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마스크의 답답함을 호소하며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하지만, 마스크 없이 맨얼굴로 지내던 그때가 정말 좋은 날들이긴 했을까요? 코로나가 물러나고 마스크만 벗으면, 우리가 다시 춤추는 날이 오기라도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은 우리가 인류 최초의 마스크 세대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 이후로 자기 얼굴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본문 중)

송용원(『하나님의 공동선』 저자)

 

바야흐로 마스크 시대입니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생들은, 오래전 부모 세대가 가슴에 달았던 하얀 손수건 대신,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얀 마스크로 가린 채 생애 첫 등교를 해야 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교실에서도 선생님과 친구들과도 내내 거리 두기를 하며 봄날을 고스란히 보내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학교를 둘러보거나 친구들과 정답게 노는 활동은 고사하고, 단짝과 마주 보며 키득거리는 경험마저 건너뛴 채 말입니다. 사회학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학창 시절을 보내야 하는 이들을 ‘M(mask)세대’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시민의 덕목인 시대를 사는 인류 최초의 마스크 세대인 셈입니다. 다들 마스크의 답답함을 호소하며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소연하지만, 마스크 없이 맨얼굴로 지내던 그때가 정말 좋은 날들이긴 했을까요? 코로나가 물러나고 마스크만 벗으면, 우리가 다시 춤추는 날이 오기라도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은 우리가 인류 최초의 마스크 세대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 이후로 자기 얼굴에 보이지 않는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가면과 진면

스위스의 정신 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사람은 실제 인간(la personne)과 등장인물(le personnage)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의 자아와 우리가 맡는 역할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지요. 본래 이 둘은 하나님의 형상과 신적 소명이 조화를 이루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으나, 에덴의 타락 이후 심각한 손상을 받습니다. 그 후로 사람은 누구나 왜곡된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두꺼운 갑옷 속에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참된 자아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할 나의 얼굴이 욕망을 위해 장만한 가면(persona) 노릇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공동 은혜로 모든 인간에게는 여전히 어떤 얼굴이 있습니다.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처럼, 인간의 얼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닙니다. 얼굴은 존재를 나타내고, 사람 자신을 보여줍니다. 에덴의 타락 후에도 여전히 타자의 얼굴은 그저 밖에서 오는 것을 넘어, 저 위에서 오는 어떤 것입니다. 인간의 얼굴에는 낮음만 있지 않고 높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얼굴이 그분을 비추는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얼굴에 당신의 모습을 새기시면서, “우리 모습”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교부 포타미우스는 사람 얼굴의 특성은 성부와 성자가 어떻게 인간 원형 안에 있었는지를 알려준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에게나 사람의 얼굴은 등장인물만 아니라 실제 인간도 보이는, 또 인간만 아니라 하나님도 느껴지는 하나의 거룩한 장소로 다가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호소하는 약자의 얼굴은 요청하는 얼굴이 되고, 어느새 하나님의 얼굴이 되고, 마침내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주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은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의 실패를 얼굴의 언어로 풀어내곤 합니다.

 

ⓒPikist.

 

등장인물과 실제 인간 사이에서

코로나19 시대 이전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면을 쓴 등장인물로서의 만남을 더 많이 가졌던가요, 아니면, 실제 인간의 진면으로의 만남을 더 많이 가졌던가요? 혹시, 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 성가대원,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원 등의 이런저런 봉사의 역할이 사회적인 관습처럼 굳어져 허영심을 담는 가면이 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혹시 주중의 행위와 생각을 직분이라는 두꺼운 갑옷으로 둘러싸고 영혼의 속내는 감추고 행하지는 않았는지요? 심지어 교회 안의 각종 모임이 가면무도회 같은 위장과 꾸밈의 만남이 되었던 기억은 없었나요?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것을 거룩함과 신앙으로 포장하던 시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정말 코미디였습니다” 말하고 싶은 그런 일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 속 비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종종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그리고 모든 신자에게는 얼굴이 있습니다. 다들 삶을 되찾고 싶어 교회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어떤 개인적인, 영적인 접촉이나 만남을 추구하는 모임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이면서도 영적인 가치, 그리고 성령의 치유가 일어나는 인격적 만남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억지로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교감 있는 만남이 그리워 자발적으로 모였고,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절정의 경험도 이따금 체험합니다. 투르니에는 사람이 “실제 인간을 찾아내기 위해 외부 세계에 등을 돌리고 내면의 삶에 집중하는 대신에, 사람은 외부로, 바깥 세계로, 타인에게로, 그리고 하나님께로 눈을 돌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투르니에가 말하는 ‘거룩한 시공간’으로서 신앙 공동체 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나, 너,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

