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은 무슨 철학적 사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깊은 경험과 신앙과 예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저 비인격적인 절대자나 우주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서로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고립된 인격들이 아니라, 피차 불가분리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격들입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단순한 유일신이라고 믿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논리적이지 않고, 너무 난해하며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리가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삼위일체 교리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필요한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사변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 교리에 대한 교회의 진술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헬라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과 예배의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 위격(位格, person)이 한 본체(本體, substance)를 이룬다는 말을 축약한 것인데,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계시적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성경은 그것을 증언합니다.
신약성경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라는 구약성경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습니다(엡 4:5-6). 또한 동시에 신약성경의 신앙은 성자의 신성, 성령의 신성을 인정합니다(요 1:1-3; 20:28; 4:20; 고전 3:16, 19 등).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모두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인데, 그래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름만 다르지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되는 분이심을 증언합니다.1)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을 동등하게 나란히 언급합니다(마 28:19, 고후 13:13).2) 이러한 양식은 초기 교회의 예전(liturgy)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ea, A.D. 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 A.D. 381)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의들은 그 무렵에 등장했던 여러 가지 이단 설들이 본래 교회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올바른 신앙(교의, 敎義)을 공식적인 신조로 공표한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기초를 놓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중요하고, 서방교회에서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Augustine, d. 430) 중요합니다.3)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성부는 물론, 성자와 성령을 포함하는 세 위격들 모두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그 구별되는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성을 가진 구별되는 세 개별 실체가 하나님의 한 본질을 공유하며(mia ousia, treis hypostaseis), 또한 서로가 서로 안에 온전히 내주하신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체성을 설명하였습니다.4)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그 한 하나님 안에 서로 구별되면서 동등한 세 위격의 복수적 관계가 존재함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una substantia, tres personae). 그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라면, 하나님 안에 적어도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와 ‘사랑 그 자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것인데, 그는 이를 성부, 성자, 성령에 대응시켰던 것입니다.5)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 운동 이후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한동안 삼위일체론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칼 바르트(Karl Barth) 같은 신학자는 다시 종교개혁적인 말씀의 신학, 계시의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삼위일체론을 다시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해석과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 이면에는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사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삶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나 여성신학자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내용들을 모두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 흐름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인격적인 사랑의 공동체, 혹은 사랑의 교제(코이노니아)를 발견하고, 그것은 원형으로 삼아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각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서방교회 전통을 따르면서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 관계를 보든, 동방교회 전통을 따르면서 세 개별 위격들 간의 사랑의 공동체적 교제를 보든, 큰 흐름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6)
그런데 성경은 그동안 우리가 계속 이야기해 온 ‘하나님 나라’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마 13:43; 26:29; 눅 22:29; 고전 15:24).7)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요 18:36; 엡 5:5; 골 1:13; 벧후 1:11).8)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나라이기도 합니다.9)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요, 이 세상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반영하는 나라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삼위일체론의 내용적인 심층 문법(depth gramma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의 이야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들과 병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용서하고, 인정하고, 치유하고, 가르치고, 변화시켜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비우고 내어 주어 사람이 되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당하며 섬기는 사랑입니다(빌 2:5-11).
삼위일체론은 무슨 철학적 사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깊은 경험과 신앙과 예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저 비인격적인 절대자나 우주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요(마 16:16),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서로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고립된 인격들이 아니라, 피차 불가분리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격들입니다. 그 인격들은 서로 구분된 타자이면서 동시에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인격들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임과 함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을 살릴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이 세상을 살리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며, 이 땅에서 그 사랑의 공동체를 본받아 사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시대에 이 땅에 사는 우리는 그러한 영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1) 성부와 성자의 구별: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자를 가리키는 ‘말씀’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하였으니 하나님과 말씀이신 성자는 구별된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막 15:34), 버리시는 이와 버림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부와 성령의 구별: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할 때(롬 8:26-27),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할 때(요 14:26),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자와 성령의 구별: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할 때(요 16:7),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구별될 수밖에 없다.
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3) 고대와 중세 기독교 세계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 퍼져 있었다. 그중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의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의 교회를 서방교회라고 부른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330-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329-389), 닛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 c.335-c.395)를 가리킨다.
4) 나중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의 해석을 기초로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 혹은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확정 지었다.
5)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정신(영혼)을 분석하여, 정신은 하나인데 정신과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과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영혼은 하나인데 그 안에 기억과 지식과 의지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6) 이러한 방향성은 동방정교회의 요한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를 비롯, 프로테스탄트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로마 천주교회의 캐서린 모우리 라쿠냐(Katherine Mowry LaCugna) 등과 함께,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같은 이도 포함한다.
7) 하나님의 나라를 마 13:43은 “의인들의 아버지의 나라,” 마 26:29은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표현하며, 눅 22:29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일을 말씀하시며, 고전 15:24에서는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말씀하신다.
8) 요 18:36에서 예수님은 그 나라를 가리켜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며, 엡 5:5은 그 나라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골 1:13은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 벧후 1:11은 “우리 구주 곧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나라”라고 부른다.
9) 성경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나라라고 표현한 문자적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라를 이 땅에 실효적으로 실현하는 이는 성령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 12:28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였고, 롬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하였다.
10)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조직신학개론』(개정3판)(새물결플러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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