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동일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내가 아이로부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복종의 연기인가, 마음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당장 내 입맛에 맞는 겉모양인가, 아니면 맘에 들건 말건 진심인가. 이렇게 보니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라는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겉모습을 보시지 않는다. 마음을 보신다, 진심을 아신다. 이것이 어디 자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부모, 배우자, 친구, 아니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자 사랑하는 딸들아! 너희들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이냐? 그것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줄 것이다.”

나이 든 리어왕은 세 딸에게 왕국을 나눠줄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가장 애정이 깊고 효성스러운 딸에게 가장 큰 은혜를 내리겠다고 말한다. 한 나라의 3분의 1이 걸린 구술시험이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을 겪어본 왕인지라 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한 나라를 평생 다스린 왕이 아닌가. 게다가 자식들이 아닌가. 아비가 자식을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데 리어왕이 딸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정해져 있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던 리어왕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각했다. 수십 년 간 모두가 그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을 테니. 오랜 세월 아버지를 지켜본 딸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고, 자신들의 입에서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았다. 왕이 원한 것은 물론 진심이 담긴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러나 진심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 리어왕이 낸 문제에 그가 원하는 답이 노골적으로 밝혀져 있었다.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첫째 딸 고네릴과 둘째 딸 리건은 출제자의 의도에 충실한 답안을 내놓아 합격점을 얻는다. 그러나 리어왕이 가장 아꼈던 막내 딸 코델리아는 그런 식으로 아버지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출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이런 강직한 모습 때문에 오히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가진 것을 전부 걸고 내놓은 질문에 원하는 답이 나오면 그 대답이 진심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기로’ 정해 놓은 상황. 그런데 코델리아는 그런 아버지의 의도를 알면서도, 어쩌면 그런 의도를 알았기에,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식의 의무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뿐’이라는 삭막한 대답을 한 것이다.

리어왕의 신하들과 두 큰 딸, 사위들, 그리고 코델리아의 두 구혼자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훈훈하게 왕위를 넘겨주면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믿었던 막내딸이 물벼락을 끼얹은 꼴이 되었다. 리어왕이 분노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안 나오니 리어왕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안 하는 것은 자신을 능멸하는 반항으로만 보였다. 그에게는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진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의 형식만 채워지면 그것이 곧 진심이라고 믿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니까. 그렇게 속을 다 드러내고 살다 보니 마침내 그가 듣고 싶은 말은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큰 딸 둘은 그 주문을 읊어 리어왕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손쉽게 얻어냈다.

 

John Gilbert의 작품 “Cordelia in the Court of King Lear”(1873)

 

선택의 기로에 서다

그런데 이거,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락없이 모범생인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급우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은 어떨까. 똑똑한 학생이 교사가 원하는 반응을 연기하는 건 쉽다. 상대가 부모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대하는 언행과 모습이 있기 마련이나, 아이가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아이의 진짜 모습에 제대로 반응해주지 않으면, 결국 아이는 가면을 쓰게 된다. 그것이 인정받는 길, ‘가정의 평화를 이루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가 인정할 만한 언어를 구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면만 놓고 보면, 차라리 아이가 부모의 뜻을 거부하고 반항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낫겠다 싶다. 물론 정도와 사정에 따라 달라질 문제지만. 정말 아이의 연기만 보고 행복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때에 아이의 진면목을 보고 놀랄 부모, 많지 않을까?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1권, 《마법사의 조카》에서 신적인 사자 아슬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자신이 얻은 것을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리어왕은 두 딸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었다. 막내딸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막내 몫으로 떼어 뒀던 나머지 영토도 언니들에게 나눠 줘 버린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다 해버렸다. 그러나 그 결과 얻게 된 것이 결국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우리도 동일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내가 아이로부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복종의 연기인가, 마음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당장 내 입맛에 맞는 겉모양인가, 아니면 맘에 들건 말건 진심인가. 이렇게 보니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라는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겉모습을 보시지 않는다. 마음을 보신다, 진심을 아신다. 이것이 어디 자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부모, 배우자, 친구, 아니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바는 무엇인지 묻게 된다.

 

뜻밖의 로맨스

『리어왕』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사람, 글로스터 백작에게는 배다른 두 아들이 있다. 정실부인의 아들 에드거와 첩에게서 얻은 아들 에드먼드다. 그런데 에드먼드라는 인물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미남자에다 매너도 좋았던 모양이다. 리어왕의 두 딸, 고네릴과 리건이 모두 그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다. 둘 다 자기를 내던지는 순애보를 만든다. 리건은 남편의 죽음으로 자신의 것이 된 왕국까지 서슴없이 다 갖다 바친다. 고네릴은 에드먼드를 잃기 싫어 동생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이 정도 되면 에드먼드를 향한 두 사람 마음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고네릴과 리건이 아버지를 대하고 ‘처리’하는 모습만 보면,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차가운 여자, 산전수전 다 겪어 세상 물정 다 알고 효니 도리니 약속이니 진실이니 하는 것들은 다 허위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속물들이 분명하다. 아버지의 믿음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린 그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자신의 약속을 우습게 여겼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에드먼드, 그이만은 날 속이지 않을 거라고, 그의 사랑은 진심일 거라고 믿고 그 사랑을 얻고자 모든 것을 건 모험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시 고네릴과 리건, 두 사람 모두 에드먼드가 첫사랑은 아니었을까. 제대로 사랑에 빠진 것은 둘 다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버지 리어왕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는 솜씨를 보면 이들은 권력 투쟁과 처세술에 능숙한 영리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계산된 만남, 정략적 관계가 그네들이 평생 알아온 인간관계의 전부였을 것이다. 늘 저의를 갖고, 권력 관계와 이권에 따라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그들이 행복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리어왕을 쫓아내고 원하는 것을 다 얻어낸 기쁨도 마음 깊은 곳의 허전함을 채우지는 못했으리라. 그런데 두 사람 다 에드먼드를 만나고서 달라졌다. 그들에게 에드먼드는 타산적 계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만난 첫 사람이었던 것. 그를 만나고 생전 처음 정말 사는 것 같았으리라. 그랬다면 그이를 위해서라면, 그이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그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딸과 리어왕의 닮은 점

