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는 너무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내세적 개인적으로만 보면,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실현되는 자유의 나라라는 점을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학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개인주의적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창조론은 결국 인간 개인 창조론에 귀결되고, 죄론도 개인적인 죄만 다루고 집단의 죄의 구조적 차원을 보지 못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구원도 개인의 구원에만 머무르게 됩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 죽음 저편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지금 여기, 이 땅 위에도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개인 신자의 마음속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 개인 신자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지나치게 내세화 혹은 개인화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 혹은 미래에도 있지만, 현세 혹은 이 땅에도 임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 차원도 있지만, 공동체적 차원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 대상을 당연히 내포할 것입니다. 그 통치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국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이 혼자 있어서는 나라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모래알 같은 신자들의 집단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나라에는 백성이 있어야 하고, 그 백성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현대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흔히 하나님의 통치라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내세 지향적 혹은 공간적 하나님 나라의 시각을 교정하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그 개념만 지니고 하나님 나라가 그 백성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그것은 실체를 상실한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내세적 개인적으로만 보면,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실현되는 자유의 나라라는 점을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학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개인주의적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창조론은 결국 인간 개인 창조론에 귀결되고, 죄론도 개인적인 죄만 다루고 집단의 죄의 구조적 차원을 보지 못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구원도 개인의 구원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구원론도 개인의 선택과 칭의와 성화만을 이야기하고, 공동체와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론조차도 개인 신자를 양육하며 은혜를 전달하는 기관으로만 인식되고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적 교류를 잘 보지 못합니다. 종말론은 주로 개인의 종말로만 이해하여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간과하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은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참여하게 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1) 그러나 그렇게 해서 들어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이고, 우리는 이제 철저하게 그 백성의 공동체로서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나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서 사도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여러 가지 호칭 중에 “거룩한 나라(ethnos)”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한 계시록 1:6에는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basileia)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여 계시록 기자를 포함한 우리를 [하나님의] 왕국이요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표현이 계시록 5:10에도 나타납니다.2) 여기서 “우리” 혹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즉 그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개별적인 개인들로서는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주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과 맥이 통하는 것입니다.3)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이었으나, 신약성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랑의 나라의 범위를 유대인뿐 아니라 온 세계로 확장하셨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본문들에 의하면, 이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계 만민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요 백성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전 세계 만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필요합니다(막 16:15; 행 1:6-7).

하나님 나라 백성에 참여하는 자들의 범위는 온 세계 만민으로 넓혀졌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통치의 범위도 온 세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요 섭리주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은 온 세상 어디에나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통치를 인격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인격적 통치’와 그것을 따르는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백성 공동체를 우리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물론 교회도 아직 완성된 형태의 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나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의 증인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통치에 순종하는 자들의 공동체 밖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천하 만인과 온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은 그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거나 인식하거나 순종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인격적으로 알고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이를 ‘초인격적 통치’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4) 우리는 이 양자를 모두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을 혼동하면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지만, 그 통치를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립니다. 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적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과 비인격적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의 때에 인격적 통치 아래로 합쳐져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교회 자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과 더불어 계속해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나가는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동시에 교회는 아직 하나님 나라를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 나라의 복음을 힘써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교회는 교회 밖의 세상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임을 인식하고, 그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비록 근사치에 머물겠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태를 대하는 태도와 방식은 하나님 나라 관점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를 잘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교회 밖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생명과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강물같이 흐르도록 힘쓰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영성은 개인적 차원과 함께 공동체적 차원을 가집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영성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모든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을 추구하는 영성이기도 합니다.


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2)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basileia)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여기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왕국과 제사장들이 될 뿐 아니라, 땅에서 왕 노릇하리라고 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3) 구약성경에 문자적으로 ‘하나님 나라’ ‘야웨의 나라’ 혹은 ‘야웨의 통치’ 등의 문구는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런 개념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포로기 이후이며, 주로 역대기와 다니엘서에서 등장한다(대상 16:31; 대상 28:5; 대하 13:8; 대하 20:6; 단 2:44; 단 4:33; 단 7:26-27). 그러나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상,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상은 이러한 포로기 이후 본문들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이와 같이 출애굽기 전체에 “내 백성”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출 3:10; 5:1; 6:7; 7:4; 7:16; 8:1; 8:8; 8:20; 9:1; 9:13; 9:17; 10:3-4; 22:25). 그 외에도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주권자요 통치자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주의 백성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본문들이 많이 있다(삿 8:23; 삼하5:2; 7:23).

4) 여기서 ‘초인격적 통치’라는 말은 그 통치 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통치의 손길 아래 있음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인격적 통치’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는, ‘비인격적’이라는 말이 가지는 부정적인 인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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