C.S. 루이스가 자신의 모든 저작 중 최고로 여겼던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여주인공 오루알 공주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의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얼굴을 숨기신 하나님과 씨름을 하면서 살짝, 짧은 순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과 형의 얼굴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내적 대화가 함께 진행되지 않고는 인간의 진실한 대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소설가 프레드릭 비크너 목사는 “기독교 신앙은 한순간 짧게나마 그 얼굴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전부”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타자, 타인, 그대, 너의 얼굴을 통해 반사되어 나타납니다. 허물 많아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는 살 자가 없습니다. 햇빛이 반사되어 달빛으로 올 때라야 우리 눈에 해로움이 없고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너’의 얼굴을 통해 ‘그분’의 얼굴이 보이고 ‘너’의 얼굴을 통해 ‘나’의 얼굴도 보이는 법입니다. 나르시스의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본들, 나의 온전한 얼굴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너’의 얼굴이 없는 ‘나’의 얼굴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시대는, 역설적으로, 개인주의라는 나르시스의 연못에서 빠져나와 얍복강 너머로 건너오라는 초대장인지도 모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예전처럼 등장인물의 가면을 쓰고 서로 갈등하던 만남이 아니라, 가면을 벗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C.S.루이스의 저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홍성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는, 사람이 허울 좋은 등장인물의 마스크를 훌훌 벗어 던질 때라야 비로소 하늘 아버지와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과 얼굴과 얼굴로 만날 수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등장인물과 실제 인간, 마스크와 얼굴 사이에서 고단하고 외로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대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대답을 요청하는 것 같아도, 정작 얼굴을 그리워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 모든 것과 더불어, 모든 것을 통해서, 언제나 ‘처음 오신 분’(le premier venu) 같으신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자, 인간의 보편적 만남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인 자기의 진정한 얼굴을 찾아가는 자는 진실로 복이 있다고 산상수훈은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얼굴의) 부분밖에 보이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얼굴)를 보신 것과 같이, 나(의 얼굴)도 온전히 (하나님과 형제와 이웃에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경험의 세계에서 관계의 세계로

코로나19 이전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진정 나의 나 됨이란 무엇일까?’ 자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꺼내거나, ‘진정 내가 잘사는 길은 무엇일까?’ 인생에 대한 궁극적 질문도 던져 보는 만남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누려볼 수 있을까?’라는 자기 갈망을 충족시킬 만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 사람들은 그렇게 ‘나’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정작 두 종류의 ‘나’가 있다는 사실은 명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미 20세기 초에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 그 자체로만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습니다. 오직 ‘나와 너’의 ‘나’가 있든지 아니면, ‘나와 그것’의 ‘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어떤 대상을 만나 온 존재를 기울여 사랑할 때, 나는 ‘너의 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대상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할 때, 나는 ‘그것의 나’가 되고 맙니다. 전자는 관계의 세계를 형성하지만, 후자는 경험의 세계에 머물 뿐입니다. 그러면서 부버는 덧붙입니다. 만남을 통해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려 하지 않고,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마침내 ‘관계’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라고. 그리고 관계의 세계를 세우는 ‘나’로 온전히 들어선 사람은, 마침내 ‘영원한 너’이신 하나님과 마주하는 ‘나’가 될 것이라고. 그렇다면, 코로나19 이전, 교회 안에서 마스크 없이 얼굴로 서로 마주했던 우리의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 혹은 나와 그것의 만남 중 어느 것에 더 가까웠을까요?

 

진정 얼굴이 있는 만남을 위하여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코로나19 이후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자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나와 너의 만남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에 대한 걱정보다 너에 대한 걱정으로, 더 나아가 주님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가는 만남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의 조언을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를 들면, 시편 77편을 묵상하는 만남을 온라인으로라도 먼저 가졌으면 합니다. 비록 화면에 비치는 얼굴일망정 함께 시편 말씀을 나누면서 자아에 대한 몰두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의존으로 옮아가는 성도의 교제를 가져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코로나19 이전의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과 이웃과 교우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솔직히 고백하고, 코로나19를 통과하면서 만난 깨달음과 통찰을 가감 없이 나누는 대화를 비록 비대면으로라도 가진다면, 아마도 예전에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마음은 가면 속에 감추었던 만남보다 훨씬 더 나은 영적 교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집 안에 있으나 집 밖에 있으나, 교회 안에 있을 때나 교회 밖에 있을 때나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얼굴이 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42장로마서 8장을 중심으로 만남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비통 가운데서 함께 부르짖고, 함께 외치고, 함께 탄식하는 교제를 얼굴과 얼굴을 (비대면으로라도) 마주하며 가지면서, 코로나 이후의 날, 새 창조의 날에 대한 소망을 함께 빚어가는 기도의 만남을 가진다면, 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극한의 상황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기도, 볼 수 없는 얼굴, 느낄 수 없는 표정이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로 예전처럼 대면이 어려운 이 시절에, 직접 필사한 성경 구절과 함께 영적 우정이 담긴 손 편지와 조그마한 선물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체국에 가기 어렵다면 그냥 카톡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기만 해도, 성도의 사랑을 맛보는 얼마나 귀중한 경험이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도 취약한 상황에 놓인 분들[로버트 라이시 교수 말처럼, 직장을 잃은(the unpaid), 소외된(the forgotten)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분들을 교우들이 힘을 모아 지원하고 시간을 정해 중보기도함으로써 이중적 돌봄을 실천한다면, 하나님의 선한 손길과 성도가 한 몸을 이룬 성찬의 신비를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런 모습 말고 다른 무엇이 교회이겠습니까? 코로나19는 어쩌면 성도의 교제에 대한 영적 감각을 일깨울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인지도 모릅니다. 본회퍼 목사님의 말처럼 교회의 “진정한 영적 권위는 듣는 섬김, 돕는 섬김,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섬김, 그리고 선포의 섬김이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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