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중요한 의미는 피조물에 대한 배려이다. 고대 사회에서 7일마다 하루를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당사자인 ‘너’와 그 자녀들까지, 그리고 그 종들까지도 쉼을 얻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안식의 범위가 가축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을 넘어 피조물에 대한 배려로 나아간다. 심지어 안식년에 이르러서는 땅으로까지 배려의 대상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 생명체를 넘어 모든 창조물에 대한 배려가 이 계명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절대적인 율법이다. 그들은 모든 일상과 구별하여 안식일을 특별히 지켰다.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이러한 규칙은 때로 경제적 어려움을 주었고, 생활의 리듬이 다른 그들을 차별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안식일은 유효하여서 마카비 전쟁 중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였다. 로마군이 몰려오는데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고 학살을 당한 것이다. 구약성경을 통해 그들에게 안식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은 창세기 2장에서 유래한다. 1장과 연결되는 2:2-3은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말한다. 일곱째 날에 왜 안식이 필요하셨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6일간의 사역이 힘들어서 쉬셨는지, 달력에 빨간 날로 표시되어 쉬셨는지, 그도 아니면 7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드셨는지, 별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그것을 기념하여 하루를 안식하셨다고만 말할 뿐이다.

지금 우리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로 이어지는 요일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등으로 구분하였고 일곱째 날을 사밧(Sabbat)이라고 하여 안식의 날로 불렀다. 즉, 창세기 말씀은 우리가 왜 7일마다 한 날을 쉬게 되었는지는 언급하지만, 그날이 오늘날의 어떤 요일인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어느 날에 쉬어야 하는지, 어느 날을 기준으로 일곱 번째 날인지를 명시하지 않았다. 단지 7일의 주기가 있고, 그중 일곱 번째 날을 사밧(안식)이라고 명명할 뿐이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하며 재밌는 일을 경험했다. 현재의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물론 유대인이 주류이지만 모슬렘인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적지 않고, 대부분 외국인이지만 기독교인도 일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각자 종교에 따라 안식의 날이 다르다는 점이다. 모슬렘은 성경의 안식일 법을 따라 쉬지만, 쉬는 날이 금요일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 즉, 토요일이 안식의 날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표준인 일요일도 역시 안식의 날이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가면 지역마다 쉬는 날이 다르다. 유대인 지역과 이슬람 지역이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곱째 날’이라는 규정이, 어느 날을 기준으로 일곱째인지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성경에서 안식일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명령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온다. 두 곳의 십계명은 잘 살펴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특히, 안식일 규정인 제4계명 부분은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십계명의 각 계명은 간단히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설명이 있더라도 간단히 한 절이거나 특별한 경우에 한 절이 더 추가될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식일 규정인 제4계명에 이르러서는 4절이나 되는 분량으로 자세한 설명이 따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부분에서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신명기 5:12-15

12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 두 성경 구절에서 공통되는 부분은 사밧이 거룩한 날이며, 여호와의 날이고, 안식의 날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날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다. 이날은 다른 날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날이다(창 2:1). 다른 날은 우리가 일상으로 사는 날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날은 다르다. 그런 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마치 같은 물건이라도 안수하여 구별할 때 성전에서 쓰이는 성물이 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날은 여호와의 날이다. 이것은 소유권에 관한 선언이다. 이날은 인간이 소유한 날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날이다. 물론 이날만 여호와의 날은 아니다. 그러나 이날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을 선언하면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날들도 하나님의 날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날은 안식일이다. 이날은 쉼을 얻는 날이다. 그런데 이 계명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바로 안식해야 하는 이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시한다는 점이다. 계명을 받는 당사자인 ‘너’로 시작해서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이 포함된다. 거기에 더해서 심지어 가축들에게도 쉼을 주라고 한다(신명기는 가축에 대해서도 소나 나귀라고 더 명확하게 적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안식일의 중요한 의미는 피조물에 대한 배려이다. 고대 사회에서 7일마다 하루를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당사자인 ‘너’와 그 자녀들까지, 그리고 그 종들까지도 쉼을 얻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안식의 범위가 가축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을 넘어 피조물에 대한 배려로 나아간다. 심지어 안식년에 이르러서는 땅으로까지 배려의 대상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 생명체를 넘어 모든 창조물에 대한 배려가 이 계명에 포함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안식의 명령은 가장 혜택을 입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종들에 관해 더 강조된다. 신명기 5:14을 보면 안식을 누려야 할 대상을 출애굽기와 동일하게 나열하고, 다시 덧붙여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구절의 ‘너 같이’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계명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하셨던 그 말씀이다. 이 두 계명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여호와의 주권을 확인하고, 또, 네 종들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증거로 그들에게 안식을 주라는 안식일 계명과 겹쳐 보인다. 또한, ‘내가 너를 배려한 것과 같이 네 종들을 배려하라’,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도 네 종들을 사랑하라’는 말로도 이해된다.

결국,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서 우리는 하나님 형상(Imago Dei)인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게 되며, 모든 창조물을 향한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며 경험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십계명 안에 안식일 계명을 엄중한 의무 사항으로 담아 두셨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의무로 포장된 권리이다. 하나님이 보장해 주신 안식일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신적 정당성이 부여된 권리이다. 특히, 그 집에 속한 종들에게, 그리고 유대인이 아닐 수도 있는 그 집의 객에게까지도 보장된 거룩한 권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모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이다. 하나님은 계명의 모습으로 이 모든 배려와 사랑을 보장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계명을 품고 있는 이 두 성경 구절은 서로 다른 부분도 있다. 그것은 안식일을 지켜야 할 근거 부분이다. 출애굽기 본문은 11절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언급하며 하나님이 그날에 쉬셨고 안식일을 복되게 하고 구별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출애굽을 언급한다. ‘네가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고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신명기는 종들에 대한 강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런 종 되었던 상황에 있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인도하였으니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 출애굽기는 창조주 하나님을 언급하고, 신명기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즉, 이 둘을 합하면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안식을 정하셨으니, 너희는 지키라는 말이다.

남들처럼 쉼 없이 노동하는 것, 종들을 쉼 없이 부리는 것, 가축들을 쉼 없이 채찍질하는 것은 부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아니, 어쩌면 그 시대에는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방식을 포기하고 온전히 쉼을 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인으로서는, 몸은 쉴지 몰라도 마음은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날을 온전히 쉬었다. 하나님이 이날을 복 주고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 계명을 따라 쉰 것이다. 이것은 이들의 신앙이다. 하나님이 쉬라고 하셨으니, 그분이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신앙이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렇게 보면, 삶으로 드리는 신앙고백이다. 내 삶의 주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낸 신앙고백이다. 즉, 입으로 말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더 나아가서는 삶으로 온전히 보여주는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이 성경 구절에 드러난다. 바로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다. 유대인들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창조주이시며 구원자가 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들의 삶의 주인이 바로 이 하나님이심을 행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며 일하기 위해 먹던 인간들이, 한 번의 쉼을 통하여, 반복되던 노동의 삶을 멈추고 그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그 바라봄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주인이 있음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재정립하게 된다.

안식일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노동에서 해방되는 날이 아니다. 우리의 창조주와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을 경험하는 날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 삶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이런 충만한 의미에서 우리는 주일을 안식의 날로 맞이한다. 단지 하루의 쉬는 날을 넘어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험한다. 그리고 이날에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우리에게 허락된 참된 안식을 누린다. 안식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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