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은 교회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현장 예배가 없는데 예배당이 필요한 것인지, 정부가 예배를 중지시킬 수 있는 것인지, 교회는 정부가 명령한다고 예배를 온라인으로만 드리는 것이 옳은지. 정말 끝없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이 이어지는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제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코로나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뉴노멀을 말했다. 일상 또는 일반을 이야기하는 노멀이 새로워진다는 이 뜻은 결국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그 동안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도 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요즘 우리는 자주 접한다. 심지어 2020년 1월까지만 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이 요즘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있다.

교회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배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용어로서 우리에게 교회는 ‘교회당에 모이는 무리’를 의미한다. 신학적으로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나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라는 설명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 성도에게는 00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당을 지칭하기도 하고, 그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교회당이 폐쇄됐다. 사람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되었고, 모일 기회마저 사라졌다. 먼저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가 제한되었다. 주일예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배들이 중단되었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저녁 또는 오후예배가 중지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일예배마저도 제재를 받아 모임이 금지되고 온라인 예배만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이외에 성경공부나 소모임 등등이 중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되자 성도들은 교회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현장 예배가 없는데 예배당이 필요한 것인지, 정부가 예배를 중지시킬 수 있는 것인지, 교회는 정부가 명령한다고 예배를 온라인으로만 드리는 것이 옳은지. 정말 끝없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질문이 이어지는 것은,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제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갈등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바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사회학 분야 중 ‘갈등 사회학’이라는 것이 있다. 갈등이 있는 곳에서 그 사회의 문제가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갈등이 있는 곳을 살펴보면 그 사회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유사한 관점에서, 교육학에는 ‘갈등 중심의 교육학’이 있다. 갈등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문제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고, 사람들의 관점이나 생각을 변화시키기에 좋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가장 관심을 가질 때는 바로 교회에 분쟁이 있을 때다. 교회가 평화로울 때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교회에 갈등이 생기니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관심이 있으니 참여하게 되고, 참여해 보니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상황을 파악해 보니 본질이 궁금하고, 이렇게 생각이 확대되니 의식이 커지게 된다. 이런 구조가 바로 갈등 중심의 교육학이다.

현재 우리는 교회의 모임과 기능이 제한되므로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하게 주일에 예배를 드리던 우리는 그 예배가 제한되니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되었다. 그동안 습관처럼, 또는 오랜 전통으로 드렸던 주일예배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온라인으로 성찬을 진행하는 장면.(출처: 미국 세인트 존스 요크 밀스 성공회 교회)

 

어느 설교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다. 한 시골 교회에 젊은 목사가 부임했다. 목사는 오래된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릴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찬송을 부를 때면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몸과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을 좇아 살펴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모습을 보다 궁금해진 목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냥 오래전부터 찬송을 부를 때면 그렇게 방향을 바꾸어 섰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러다 한번은 교회를 오래 다닌 한 노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래전 개인 찬송가가 없었을 때 그쪽에 찬송가 가사를 적은 괘도를 걸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때면 그 괘도가 있는 정면 오른쪽 15도 방향을 보았다. 이제는 그 괘도가 사라졌지만 습관은 남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때마다, 이제는 그 괘도가 사라져 빈 벽만 있는 정면 오른쪽 15도를 보게 되었다. 관습이, 오래된 전통이 이렇게 무섭다. 교회가 전통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 설교를 들을 때는 그냥 웃고 지나갔다. 그런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래서 그 목사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찬송을 부를 때마다 15도 방향을 돌리는 그 성도들에게 이제는 그 괘도가 없으니 정면을 바라보라고 했을까, 아니면 그 전통을 존중하며 함께 따라 했을까.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어느 것도 잘못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전통의 문제이다. 필자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통을 그대로 따랐을 것 같다. 성도들이 그게 좋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 마음의 평안과 감동이 있다면, 나에게도 좋고 교회에도 좋은 것이다.

주일예배가 온라인으로 중계되었다. 정말 기적같이 대부분의 교회가 한순간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어느 날, 예배를 현장에 모이지 말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나오고 많은 교회들이 동조하면서, 그리고 모이기가 어려워진 신천지 교인들이 교회로 몰려올 거라는 카톡이 돌면서, 주일예배는 급하게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굳이 이걸 기적이라 하는 것은 세계 어느 교회도, 또는 어느 집단도 이렇게 순식간에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인터넷 인프라와 한국교회의 유연함이 가져온 기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90% 이상이 가지고 있다는 스마트폰의 힘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생중계를 이루어 내고, 모든 교인들이 동시에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린다. 단언컨대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어쨌거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기적을 한순간에 이루어내며 온라인 예배를 일상화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주일예배 영상을 제공하면서 내보내는 측도 받는 측도 ‘실시간’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세미나와는 달리, 예배는 순서상 쌍방향 소통이 꼭 필요하지는 않으므로 실시간 참여가 구태여 중요시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미나를 진행한다면 강의 중간이나 후에 참여자들의 질문과 토론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실시간 참여가 중요하다. 그런데 예배는 현장에 함께 있지 않은 이상, 그 예배가 실시간 송출인지, 하루 전에 녹화한 것인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기술적 어려움과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교회는 실시간 예배를 고집하고 있다. 그리고 교인들 역시 실시간으로 자기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의 특성을 잘 반영한다고 본다. 개교회 중심적이고, 주일·예배 중심이다. ‘우리 교회’를 떠나지 않는 공동체 의식, 예배에 집중된 신앙생활, 주일성수를 중시하는 태도가 있다. 한편,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 또는 포노 사피엔스1)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시공을 초월하여 네트워크만 연결되면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교회는 과거의 익숙한 개념과 방식에 머무르고자 하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은 ‘정면 오른쪽 15도’가 아닐까. 찬송을 부를 때마다 전통에 따라 몸을 돌려 흰 벽을 보며 찬송하던 그 교인들처럼, 우리는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긴 예배에서도 우리 교회 주일 11시 대예배에 동일하게 참여하며 내 신앙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습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경건하지 못하다고 혀를 차며 정죄한다. 찬송을 부를 때 몸을 돌리지 않고 정면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을 보며, ‘요즘 것들은…’을 남발했을 것 같은 그 교인들처럼 말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우리의 ‘주일’과 ‘예배’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때로는 기존 관념을 깨야 하는 고통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는 사회 환경과 교인들의 의식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할 때다. 교회가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들어오지 못하는 교인들은 오지 말라는 식의 배짱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교회를 떠나가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좇아가야 하는 목자의 마음으로 이 글을 이어 보고자 한다.


1) 휴대폰(phone)과 호모사피엔스의 합성어로 디지털 도구를 이용하는 인류를 의미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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