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자 할 때 여론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좁은 땅에서, 차도 별로 없는 대한민국에서, 굳이 이렇게 돈을 들여 큰일을 벌여야 하느냐는 의견이었습니다. 길을 만들어 놓으면 이 고속도로에 차가 몇 대나 다니겠냐는 말도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 우리나라에 KTX를 들여올 때도 비슷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4시간이면 부산을 가는데 고속철도를 만들어 굳이 2시간여 만에 가려고 이렇게 거대한 일을 벌여야 하느냐는 의견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엉뚱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말입니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7월 7일이면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지 50년이 됩니다. 1970년 7월 7일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를 가로지르는 총 길이 428km의,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거리 고속도로가 생긴 것입니다. 이후 같은 해 12월에 호남고속도로가 대전에서 전주까지,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영동고속도로가 신갈에서 새말까지 개통됩니다. 국토의 상하좌우가 뚫리게 된 중대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공사는 우리나라 개발 시대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합작품이었습니다. 현대건설이 이 놀라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아직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현대건설은 단군 이래 가장 큰 토목공사라고 말하던 이 일을 2년 5개월 만에 이뤄냅니다.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해낸 이들이 있었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결국 당시 우리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공사를 하는 동안 숨을 거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려 77명이 건설 과정에서 순직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당시로서는 이 공사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에는 이들을 기리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이 있습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을 성대하게 치른 다음 날, 7월 8일에 이 탑의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아직 큰 역사를 이룬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이 위령탑의 제막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이 제막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정부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이들 순직자들을 향해 순교자와 같은 존경을 표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조국이 당신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라는 의미 부여였을 것입니다. 또, 이를 통해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국가적 성취의 상징으로 자리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경부고속도로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2년 전, 라오스에 갔을 때입니다. 수도 비엔티안에서 선교지가 있는 문이라는 곳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너무 험했습니다. 대부분 흙길이었고, 중간중간 포장도로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곳곳에 아스팔트가 함몰된 구덩이가 있어서, 한국 같으면 두 시간이면 넉넉히 갈 거리를 4-5시간이나 이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라오스의 중심 고속도로였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경부고속도로였던 것입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전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어떻게 그런 고속도로를 지을 수 있었을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 라오스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한국의 50년 전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라오스에는 아직도 제대로 된 고속도로가 없는데, 그때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그런 큰 공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요?
1964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합니다. 독일의 차관을 얻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 전 해인 1963년부터 우리나라에서 광부와 간호사가 일손 부족한 독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때 대통령이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만난 감동적인 스토리도 전해집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독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낀 것 같습니다. 특히 독일의 고속도로인 아우토반을 달리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도로를 우리나라에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그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66년에 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수립 후, 67년에는 경인고속도로 착공, 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했고, 68년에 경인고속도로 개통, 70년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자 할 때 여론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좁은 땅에서, 차도 별로 없는 대한민국에서, 굳이 이렇게 돈을 들여 큰일을 벌여야 하느냐는 의견이었습니다. 길을 만들어 놓으면 이 고속도로에 차가 몇 대나 다니겠냐는 말도 있었습니다. 에피소드입니다만, 기공식 날에는 불도저 앞에 드러누운 야당 인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 우리나라에 KTX를 들여올 때도 비슷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4시간이면 부산을 가는데 고속철도를 만들어 굳이 2시간여 만에 가려고 이렇게 거대한 일을 벌여야 하느냐는 의견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엉뚱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상상력은 결국 이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자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정신은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들이 있고, 급속한 경제 성장의 부작용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지도자들이 이루어낸 성취의 과실을 달게 먹고 있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허허벌판에 길을 내고, 산을 뚫어 고속도로를 낸 이들의 추진력은 놀랍습니다. 이런 추진력은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들의 이런 상상력이 결국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50주년을 앞두고 괜스레 마음이 울렁대서 소회를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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