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 증거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땅이었던 소아시아와 신화와 철학의 땅이었던 그리스가, 권력과 법의 나라였던 로마가 소동에 휘말렸습니다. 그 소동은 바이킹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식인종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거친 소동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겸손함으로 소동을 가져왔지만 많은 곳에서 그렇지 못한 모습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동은 생명을 낳는 일을 하였습니다.

자발적 불편이라는 소동

신동식

자발적불편운동본부 본부장

빛과소금교회 담임목사

소동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술렁거림이라는 의미입니다. 소동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집중합니다. 소동은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시끄러운 소음입니다. 두번째는 변화를 일으키는 소요입니다. 소동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끝날 수도 있고, 때로는 변화를 가져오는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벳바게라는 동네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따라오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행위와 함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칩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황제가 주인으로 있는 성에 새 로운 왕의 출현은 큰 소동이었습니다. 성의 사람들은 외치는 소리에 도대체 누가 왔기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지금 성안에 나사렛에서 온 그 선지자 예수가 왔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등장은 소동이었습니다. 잠자던 마을을 깨우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작은 소동이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격변의 시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이러한 소동은 제자들을 통하여 이어졌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을 넘어서 그리스 아테네로 이어지고 마침내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로 전파되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소동은 세계를 깨울 천둥소리로 커졌습니다. 로마가 변화되고 로마의 길을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소리는 대륙을 지나고, 대양을 넘어서 전파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도 증거되었고, 신대륙에도 전달되었고, 중구 대륙과 동방의 아름다운 땅이었던 조선에도 다 달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증거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의 땅이었던 소아시아와 신화와 철학의 땅이었던 그리스가, 권력과 법의 나라였던 로마가 소동에 휘말렸습니다. 그 소동은 바이킹 민족들을 굴복시키고, 식인종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거친 소동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겸손함으로 소동을 가져왔지만 많은 곳에서 그렇지 못한 모습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동은 생명을 낳는 일을 하였습니다.

 

 

21세기의 전 세계는 이 소동의 결과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음이 아니라 생명의 소리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소동이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하여 소동은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한 생명이 태어날 때의 소동을 기억합니다. 생명은 조용한 가운데 탄생하지 않습니다. 엄마의 고통 소리와 아이의 울음 소리와 주변의 격려 소리로 태어납니다.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한 생명이 우리에게 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소동이 필요합니다. 소동이 없이 전진은 없습니다. 특별히 자발적 불편이라는 소동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편리와 허영과 탐욕의 소리가 편만하여져 있습니다. 아파트가 몇십억씩 되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아파트가 있어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지구의 생명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세대는 오로지 자신의 삶만을 누리고 사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좀 더 편리한대로 소비합니다. 소비에 대한 죄책감이 이미 사라진 시대입니다. 거기에 욕망에 따른 소비와 삶은 점점 폭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 보다 자발적 불편이 필요합니다. 아굴의 기도처럼 필요한 양식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조금만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허영에 취해있는 세상을 깨울 수 없습니다. 자발적 불편이라는 소동이 일어날 때 소망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동은 개인적인 컵 사용에서, 가정에서 분리수거로, 교회에서의 이웃을 향한 나눔 등 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동이 천둥소리가 되는 도구입니다. 자발적 불편으로 세상을 진동시켜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작은 소동인 자발적 불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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