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년대 한국교회는 30대 장로와 목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1920년대의 위기를 이기고 1930년대에 교회를 부흥시켰고 1940년대 신사참배에 항거했다. 현재 총대는 평균 62세이다. 예수님이 오셔도 총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총회 총대에 30대 0%, 40대 1.4%에 불과하다. 루터가 <95개 조>를 쓸 때 나이 34세요, 칼뱅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쓸 때가 29세였다. 그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개신교나 장로교회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 30-40대 총대가 없는 것은 불법적인 나이 차별이다. 이런 비민주적, 반시대적 노인 정치로는 청년들을 교회로 오게 할 수 없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와 교회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세계화-도시-회사-성장-소비·오락-사교의 교회 패러다임이 대위기에 처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미래를 점치는 주술사를 따라가는 수동성 대신, 미래는 우리가 만들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예언자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말잔치에서 끝나지 말고, 교단별로 조용히 구체적이고 과감한 조직 혁신에 들어갈 때,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는 가능할 것이다.1)

 

1. 연약한 지체에 대한 지원책 마련

향후 최우선 정책 과제는 미자립 교회 지원과 그 교회 목회자에 대한 최저 월급 보장이다. 이번에 이탈리아에서 코로나19로 중환자 병동이 모자랄 때, 가망 없는 노인은 버리고 청년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 비인도적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후세대를 위해서 양보하는 노인들의 결단도 있었다. 이를 효율성 우선주의로 비판만 하기에는 노인들의 희생이 숭고했다.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 희생할 층은 청년 목회자들이 아니라 50-65세 장년층 목사들이요,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이다. 지난 4개월간 가장 고통을 느끼고 생존 위기에 몰린 집단은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과 연금이 부족한 은퇴 목사들이었다. 사회에는 보험 제도와 개선된 실업 수당이 있다. 그러나 많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비과세대상이고 4대 보험도, 실업 수당도 없다. 노회와 총회가 다른 사업을 중단하더라도 미자립 교회 목회자의 최저임금 수준 봉급과 4대 보험을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 방향이 정해지면 방법론은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중대형 교회도 해외 선교비를 줄여서라도 국내 미자립 교회 생존과 자립에 투자할 때이다. 1년 주보비만 아껴도 한 교회를 살릴 수 있다.

 

2. 초대형 교회의 규모 제한

지난 40년간, 한국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교회가 10,000명이 넘는 초대형 교회가 생겨났다. 초대형 교회는 성경적 근거도 약하고, 현실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다. 도시화, 경제성장과 더불어 한국에서 재벌 기업과 초대형 교회가 등장했다. 3,000명 이상의 대형 교회 교인이 전체 교인의 80%를 차지하고, 100명 이하의 소형 교회가 교회의 80%를 차지하는 20:80의 양극화 시대이다. 교단이 교회 간의 무한 경쟁을 허용하면서, 초대형 교회가 타락하고 세습을 실행하는 불법의 시대가 되었다. 브랜드 파워를 가진 교회가 프랜차이즈 상권과 중독된 소비자 그룹을 포기하는 것은 힘들다. 브랜드의 힘으로 굴러가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기득권 그룹은 창업주를 가문의 조상신 모시듯이 하고, 그 네임 밸류를 유지시킬 후손에게 세습한다. 그들에게 구원은 브랜드의 존속이다.

90년대까지 초대형 교회가 영웅이었으나, 이제는 악한이 되었다. 새 시대는 새 교회 모델을 요청한다. 20세기 후반 모델인 정치권력과 자본이 풍부한 거대 기업형 교회가 아니라, 중소 교회로서 사회적 자본과 신용도가 풍부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한 교회의 규모를, 1차 헌법 개정에서 등록 교인 5,000명, 2차 개정에서 3,000명으로 시차를 두고 제한하고, 분리한 자교회도 프랜차이즈처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만들지 않고 각자 독립하도록 과격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 브랜드 파워를 가진 명품을 소비하는 물성이 아니라, 공동체 파워를 가진 고유 영성을 명품화하는 교회를 키워야 한다.

비대면 사회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위험하고, 대형 교회나 대형 집회도 안전하지 않다. 뉴노멀 사회에서 이상적인 교회 규모는 100-500명이지만, 일부 교회는 3,000명까지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형 교회들이 교권을 쥐고 있으므로 헌법 개정이 쉽지 않겠지만, 이미 교회 쇠락기이고 규모 확장은 불가능하다. 모이지 않는 교회를 보면서, 공멸 위기의식을 가지고 교회 규모 혁신안을 상상하고 실현해야 한다.

 

