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핑은 쉴즈로부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배웠다. 곧, 쉴즈가 월급 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두를 가난한 한국인 여성 병자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저금 한 푼 없이 검소하게 사는 것을 보고 많은 도전을 받았다. 결국 쉐핑이 다시 광주로 내려간 후에는 쉴즈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게 된다. 쉐핑에게는 멘토 쉴즈가 있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쉐핑의 멘토 쉴즈 간호사

 

쉴즈(Esther Lucas Shields 秀日斯, 1868-1941)와 쉐핑(Elisabeth Shepping 徐舒平, 1880~1934)은 한국 기독교 초기의 내한 선교사이자 간호사였다. 쉴즈는 1897년에 내한하여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수간호사로 일했고, 쉐핑은 1912년에 내한하여 광주와 전주에서 일하다가, 1917년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와서 쉴즈와 함께 일했다. 쉴즈는 쉐핑보다 12살이 많은 선배요 큰 언니였다. 쉐핑은 선교 5년 차 되던 해에 당시 이미 20년간 한국에서 일해 온 쉴즈와 더불어 2년(1917-1919) 이상 세브란스병원에서 동역하면서 한국인 간호사들을 양성했다. 쉐핑은 쉴즈로부터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배웠다. 곧, 쉴즈가 월급 중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모두를 가난한 한국인 여성 병자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저금 한 푼 없이 검소하게 사는 것을 보고 많은 도전을 받았다. 결국 쉐핑이 다시 광주로 내려간 후에는 쉴즈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게 된다. 쉐핑에게는 멘토 쉴즈가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양성소 1918년 졸업생과 교사들, 원 안에 쉴즈(좌)와 쉐핑(우), 1918 ⓒ옥성득

 

동역자로서 조선간호협회를 이끌다(1923-34)

 

쉴즈와 쉐핑은 선교사인 간호사들로 구성된 ‘조선내서양졸업간호회’를 조직하고 매년 연례회의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고 최신 정보를 교환하다가, 한국인 간호부들이 증가하자 1923년 ‘조선간호부회’(현재 대한간호협회 전신)를 조직하고 운영했다. 지도력이 강한 쉐핑이 회장을 맡아 여러 해 봉사했으며, 멘토인 쉴즈는 뒤에서 도왔다.

 

1923년 조선간호부회 창립총회, 원 안에 초대 회장 쉐핑(좌)과 쉴즈(우) 간호사 ⓒ옥성득

 

1928년 쉴즈가 회갑을 맞이했을 때, 경건하게 산 쉴즈를 위해서 세브란스병원 직원들은 작은 회갑연을 열려고 했다. 그때 <기독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全生을 조선을 위하여 살아

 

경성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장 ‘에스더 루카스 쉴즈’ 부인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에비슨’ 박사의 청함을 받아 조선을 위하여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산 설고 물 선 이역에 와서 불쌍한 환자를 간호하여 주며, 영화로운 청춘을 다 보내는 중 그는 동정심이 풍부하여 무료 환자에게 더욱 동정을 많이 하여 자기 독신으로 생활하고 남는 돈은 전부 환자를 도와주고 한 푼의 저축도 아니 하였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그의 연령은 61세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26일은 회갑 일이므로 그의 친구들이 갑연을 예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말리면서 하는 말이, “만일 나를 위로할 마음이 있으면 그 연회에 드는 돈으로 불쌍한 병자를 위하여 병원 어떤 곳에든지 분수기를 하나 만들어 목말라 애쓰는 자를 먹게 하여 달라” 하고 또 “남은 돈이 있거들랑 자기에게 주면 가련한 자를 도와주겠다” 하였다고 한다. 과연 그는 조선을 위하여 낳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는 순진한 부인이라고 일반은 칭송하기를 마지아니한다더라.1)

 

이런 모습에 쉐핑은 더 도전을 받고 자신도 쉴즈처럼 월급을 광주 이일성경학교 운영에 쏟아부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한다.2) 1929년에는 다음 사진처럼 쉴즈는 조선간호부회 대표로 쉐핑을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간호협회 대회에 파송하고, 조선간호부회의 협회 가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해방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앞줄의 이금전, 쉐핑, 이효경을 세계간호대회에 파송하면서, 1929년 ⓒ옥성득

 

먼저 간 쉐핑을 보며 끝까지 달려갈 길을 완주함(1934-1939)

 

1934년, 후배인 쉐핑이 죽었다. 광주 시민은 시민장으로 그의 헌신을 기렸다. 쉐핑의 죽음을 바라본 쉴즈도 떠날 날을 준비하며 더욱 성심껏 가난한 환자들을 도우며 돌보았고, 1938년 40년 봉사 후 은퇴했다. 청춘과 평생을 보낸 제2의 본향 서울에서 조금 더 지내다가 1939년 동생의 집이 있는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동네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41년간 간호사로 봉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쉴즈에 대해 세속 신문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생을 白衣의 天使로!