고네릴과 리건의 선택이 평소의 그들답지 않은 어리석은 불놀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마음을 다잡고 ‘일관성 있게’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면 극단적 형태로 드러난 그들의 실패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자신을 돌아보고 갱생할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 진실한 믿음을 주고 신뢰를 받는 것, 내게 있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나라는 존재로서 사랑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인간다운 삶,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의 필수 요소이다. 리어왕이 우격다짐으로 서툴게 원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리어왕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자식들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자신이 가장 귀한 것을 주면 상대방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다. 가진 것 전부를 걸고 도박을 했다고 할까. 어쩌면 진정한 로맨티스트의 면모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약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신의 것을 다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딸들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면 뭔가 핵심적인 카드는 끝까지 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부를 걸었다. 물론, 권력이 보장해주어 얻었던 것을 권력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받으려 한 것은 오판이었다. 사랑은 그렇게 확인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그는 쓰라리게 배워야 했다.

고네릴과 리건은 일찍이 공주로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여 권세가와 결혼하고 약삭빠르게 처신하여 마침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사랑이니 효성이니 의리니, 이런 것들을 비웃으며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미남자 에드먼드를 만나 그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연인의 사랑을 얻어내려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 상대가 나를 알아주리라, 나의 이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주리라, 이렇게 믿으면서. 이들의 모습에서 리어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들은 아버지를 비웃었으나 영락없는 아버지의 자식이었다.

 

연극 ‘리어 왕’에서, 정신 착란에 이른 리어 왕을 연기한 브란다워 ⓒReinhard Werner/Burgtheater.

 

리어왕의 유일한 희망

리어왕과 두 딸은 그렇게 어떤 면에서는 닮았지만 아주 다른 사람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결정적인 차이는 졸지에 몰락하는 두 딸과 달리, 리어왕은 모든 것을 잃고 고통을 겪는 상당한 기간을 보낸 데 있으리라. 그는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노후를 의탁하려 했던 두 딸의 배신과 냉대, 학대로 인해 결국 측근을 모두 잃고 짐승처럼 광야에서 부르짖는 신세가 된다.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나락에 처한 리어왕은 자신의 고통 속에서 고통 받는 다른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 냉혹한 폭풍의 팔매질을 견뎌야 하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아,

어디에 있든지 간에, 머리를 누일 집도 없이

굶주린 뱃가죽으로, 구멍 뚫린 넝마를 걸친 채로,

이토록 험악한 시절로부터

어찌 너희 스스로를 보호한단 말이냐? 오, 그동안 내가

너무 소홀했구나!1)

이런 면에서 리어왕의 닮은꼴 캐릭터가 글로스터 백작이다. 리어왕이 두 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코델리아를 내쳤던 것처럼, 글로스터 경도 서자 에드먼드의 계략에 넘어가 적자 에드거를 원수처럼 생각한다. 코델리아가 리어왕에게 땅 한 뙈기 물려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듯이, 에드거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고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두 큰 딸들에게 쫓겨나 미치광이가 된 리어왕을 위해 달려온 사람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던 딸 코델리아였듯, 두 딸에게 쫓겨나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리어왕을 동정하다 리건의 남편에게 두 눈을 뽑히는 신세가 된 글로스터 백작도 자신이 내쳤던 에드거에게 보살핌을 받는다.

리어왕과 글로스터 경, 둘 다 자신들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볼 때 앞이 깜깜했고 세상은 온통 사기꾼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한명은 미쳐버렸고, 다른 한 명은 죽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이 몹쓸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진짜 자식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은 자신이 얻지 못한 것, 잃어버린 것에만 주목한 나머지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자신들을 향한 사랑을 알아볼 수 없었다.

리어왕은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지고 나서야, 그에게 정말 필요한 효도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 핵심은 코델리아가 건조하게 말했던 바, ‘자식의 의무로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가졌던 리어왕의 귀에 그것은 도무지 성에 안 차는 삭막한 대답이었으나, 알고 보니 그것은 결코 당연하게 여길 수 없는 과분한 사랑이었다. 아니, 교만한 리어왕이 불만스럽게 거부했던 그 사랑, 자식의 의무로서 바치는 사랑과 존경이 모든 것을 잃은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실, 모든 사랑은 권리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선물이다. 그것은 상을 내걸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전부를 건다고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이 부분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비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그대로는 사랑받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전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는, 오직 사랑스러운 것만이 사랑받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스럽지 못한 것을 사랑해 달라는 말은, 썩은 빵이나 드릴의 소음을 좋아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동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비 덕분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좋은 부모나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그리고 몇몇 특정한 특질이나 습관에 관하여는 아마 늘) 자신이 자비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 자신이 사랑받는 것은 사랑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그들을 사랑해 주는 이들 속에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1) 《리어왕》, 김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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