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슬픈 것은 노회 내 부자 교회들의 태도이다. 자기 교회 교인들의 화장실은 최고급으로 바꿀지언정 장마철 지붕이 새는 이웃 교회당이나, 끼니를 거르는 이웃 목회자에 신경 쓰는 법이 없다. 그러고는 자신들만의 바벨탑 쌓기에 바쁘다. 선교사도 단독으로 보내야 하고, 복지관도 혼자 운영해야 하고, 학교도 우리 교회 단독으로 운영해야 한다. 모두가 노회의 일이지만 우리 교회, 내 이름을 내야 하니 이웃 교회랑 협조는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역자 간의 평등’(parity between ministers)이라는 장로회 교회의 중요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본문 중)
김중락(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말씀동산교회 장로)
노회원의 평등은 경제적 평등을 포함한다.
한국 장로회 교회의 반장로회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노회 내 회원 목사들 간의 사례 불평등이다. 같은 노회 내에서도 노회원들의 수입은 천지 차이이다. 대형 교회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의 목회자 수입은 상상 이상이다. 높은 월 사례금은 물론이고 보너스, 자녀 교육비, 그리고 퇴직 적립금, 사택 관리비, 각종 휴가비 등도 있다. 그리고 고급 사택과 고급 자가용도 제공된다. 감추어진 소득도 적지 않다. 영수증 요구도 없는 도서비와 목회 활동비도 있다.
반면, 같은 노회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열악한 재정 때문에 굶주리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목회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나 자녀 교육은 고사하고 끼니조차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책 한 권 마음 편히 구입하기도 어렵다. 가난 때문에 부업으로 내몰리는 목회자도 적지 않다. 많은 목회자들이 차상위자로, 더러는 기초 생활 수급자로 살아가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교회가 구제를 베푸는 곳이었는데 이제 교회가 구걸하는 모습이 되고야 말았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비참하다.
더욱 슬픈 것은 노회 내 부자 교회들의 태도이다. 자기 교회 교인들의 화장실은 최고급으로 바꿀지언정 장마철 지붕이 새는 이웃 교회당이나, 끼니를 거르는 이웃 목회자에 신경 쓰는 법이 없다. 그러고는 자신들만의 바벨탑 쌓기에 바쁘다. 선교사도 단독으로 보내야 하고, 복지관도 혼자 운영해야 하고, 학교도 우리 교회 단독으로 운영해야 한다. 모두가 노회의 일이지만 우리 교회, 내 이름을 내야 하니 이웃 교회랑 협조는 애당초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역자 간의 평등’(parity between ministers)이라는 장로회 교회의 중요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사역자 간의 평등은 단지 감독(주교)의 지위를 부정하기 위한 원리만은 아니다. 노회에서 모든 회원은 평등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지닌다는 정치적 평등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 평등까지도 의미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실상은 오늘날 노회 회원 간에는 종교개혁 이전의 주교제 하에서보다 더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 노회에서 상회비를 많이 내는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들이 큰소리 내는 상황이 만들어진 지 오래다.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정치적 평등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회는 회원 간의 경제적 평등을 위한 조직이다.
장로회 제도의 초기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치리서』를 만든 스코틀랜드 개혁 교회는 교구 교회 간의 경제적 평등에 대해 상당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교구(parish)를 나눌 때 경제적 빈부를 고려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의 교구가 목회자 한 명을 부양하고,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정도가 되도록 한 것이다. 『제2치리서』는 교회 재정의 4중 분배를 규정하고 있다. “첫째는 목사 또는 감독의 생계와 손님 접대를 위해, 둘째는 장로들과 집사들과 모든 성직자들을 위해, 셋째는 가난한 자, 병자들, 낯선 자들을 위해, 넷째는 교회의 유지와 다른 특별한 일들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제2치리서』 12장은 교구 구성에 있어서 교구 간 경제적 평등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보통의 교구는 한 개의 마을이었으나, 부유한 도시의 경우 2개 이상의 교구로 나누고, 가난한 마을의 경우는 두세 개 혹은 그 이상이 연합하도록 하였다. 모두 교구 교회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목회자를 부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의도한 것이다.
성경도 그리스도인들 간의 경제적 균등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믿음의 형제들 간에 서로 돕고,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성도들 간의 “균등”(고후 8:13)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사랑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선생인 목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세상을 향해 사랑을 논할 수 있을까?
