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이 말씀처럼, 간음의 본질은 단순히 간통 행위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성적 탐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 비인간화하는 데 있습니다. 이 악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이라는 악에 대처하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근본적인 해결책을 따라야 합니다. (중략)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소중히 대우하라는 황금률을 날마다 연습함으로써 악한 습관에 물들었던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너희는 “간음하지 마라”라고 말해진 것을 들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이용해 음욕을 채우고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자는, 이미 그의 마음에서 그녀와 간음하였다. (마태복음 5:27-28)

십계명의 제7계명이 금하는 ‘간음’의 문자적 의미는 ‘배우자를 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에나 예수님 당시에나, 사람들은 이 계명이 간음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좁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은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이 계명을 새롭게 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천천히 곱씹어 보면, 이 계명이 겨냥하는 것은 간음의 ‘행위’를 넘어 그 행위를 낳는 뿌리인 부패한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한 단어씩 주목해 보겠습니다. “여자를 이용해 음욕을 채우고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1) 것은 이미 마음 안에서 간음을 행한 것이며, 제7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성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성적인 욕망이나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단죄하는 이 사람은, 첫째로, 마음에 음욕을 품은 상태로 그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을 계속 찾거나 바라보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한 여자를 자기의 성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 의도적으로 계속 머물러 있는 경우 이 사람은, 행위로는 아직 간음하지 않았지만 마음에서는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며,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영화 <선 오브 갓> 스틸컷.

 

한번은 예수님이 죄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아보기 위해 복음서 전체를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뜻밖에도 죄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어서 놀랐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선을 끄는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람의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악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막 7:20-23; 비교, 마 12:34). 예수님은 죄의 문제가 ‘행위’ 수준이 아니라, ‘마음’ 수준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가르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부패한 마음에서 악한 것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사상은 구약 시대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부패한 마음의 문제(렘 17:9)를 해결하시고자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며, 그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렘 31:31-34), 각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영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겔 36:24-27)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통해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취하시는 새 언약의 관점에서 십계명을 읽으면, 그리스도인에게 십계명은 단순히 행위 수준의 요구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워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명령이 됩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말씀(마 5:21-22)에서도, 예수님은 살인과 욕설이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본질이 동일한 행위라고 선언하심으로써, 행위 수준보다 더 깊은 마음 수준에 자리를 잡은 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즉, 분노를 못 이겨 이웃을 향해 욕을 하거나 멸시하는 말을 뱉는 것은, 상대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공격함으로써 추한 우월감을 느끼기를 원하는 악하고 부패한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행동이며, 이 마음속 악은 살인죄의 뿌리가 되기도 하는 바로 그 악인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러므로 간음 행위를 금할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때때로 음욕에 사로잡힐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위험 상태를 깨닫고 직면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간음이 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첫째 이유는 간음이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로서 자기 배우자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는 또 다른 두 번째 차원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솟아나는 무질서한 성욕과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욕구 충족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 바로 그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눈빛이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나님이 지으신 한 존엄한 인격을 성적 도구로 축소하고 납작하게 만들어 자기 욕심대로 이용하려고 하는 악입니다.

최근까지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금기시해 왔기에, 기성세대나 청소년이나 성에 대한 건강한 관점과 생각을 기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아동, 청소년,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며 이익을 취하는 극악한 범죄들이 번져 갔고,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사는 다수가 은밀히 그런 악에 가담하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악이 우리 사회에 이처럼 쉽게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 사회가 타인을 비교의 대상, 경쟁의 대상, 이용의 대상으로 비인격화하고, 약자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멸시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가치관, 사고방식, 언어, 습관을 제거하지 못했고, 그 악한 문화가 우리 마음속까지 깊이 침투해 경계심조차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이 말씀처럼, 간음의 본질은 단순히 간통 행위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성적 탐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 비인간화하는 데 있습니다. 이 악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이라는 악에 대처하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근본적인 해결책을 따라야 합니다. 그 해결책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근본적 변화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소중히 대우하라는 황금률을 날마다 연습함으로써 악한 습관에 물들었던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공동체 밖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이와 유사하게, 다른 사람의 죄로 상처 입은 각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타인을 나 자신처럼 소중한 한 인격으로 대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그런 가치관을 확산하는 일에 기여해야 합니다.


1)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한 사역입니다. ‘정욕/탐욕을 채우다’라는 동사(에피튀메오)의 직접 목적어가 ‘여자’이므로 ‘여자를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대상으로 이용한다’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또 ‘바라보다’(블레포)라는 동사는 현재형 분사로 사용되어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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