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타자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체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한 사람의 회복이 공동체의 희망이 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사회적 존재, 관계적 존재이다. 이것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침투, 상호내주)로 관계하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닮은 것이요, 세속 사회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본문 중)

김승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박사)1)

송용원 | 『하나님의 공동선』

성서유니온 | 2020. 07. 27. 출간 | 272쪽 | 14,000원

 

 

 

글이 참 깊고도 부드럽다. 문장과 문단이 꼭 저자를 닮아 있다.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갈 때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그러나 깊숙이 들어와 설명하고 설득한다. 저자의 학문성은 이미 『칼뱅과 공동선』(IVP, 2017)에서 증명되었다. 칼뱅의 사상에 흐르는 공동선 개념을 ‘하나님의 형상’, ‘성화’, ‘율법’ 주제에서 포착하여 넓게 펼쳐 보였다. 그것이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공동선 개념으로 어떻게 접목되는지 촘촘하게 엮어 갔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칼뱅을 오해하였는지도 모른다. 칼뱅의 사상을 튤립(TULIP: 칼뱅주의 5대 강령)을 중심으로 설명하다 보니 ‘전적 타락’과 ‘절대 주권’ 개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인간의 죄성을 너무나 강조하다 보니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의도는 감추어지게 되었다. 인간을 단순히 죄인으로만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로서 해석하지 못했다. 죄로 물든 인간성과 피조세계는 구속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되었고 특별은총을 넘어선 일반은총의 영역들은 조명되지 못했다. 당연히 공동선(Common Good) 개념은 소멸하였다.

 

공공성을 넘어서는 공동선

한국교회에 최근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사회적 영향력이 감소되고, 출석 교인이 줄어들고, 목회자들의 윤리 의식의 변화를 요청받으면서 새로운 신학과 신앙을 위한 토론이 진행 중이다. 공공성을 향한 신학은 교회 내부만을 향하며 사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의 추구를 멈추고 교회 밖을 보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이런 새로운 변화를 위한 신학에서 칼뱅의 사상을 공동선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한쪽 면으로만 바라보았던 칼뱅을 온전히 통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송용원 박사의 전작 『칼뱅과 공동선』 서평2)을 통해 한국교회가 칼뱅을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송 박사의 시도가 교회의 공공성을 향한 신학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책은 공공성 개념 또한 넘어선다. 교회의 단순한 공적 참여나 공익 활동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바로 공동선, 즉, 전체와 개인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방식과 연결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내재된 공동의 선은 세상을 창조하고 신적 경륜으로 주관하는 공동 활동을 통해 일관되게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삼위 하나님은 존재와 속성이 일치합니다. 또한 삼위 간의 내재적 공동선은 이 땅에서 역사하는 경륜적 공동선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35쪽)

공동선은 오늘날 신학과 신앙이 맞이한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폭넓은 관점과 상상력을 제시한다. 저자의 표현대로, “다초점 안경”처럼 여러 가지 상황에 맞는 다양한 관점을 포괄적으로 또 포용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사회가 말하는 공공성, 공익 개념도 포함하지만,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넘어서는 공생과 공존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동시에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의 깊음을 경험하게 한다.

 

코로나19와 칼뱅의 공동선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타자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체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되고, 한 사람의 회복이 공동체의 희망이 되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사회적 존재, 관계적 존재이다. 이것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침투, 상호내주)로 관계하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닮은 것이요, 세속 사회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서로의 삶 안에 서로가 섞여 있다는 자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요청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선 가치와 삶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십자가 사건으로써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이들을 위한 아가페적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신 예수는 하나님의 공동선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늘과 땅의 통합이요 만물을 재구성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이다.

최고의 공동선 주형틀이 되는 그리스도를 찍어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형성 과정처럼 유기적으로 찍어내는 것입니다. … 이러한 일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본에 일치하는 삶을 살 때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225쪽)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또한, 인간의 노력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전제로 한다. 저자에게 ‘은혜’와 ‘선물’ 개념은 칼뱅을 이해하는 중요한 두 축인 동시에, 하나님의 공동선을 실천하게 하는 원천이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그것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또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선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인 공동선은 이 세계를 작동하게 하는 원리이자 그분의 자녀인 인간이 당연히 따라야 하는 삶의 법칙이다. 은혜와 선물은 모든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한다. 그곳은 다가오는 나라인 동시에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공동선의 나라이다. 자기를 내어주는 ‘케노시스’(비움)의 영성으로 타자와 함께하는 좋음을 추구하는, 그럼으로써 모두의 좋음이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를 꿈꾸게 한다.

『하나님의 공동선』이 코로나19의 상황에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안경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의 성장을 통해 기독교의 영광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야망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교회와 사회를 분리했던 과거의 행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경계와 차이를 넘어서는 모두를 향한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새롭게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함께 손을 붙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서로의 다름과 같음을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바로 ‘하나님의 공동선’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새로운 실천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복음의 진수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공동선을 발견하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라. 저자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어올 것이다.


1)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박사 학위 논문은 “후기세속사회에서의 도시신학에 관한 연구”이다. 공공신학, 급진 정통주의, 도시 신학, 공동체주의 등을 연구하고 있다.

2) 김승환, “우리가 칼뱅을 오해했다.” 문화선교원구원, 2017. 12. https://www.cricum.org/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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