3. 노회와 총회의 총대 비율 개선

현재 포스트 코로나 교회를 논의하는 포럼, 세미나, 간담회의 주체는 대개 50-60대 남성 교수와 목사, 총회 임원들이다. 양적으로도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교회의 미래인 20-40대, 여성, 평신도의 참여는 거의 없다. 그 한 원인은, 장로교회만 보면, 당회에서 여성이 소외되어 있고 노회나 총회의 여성 총대가 소수이기 때문이다. 2019년 예장합동 교단 총회는 여성 총대 0%, 예장통합 교단은 2.1%로 오십보백보였다. 여성 장로와 목사와 총대 수를 획기적으로 늘려서 5년 안에 당회, 노회, 총회에서 여성과 30-40대가 30%를 차지하도록 하지 않으면, 한국 장로교회에 희망이 없다. 주일성수와 헌금 의무만 강조하고 참정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1910-20년대 한국교회는 30대 장로와 목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1920년대의 위기를 이기고 1930년대에 교회를 부흥시켰고 1940년대 신사참배에 항거했다. 현재 총대는 평균 62세이다. 예수님이 오셔도 총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총회 총대에 30대 0%, 40대 1.4%에 불과하다. 루터가 <95개 조>를 쓸 때 나이 34세요, 칼뱅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쓸 때가 29세였다. 그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개신교나 장로교회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헌법상 목사는 30세 이상, 장로는 합동 35세, 통합 40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다. 악법이다. 모두 30세로 바꾸어야 하고, 총대도 30대 비율을 올해부터 매년 5%씩 늘려야 한다. 30-40대 총대가 없는 것은 불법적인 나이 차별이다. 이런 비민주적, 반시대적 노인 정치로는 청년들을 교회로 오게 할 수 없다.

 

2018년 5월 8~10일에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목사장로기도회. 이같은 교회 중직자의 모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년,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출처: CBS노컷뉴스 Youtube 갈무리)

 

4. 교회 안의 거룩한 적은 무리 세우기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인 “오직 믿음”(구원론, 하나님의 은혜), “오직 성서”(교회론, 교회의 권위와 일치의 기초인 성경), “만인사제설”(목회론, 모든 신자의 책임성)을 기초로 하여 세워졌고, 개혁교회는 이 원리가 타락할 때 다시 개혁하여 이 원리를 회복한다. 만인사제설은 모든 신도가 중보 기도의 책임과 복음 전파의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루터의 전통을 따르는 독일 경건주의 교회론의 기여였다. 신도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중보는 목사만의 책임이나 직능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기도와 성도 간의 기도가 중보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만인사제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핵심은 ‘모든 신자’에 있으며, 이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모든 교인의 공동체적 상호 책임을 부각시킨다. 모두가 사제라는 말이 “내가 나의 사제”라는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각 신자는 몸의 다른 지체를 섬기며(코이노니아), 머리 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세상을 섬길 때 모든 세상을 섬기는(디아코니아) 목회자가 된다. 칼뱅은 만인사제직을 그리스도의 삼중직(제사장, 왕, 예언자)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신도의 시민으로서의 공적 책임을 강조했다.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그 백성은 세상을 향해 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봉사하며, 예언자로서 세상과 교회를 견제하며 비판하는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만인사제설은 교회론적으로는 선교적 교회로, 정치적으로는 현대 민주주의로 연결된다.

기도하고 연구하는 경건한 소수 평신도 무리가 한국교회의 사제주의를 깨야 한다. 경건한 이들이 가부장적 사제주의인 세습 관행을 깨야 한다. 950명의 사제들이 모여 발을 구르며 “루터여, 칼뱅이여”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을 것이다. 산 위에서 12돌로 제단을 쌓고 도랑을 파고 그곳에 가지고 온 모든 식수를 가득 세 번이나 붓고, 엘리야와 함께 기도하는 헌신 된 평신도 그룹을 만들어야 한다. 장로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이 교회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헌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방향과 목회 방향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글을 맺으며

어릴 때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노래하며 모래집을 짓고 놀았다. 손을 살그머니 뺄 때 모래가 무너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두드렸다. 무너져도 다시 지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이제 코로나 때문에 살며시 손을 빼는 교인들이 노래한다. “코로나야, 코로나야, 헌 교회 줄게, 새 교회 다오.” 새 교회-집을 바란다. 빠져나간 교인으로 모래 예배당이 무너지는 곳도 있다. 친구들을 부르고 다시 교회를 세울 때이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손가락만 넣지 말고 손목을 걷어붙이고 손 전체를 넣을 때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협력해야 ‘교회-집’은 지어진다. 바짝 마른 모래로는 무너진다. 성령의 물로 적시고 온라인 망을 엮어 새로 지을 때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교회는, 공간적으로 교회 중심이 아닌 세상 중심, 예배당 예배 중심의 영성이 아닌 일상 삶 중심의 영성으로, 세대와 성은 노인 남성 중심에서 청년과 여성 중심으로, 목회는 목사 목회에서 만인 목회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진행되던 한국교회의 몰락이 코로나 사태로 가속화되고 있다. 교회 조직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1. 연약한 지체인 미자립 교회를 자립하도록 지원하고, 그 목회자들의 최저 생계를 교단이 책임져야 한다.
  2. 대형 교회는 목사와 소수의 운영위원회가 경영하며 만인사제설이 실천되기 어렵기 때문에, 개 교회 규모를 최대 3,000명으로 제한해야 한다. 그래야 노회나 총회가 징계해도 교단에서 탈퇴하지 못하고, 교회 질서를 유지하고 세습을 막을 수 있다.
  3. 앞에서 강조하지 않았지만, 교회법을 어긴 목회자와 장로를 당회, 노회, 총회 등이 치리해야 한다. 헌법에 따른 치리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4. 노회와 총회 총대에서 청년층과 여성의 비율을 5년 안에 30% 이상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네 가지가 당분간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만인사제설에 따라 모든 성도가 목회 책임을 지고 중보 기도하고, 성서와 신학을 공부하고, 모여서 대안을 토론하고, 나서서 부르짖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 파산과 부도의 고통은 모든 성도의 몫이 된다.


1) 이 글은 필자 개인의 생각이지 기윤실을 대표하는 의견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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