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남과 북의 교회가 정치권의 움직임에 따라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9월 9일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반도의 38선은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친미-반소의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친소-반미/반제의 공산주의-사회주의’ 냉전의 제1경계선이 되었다. 해방 후의 이와 같은 지리적 분단은 정치적 분단이며 동시에 교회의 분단을 의미했다.(본문 중)

최상도(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미완의 해방: 한반도, 냉전 체제의 제1경계선이 되다

70년 전,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어쩌면 예견된 전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부터 1948년 남과 북이 각각 정부를 형성하기 전까지의 3년간의 해방 공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1945년 9월 8일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이 미군정 사령관으로 38선 이남으로, 1945년 8월 26일 치스차코프(Ivan Mikhailovich Chistyakov) 소련 극동군 연해주군관구 25군 사령관이 38선 이북에 각각 진주하여 한반도 남쪽의 미군정, 북쪽의 소련군정 체제를 시작했다. 패전국 일본의 권력이, 해방을 맞은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조만식 중심의 한인들이 아니라 미군정과 소련군정에게 각각 이양된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남쪽은 ‘반소-반공 친미’ 체제, 북쪽은 ‘반미-반제 친소’ 체제를 세우려는 군정의 정치에 따라 분할통치되었다. 이동준과 장박진은 이를 “미완의 해방”으로 명명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여 일어난 신탁통치 반대운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한반도 내부의 상황은, 군정 체제하에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갈등이 존재하는 정치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남에서는 김구(金九, 1876-1949)로 대표되는 우익 민족주의와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중심으로 한 중도 민족주의의 좌우 합작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정과 기독교계의 지지를 얻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북에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이나 토착 공산주의자 박헌영(朴憲永, 1900-1955) 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정의 지지를 얻은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민족주의 좌익은 갈등을 통합으로 풀기보다는 외세와 결탁하여 일부 지역에서라도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결국 이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외세에 의한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켰다.

이런 해방 공간에서 남북한의 교회 지도자들 역시 활발하게 정치에 참여했다. 특히 북쪽에서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조만식 장로를 중심으로 한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필두로, 김응순 목사의 황해도 건국준비위원회, 이윤필 목사를 위원장으로 한 평북 자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 9월에는 윤하영, 이유필, 한경직 목사 중심의 기독교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고, 11월 3일에는 조만식, 이윤영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의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당시 조선노동당원은 약 4,350명인데 반해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은 당원이 약 50만 명이었다. 그해 같은 달에 기독교자유당도 결성되었다. 이처럼 북쪽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해방 후 건국에 적극적인 정당 정치로 참여했다.

한편, 김일성은 1945년 9월 원산을 통해 입국한 후, 10월 14일에 최초로 평양 군중집회를 통해 대중들 앞에 등장했다.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김일성은 12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빠르게 정치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이듬해 1946년 2월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후에는 곧바로 공산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 3월 토지 개혁을 단행하고, 8월에는 산업을 국유화했다. 북측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지주, 5정보 이상 몰수 토지 중에서 교회, 사찰, 종교 단체의 토지는 전체 몰수 면적의 1%정도인 14,400정보로 미미했지만, 이 과정에서 북쪽의 중농 이상의 목사, 장로, 집사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김일성 권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북쪽의 교회 지도자들은 소련 군정하의 김일성 공산주의 권력이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갈등과 배제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갈등을 심화한 사건은 1946년 11월 3일, 이북 5도 연합 노회의 주일 선거 거부였다. 이후에 김일성은 친정부적 교회 조직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외척 강양욱 목사를 중심으로 11월 28일 ‘북조선기독교도련맹’을 조직하게 했다. 조선기독교도연맹(같은 단체의 다른 이름)은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건국 사업에 적극 참여할 수 있게” 기독교인에게 ‘애국주의 교양’을 실시하는 등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적극 지원했다. 이에 반대한 북쪽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월남하여 경험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남쪽에서는 주요한 정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국가’(Christendom) 건설을 꿈꾸었다. 1945년 11월, 기독교조선남부대회 주최의 임시정부 환영 대회에 참석한 김구, 김규식, 이승만은 모두 기독교 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김구는 “성서 위에”, 김규식은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이승만은 “만세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했다. 한편, 1945년 해방 공간의 미군정 하지 장군을 둘러싼 통역과 정치 고문은 모두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으며, 특히 고문인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는 ‘진보적 인사=소련의 앞잡이’로 보는 반소, 반공의 냉전적 인식을 모든 군정 요원들에게 설파하며 우익 보수주의자들의 존재가 당시 한반도 남쪽의 가장 고무적 요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군정의 이러한 정책에 따라 한반도 남쪽은 점차 ‘친미-반공’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아갔다. 여기에 월남한 반공주의 기독교인들은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반공’을 모토로 정치 세력화한 이승만을 전폭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으며, 이후 반공-반소주의의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든든한 보루가 되었다.

 

1946년, 창덕궁에서 악수하는 이승만과 김구.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달랐다. ⓒ한국역사연구회.

 

결국 어떤 형태로든지 해방 후 남과 북의 교회가 정치권의 움직임에 따라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9월 9일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이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한반도의 38선은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친미-반소의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친소-반미/반제의 공산주의-사회주의’ 냉전의 제1경계선이 되었다. 해방 후의 이와 같은 지리적 분단은 정치적 분단이며 동시에 교회의 분단을 의미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이러한 ‘냉전’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승전 강대국들이 만들어 낸 세계 체제 갈등의 결과이며, 동시에 이 외세의 지원을 힘입어 정치 주도권을 장악했던 한반도 내의 정치 세력 간의 분열과 갈등의 결과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대립 상황’에서 진행된 전쟁이다. 이 이데올로기의 극한적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서 분단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방 후 분단 상황에서의 남북한 교회 모두 한국전쟁의 피해자인 동시에 전쟁을 지원한 동조자였다. 1517년 에라스무스의 말을 빌자면 ‘십자가가 전쟁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한국전쟁과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찢긴 십자가②(다음 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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