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도 기다림”이라는 큰 제목 아래 예수님 ‘이후’의 신앙인들의 기다림(대림)을 묵상해 보고자 했다. …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도 그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서로 연결감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께서 죽기까지 멈추지 않으셨던 관계적 혁명을 이어갈 사랑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본문 중)

백소영(강남대학교, 기독교사회윤리학)

 

백소영 외 | 『그 후로도 기다림: 2020 대림절 묵상집』 | 대한기독교서회 | 2020. 10. 30 | 78쪽 | 2,200원.

 

 

 

『그 후로도 기다림』이라는 대림절 원고를 청탁받은 것은, 막 여름으로 들어설 즈음이었다. 살면서 종종 ‘전대미문’이라는 말이 적절할 만한 사건·사고들을 접하게 되는데, 올해가 딱 그런 경우였다. 2020년을 여는 설 무렵부터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서 세계로 전개된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당혹감이나 피로감이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인 나에게는 한 학기 내내 전면 비대면 강의라는 새로운 환경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눈을 맞추는 일은 인격적 만남 이상의 의미가 있다. 표정이나 눈빛을 보아야 이해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 오아시스 같은 예화를 들어 졸음을 방지해야 할지, 언제 쉬어 집중도를 높여야 할지, 강의의 난이도를 높여야 하는지, 아니면 더 쉽게 해야 하는지를 눈빛을 통해 판단해야만 한다. 그저 카메라 렌즈만 보고 일방향의 동영상을 찍는 날들이 반복되자 피로도가 점점 높아갔다.

교수자로서의 당혹감과 피로도라고? 엄살이 심하다 나무라는 분도 있으리라. 맞다. 아무렴 늘어난 환자에 딸리는 병상을 매일 직면하는 의료진들만 할까. 방역 거리 지키기로 인해 생활 터전을 잃은 소상공인들만 할까. 그 거리조차 지킬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바삐 뛰어야 하는 택배 기사님들만 할까. “코로나 앞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하다.” 장미 꽃잎 띄워 놓은 따듯한 세라믹 욕조에서 우아하게 와인 잔을 받쳐 들고 SNS를 하던 미국의 어느 여배우처럼 철없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찌 이 팬데믹 상황이 우리를 ‘평등’하게 위협하고 있을까. 위험은 언제나 가난한 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가는 법이다. 하여, 바로 이 ‘위험의 위계’ 때문에라도, 이번 대림절 묵상은 우리가 함께 통과하고 있는 팬데믹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팬데믹 상황에서 대림절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묵상은 신앙인으로서도, 또, 사회윤리학자로서도 도전이 되는 부름이었다.

그래서 “그 후로도 기다림”이라는 큰 제목 아래 예수님 ‘이후’의 신앙인들의 기다림(대림)을 묵상해 보고자 했다. 비단 오늘날의 시의적 상황과 연결하기 위한 전략만은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이런 의문이 있었다.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린 것은 이해가 되지만, 이미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살아 내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을, 왜 우리는 계속 ‘아기 예수’로만 기다리는 것일까? ‘아기’ 상태의 예수님만 기다리다 보니 대림의 초점이 예수의 ‘탄생’으로만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우리의 묵상은 늘 동방 박사나 양치는 목자들, 마리아와 요셉, 안나와 시므온 언저리에서 맴맴 돌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를 사는 신자들이 맞이하는 대림절이 꼭 초림의 재연이어야만 할까? 재림에 대한 기다림이면 그건 절기를 잘못 지키는 것일까? 꽤 오래되었던 질문이요 의혹이었기에, 나는 이번에는 ‘과감하게’ 재림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목하기로 했다.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우리도 그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서로 연결감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예수께서 죽기까지 멈추지 않으셨던 관계적 혁명을 이어갈 사랑과 용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생애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묵상했다. 2천 년 동안 교회로 살아갔던 바울, 스데반, 빌립, 루터, 본회퍼를 소환했다. 또, 올해는 묵상집의 주 집필자가 여자라는 ‘드문’ 기회를 살려, 여인들에 대한 편애도 한껏 드러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 사마리아 여인, 살로메, 유니아, 루디아, 카타리나 쉬츠 젤, 마리 당띠에르, 샬롯 브론테, 카터 헤이워드…. 더하고 싶은 여인들이 많아 대림절 기간이 짧은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 최용신, 함석헌의 기다림과 소망도 담아 보았다. 그렇게 예수 ‘이후’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기다림의 정점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로 모여지도록, 그 후로도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목록에 우리의 이름이 더해지도록….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는 구세주로서만이 아니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부르시고 초청하시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기를 소망했다.

마치 베를 짜듯, 그들의 기다림을 씨줄 삼고 오늘의 화두를 날줄 삼아서 엮어 내어보려고 애썼다. 익숙해짐을 넘어 ‘정답’이라 여겼던 제도들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롭게 성령의 술을 담아낼 새 부대를 짜내는 우리이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대면 예배가 그친 우리의 상황이 날줄이라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예배의 자리’를 성찰하며 예수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던 우물가 여인이 얻은 기쁨은 씨줄이 되었다. “우리가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선언도, 아니 더 거슬러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형제자매”라는 초대 교회의 선포도 씨줄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계와 혐오와 배척이 더욱 늘어가기만 하는 오늘의 상황은 날줄이 되어, 베 짜는 손을 아프게 했다.

말하고 싶었다. 예수의 탄생으로, 죽음으로, 부활로, 우리의 죄가 씻기고 영혼이 구원받은 것으로 상황 종료가 된 것이 아니라고. 다 이룬 성공적인 일을 축하하는 ‘재연’만이 남아 화려한 성탄 트리를 점등하고 웃음 가득한 성극만 준비할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그 후로도’ 기다림을 멈추지 말아야 하니까. 높은 왕좌를 버리고 인간의 자리로 오셨다는 ‘화육’(incarnation)의 감격만을 노래할 것이 아니라, 이미 오신 예수의 삶을 닮아 우리도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몸을 입은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결코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사람들이 되고, 하여, 대림절 기간 동안에 교회로 살아내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독자를 초대했다. ‘파라볼로이’, 헬라어로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초대 교회 시절 로마 제국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위험을 무릅쓰며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돌보았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별명이다. 그 이름이 다시 우리의 것이 되기를 소망했다.

대림절은 그렇게 우리가 여호와의 펼친 팔이 되기를 각오하는 기간이 아닐까. 이미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귀여워’하는 기간도 아니고, 일 년 동안 미뤄둔 친척과 지인을 챙기는 송년의 기간쯤으로만 지내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올해 대림절만이라도 그러하기를, 나 역시 다짐해본다. 영이시기에 손과 발이 없으신 여호와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그의 일을 이 땅에서 펼치시기에!

비일상이 일상이 되고 몰상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세상을 매일 대면하면서, 민초들은 위협과 고통 속에서 염원했을 거예요. ‘그날’이 어서 오기를…. 여호와께서 결국 더 참지 않으시고 교만하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팔을 펼치시는 날, 순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서로를 아끼며 사는 것이 일상이 되고 상식이 되는 날, 마리아는 그런 날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을까요? (『그 후로도 기다림』, 15쪽)

겨우 열서너 살 남짓했을 어린 마리아의 오랜 기다림이 ‘아멘’으로 응답되던 기쁨이,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가 여호와의 펼친 팔이 되어 만나는 이웃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다린다. 기대한다.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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