 

사십 년간 수입의 전부를 빈궁 환자의 시료비에; 조선 사람을 위하여 청춘을 아낌없이 바친, 세전 간호부장(世專 看護婦長) ‘미스 쉴스’ 백발을 선물로 고국에 이십여 세 때에 아리따운 처녀의 몸으로 멀리 태평양 바다를 건너 조선에 와서 이래 사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빈궁환자 구료 사업에 헌신하고, 칠십 노령으로 그리운 고국에 돌아가는 ‘백의의 천사’가 있다. 그는 바로 작년 12월까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장으로 있던 ‘미스 쉴즈’로 작년 12월 26일에 만 70세가 되어 정년(停年) 퇴직하게 되어 오는 24일에 정든 조선 땅을 하직하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되었다. 백발을 선물로 이 땅을 떠나려니 감개가 오죽하랴.

 

그는 일찍이 서력 1868년 13월 26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테일러빌’이라는 곳에서 ‘쉴즈’ 씨의 장녀로 출생하여 고등여학교를 거쳐 1891년 그의 나이 스물네 살 적에 ‘필라델피아’ 병원 간호부양성소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한동안 간호부로 일을 보고 있다가, 1897년 10월 14일, 즉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적에 선교사로 뽑히어 장한 뜻을 품고 멀리 조선에 건너왔다.

 

처음 조선으로 오려고 할 즈음에 그의 고운 얼굴에 취한 여러 청년들로부터 구혼도 많았고 또한 그의 부모로부터도 권고도 있었으나, 그는 자기 일생을 병자들을 위하여 간호 사업에 바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머나먼 조선 땅으로 용감히 건너왔다.

 

그리하여 조선에 건너온 뒤로 약 7년 동안에 조선말 공부와 전도하기에 종사하다가 1906년 즉 34년 전에 ‘세브란스’병원 간호부로 들어가서 그해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간호부양성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에 242명의 졸업자를 세상에 내어 보냈다. 일방으로 간호부장으로 일을 보면서 자기의 봉급은 전부 ‘세브란스’병원으로 찾아드는 빈궁한 환자들을 위하여 바쳐 왔다. 30여 년 동안 성심성의로 변함없이 늘 빈궁한 환자들을 위하여 구료하여 왔기 때문에 ‘세브란스’병원 안에서는 그의 별명을 모두 ‘세브란스의 천사’라고 불러왔다. 그는 이번에 정년으로 40여 년 동안 활동하여 오던 조선 땅을 떠나게 되는 터이나, 손에 차표 한 장 쥐고 건너가게 될 뿐이요, 조금도 재산을 남겨 가지고 가지 않는 터이다.

 

수일 전에 ‘세브란스’병원에서는 그의 송별회를 성대히 열었는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오긍선(吳兢善) 씨도 조선 안에 많은 선교사가 와서 일을 하고 있고 혹은 돌아갔지만, 이 ‘미스 쉴즈’와 같이 철저히 봉사를 한 사람도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 아우의 집에서 조카들을 거두면서 여생을 보낼 터이라 한다.

 

조선을 떠나는 애끓는 마음! ‘쉴즈’ 양의 감회

40여 년 동안 정을 붙인 조선 땅을 하직하고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된 ‘미스 쉴즈’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감상을 말하였다.

“다만 하나님의 지시와 여러 친구들의 협조로 미약한 힘이나마 천직인 간호 사업에 한평생을 바친 것입니다. 이제 조선을 떠나게 되니 여러 정든 친구들을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 퍽 섭섭히 생각됩니다. 그러나 비록 내 몸은 고국에 돌아가게 되더라도 내 정신은 죽을 때까지 조선 땅을 떠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3)

 

이와 함께 신문은 “오늘의 쉴즈 양과 40년 전의 쉴즈 양”을 비교하는 사진을 실었다. 신문 사진들이 희미하기 때문에 같은 더 선명한 사진으로 비교해 보자.

 

1897년의 쉴즈와 40년 후 은퇴할 때의 쉴즈 ⓒ옥성득

 

지난 여러 해 동안 쉐핑(서서평)의 삶이 발굴되어 많은 도전을 주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쉴즈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 봉사한 많은 분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삶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재현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다짐하자. 우리에게는 믿음의 길을 먼저 걸어간 구름같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다.

 

쉴즈와 쉐핑은 독신으로 조선을 위해 복음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들이 떠날 때는 가진 것 하나 없는 빈손이었다. 비움의 영성, 섬김의 영성을 실천한 쉴즈가 있었기에 쉐핑이 있고, 쉐핑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다. 비록 악의 세력이 교회를 흔들고 분열시키려고 해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피땀 흘린 수많은 신앙의 조상들이 있기에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1) “쉬일스 부인의 회갑”, <기독신보>, 1928년 12월 31일.

2) 쉐핑(서서평)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을 참조하라. 소정현, “[근대 인물탐구]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 일요주간, 2018. 01. 29. (편집자 주).

3) <朝鮮日報>, 1939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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