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적이었고, 정치는 종교적이었으며, 종교는 기득권 세력을 위한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이집트나 바벨론의 종교, 로마의 황제숭배가 그러했으며, 동양의 유교나 도교도 통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는 기득권 세력을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유와 평화와 정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지난번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것일까요? 우리말로 ‘나라’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왕국, 하나님이 왕(βασιλεύς, 바실류스)이신 ‘하나님 왕국’(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바실레이아 투 데우)을 가리킵니다. 이는 그 나라의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나라’라고 하면 종종 먼저 그 나라의 영토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면 한반도를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바실레이아의 의미는 왕에 의해 통치되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왕위, 왕권, 왕적 통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1]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어떤 지역이나 공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2] 그것은 인간이 주인인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유주이시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 공동체요 하나님 나라의 잠정적이고 지상적 실현 형태인 교회에서 인간이, 특히 어떤 특정인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정 목사나 장로, 감독이나 교황, 총회장이나 노회장, 그 어느 누구든 교회의 주인 노릇이나 왕 노릇을 하려고 하면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차별 없이 평등함을 인정하고 그대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현실화되기 시작하고,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설 때 세상이 바로잡힐 것입니다.

 

영화 ‘Son of God’ 스틸컷.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치는 인간의 정치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적 통치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정치적이었고, 정치는 종교적이었으며, 종교는 기득권 세력을 위한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고대 이집트나 바벨론의 종교가 그러했고, 로마의 황제숭배가 그러했으며, 동양의 유교나 도교도 통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는 기득권 세력을 위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기득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힘없고 가난한 시골 목수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폭력혁명을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폭력혁명이나 칼과 창과 전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고, 세상적인 권모술수로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유와 평화와 정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옛날 다윗과 솔로몬 시대와 같은 강력한 왕국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하였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5-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심으로써 오히려 승리하신, 어찌 보면 이상한 나라입니다(골 2:13-15).[3] 본래 모든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5-17).[4] 그런데 그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났고, 그 본래의 통치 방식인 사랑과 희생과 섬김을 거부하고 폭력과 압제를 행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모든 통치권의 근원자요 창조자이신 그분이 자기 나라를 회복하러 오셨는데, 그들은 그에게 폭력을 휘둘러 그를 십자가 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역설적이지만,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그분은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와 그 주권은 세상 나라들의 왕들처럼 군림하고 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통치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함께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5] 또한 이 차이 때문에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차이는 자연스럽게 이런 분리를 일정 부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속 정치가 시행되는 방법(권력과 권모술수와 여론 조작과 폭력과 돈 등)이나, 세속 정치에서 어떤 정권, 어떤 정파가 승리하는가 하는 문제들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니며, 좌익도 우익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영적 통치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의 이런 구분은 결코 기독교 신앙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혹은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와 압제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 나라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힘없고 소외된 이들, 불의하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고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영화 ‘Son of God’ 스틸컷.

 

종교와 정치의 분리 개념은 인간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으로부터 개인적 자유 특히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한 특정 정파의 종교가 국가에서 지배력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정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예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도 기독교 지도자들도 그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민주화가 진전되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정치 참여를 할 수 있게 되자, 너도나도 정치적 주장과 참여에 나서고 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치 참여는 과연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상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주의 주장에 기독교라는 이름을 실어서 내세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6]

하나님 나라는 세상 모든 나라들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영적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당연히 자신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 통치의 구체적 실현 즉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아마도 자신들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의 독립과 회복을 실현할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와 지지를 표명한 니고데모,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요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요 3:3).[7]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니고데모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혹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변화,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요 3:5)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 것이니, 니고데모는 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흔히 “거듭난다”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것은 흔히 개인적 종교 체험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이 말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체험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에 적합한 사람으로서 거듭났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영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 적합한 사람으로, 진정으로 ‘위로부터’ 태어났습니까?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까?


[1]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n Literatur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s.v. “βασιλεια.” 참조. 눅 19:12(“왕위”), 15(“왕위”), 고전 15:24(“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 히 1:8(“나라”), 계 17:12(“나라를 아직 얻지 못하였으나”). 이런 구절들은 바실레이아라는 말이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므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초인격적인 통치).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순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인격적 통치). 성경은 주로 이 후자를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3-15)

[4]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5-17).

[5]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두 왕국’ 사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6] 독재자 히틀러 시대에 독일 기독교회는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를 지지하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국이요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애국과 신앙을 일치시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매우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게네데 아노덴’(γεννηθῇ ἄνωθεν)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아노덴’은 ‘위로부터’, ‘예로부터’, ‘처음부터’, ‘새로이’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용례들(요 3:31, 19:11, 23, 1:13 등)을 고려할 때, 출생의 기원을 가리키는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TDNT, I. 378. 여기서는 논의 초점이 ‘위로부터’냐 ‘새로이’냐에 있지 않으므로 한국어 번역의 관습을 따라 ‘새로이’ 즉 ‘다시’ 혹은 ‘거듭’이라는 번역을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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