H0&t=765s

5) 일본 정형시의 한 형식, 5, 7, 5의 운율로 이루어진다.

6) 한글 번역을 다음에서 인용: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23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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