장로회 교회란 지독한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교회 제도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회는 교회의 단위이고, 노회 내 모든 구성원들은 한 가족이다. 노회가 소속 교구 교회들의 경제적 평등을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그리고 엄격히 말하면 교구 교회의 목회자는 노회로부터 파견을 받은 자이다. 가난한 교회의 목회자는 험지로 파견을 받은 자이다. 요컨대, 노회는 파견된 목회자의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노회는 회원이 파견된 교구 교회가 자립할 때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대형 교회 목회자가 더 고생하니 더 많은 사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대형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들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그 수하에 엄청난 인력을 부리고 있다. 어느 정도 규모만 되어도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들이 포진하고 있어 담임 목사를 돕고 있다. 말 한마디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될 것이다. 반면 소형 교회 목회자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쳐야 하는 상황이다. 관리도, 운전도, 식사 당번도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 내야 한다. 누가 더 수고로운 사역을 하는가? 모든 교회 사역자들은 나름의 일이 있고, 열심을 다해야 하니 이러한 접근 방식 자체가 불편하다. 모두가 같은 수고를 하니 같은 사례, 평등한 사례를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교회라면 차등을 둔다 해도 능력이나 성과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하는 것이 더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노회는 이 문제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가끔은 노회가 가난한 미자립 교회를 돕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부자 교회들이 더 많은 상회비를 낸다지만 이는 노회의 운영비 충당에도 부족한 편이다. 많은 노회와 노회원들이 노회 내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또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빈부는 개인의 능력 차이에 달렸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바리새인처럼 “우리 교회는 자립할 수 있어서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대부분의 노회는 이 부분에 대한 개선 의지 자체가 없다. 노회가 진정으로 한 교회이고 한 형제라면 더 이상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이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없다면 ‘장로회’란 간판을 떼야 한다. 우리가 장로회 교회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노회 내 경제적 불평등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해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노회가 소속 교회들을 수입이 평등한 교구 교회로 재조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형 교회가 분립되거나 소형 교회로 분산되는 일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적용 가능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해본다. 이 중 하나라도 실행하는 노회가 생겨나면 좋겠다.
[1안]『제2치리서』의 4중 분배로부터 통찰력을 얻어 보자. 『제2치리서』는 목회자 부양을 4중 분배의 하나로 보고 있다. 즉 교회는 수입의 25% 정도를 목회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응용해 보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노회 내 모든 교회가 총 재정수입의 25%를 노회로 보내고, 노회는 이를 소속 노회원들에게 균등히 분배한다면 되지 않겠는가? 너무 혁명적인가? 복음이란 혁명이고, 종교개혁도 혁명이었음을 잊지 말자. 부자 교회 목회자들의 저항이 심할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부터 시행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장로회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안] 과도기적인 방안이다. 같은 노회 내 모든 목회자들이 자기 사례의 25% (비율이 높을수록 더 바람직하다)를 노회에 내고, 노회는 이것을 역순으로 나누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1,000만 원을 받는 이는 250만 원을, 500만 원을 받는 이는 125만 원을, 100만 원을 받는 이는 25만 원을 노회에 내고, 노회는 이를 몇 단계로 나누어 재분배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100만 원을 받는 목회자의 경우 325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25%가 너무 큰 부담이면 노회 형편에 따라 10%까지 비율을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쉬운 방안이 아니다.
[3안] 목회자들의 현재 사례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방안이다. 목회자들이 십일조를 자신의 교회가 아니라 노회에 내는 방법이다. 노회는 이를 거두어 목회자들의 사례에 따라 차별 있게 나누되 노회의 평균에 못 미치는 이들에게 나누어야 할 것이다. 교구 교회에 약간의 부담이 되겠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접근법이다. 노회가 교회의 단위라는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교우들도 이 정도는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이것 외에도 노회의 사정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중요한 것은 노회가 잠잠하지 않고 노력하는 일이다. 물론, 목회자 사례 균등을 행하는 일에는 다양한 문제도 나타날 것이다. 노회원 중에는 소명이 없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일부는 무임승차를 하려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소에 따른 차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다른 방도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사례의 균등을 거부하는 논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노회 내 목회자 사례 균등의 문제는 우리가 ‘장로회 교회’인가의 문제이고, 우리가 제자인가의 문제이다. 꼭 이루어 내야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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