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시모 사건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가장 고조되던 1925-26년에 발생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신문 잡지들은 이 사건을 반선교사, 반미 운동에 이용했다. 일본 언론도 마찬가지였고, 미국에서도 일부 언론이 반선교운동을 위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이 이 사건을 반미제 운동에 적극 활용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 사건을 심심찮게 인용하면서 미국 제국주의 선교사의 전형으로 이용했다.(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1926년 6월 28일 자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안식교 순안병원 의사 허시모(C. A. Haysmer, 許時模)가 1925년 9월 15일(음력 7월 25일)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훔친 한 소년에게 사사로이 벌(私刑)로써 두 뺨에 ‘독약’(염산)으로 ‘도적’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소년 김명섭이 울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항의했으나, 의사는 오히려 도적질을 고치려면 그런 벌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썼다. 전국으로 반미 감정이 퍼지고, 도처에 규탄 대회까지 열렸다. 사회주의자들이 이 사건을 반기독교 운동에 이용했다. 일본과 미국 신문에도 보도되어, 선교사를 비판하고 미국인의 인종주의를 규탄했다. 결국 상해죄로 기소된 허시모는 1심 유죄 후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사임한 후 한국을 떠나 1926년 12월에 미국으로 갔다. 5개월 이상 신문 지상을 뜨겁게 달구고 민족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끝났다. 허시모 의사는 1925년 4월에 한국에 왔으니, 1년 8개월 만에 짧은 선교사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위의 밑줄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 교회사와 북한 현대사에서 반선교사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인 이 사건을 신문과 잡지 보도를 통해서 다시 살펴보자.

 

보도 내용

과연 신문 기자들이 사실을 제대로 취재한 후에 보도했는지 의문스럽다. 아래는 사건을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이다.

 

<조선일보> 1926년 6월 28일 자

 

이틀 후 <동아일보>도 처음으로 이 사건을 다루며 거의 유사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허시모 원장 단독 만행으로 서술했다. (아래 내용은 필자가 현대어로 고침. 밑줄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소년의 면상에 ‘도적’이라 刻字,” 『東亞日報』, 1926년 6월 30일.

米人의 蠻的 私刑, 허가 없이 과수원에 들어갔다고 염산으로 얼굴에 도적이라고 써.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남창리(順安面 南昌里) 32번지 석천근(石天根)의 아들 김명섭(金明爕, 12)이란 소년이 작년 7월 25일에 당지 제칠일예수재림교회의 부속인 순안병원(順安病院)에서 경영하는 평과원(平果園)에 들어가서 허가 없는 장난질을 하여 임금[능금]을 따서 먹은 일로 동 병원장 미국 사람 허시모(許時模)에게 잡혀 참혹하고 인도에 그릇되는 형벌을 받은 사실이 최근에 탄로되어 평원 지방과 및 부근 지방에는 큰 여론이 생겨 있다는데, 그 사실의 전말을 듣건대 악형을 당한 김명섭은 작년 7월 25일에 전기 병원에 소속인 평과원에 들어가 과실을 따다가 갑자기 나오는 원장인 미국 사람 허시모에게 들키게 되자 어린 마음에 즉시 달아났으나 결국 붙잡혔는데, 전기 허시모는 김명섭을 잡아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서 그 집 앞에 복숭아나무에 높이 달아매고 염산(鹽酸)이란 끔직한 독약으로 그 아이 양편 뺨에 도적이란 글자를 써서 한참이나 두었다가 놓아 주었다는데, 김명섭의 얼굴에는 도적이란 글자가 날마다 뚜렷이 드러나게 됨에 그 부모는 허시모를 찾아서 분풀이를 하려 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냉정한 태도로 자기의 잔혹한 행동을 변명하므로, 그 부모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억지로 참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데, 이 소문이 평원 일군에 퍼지게 되는 동시에 일반 여론이 매우 비등하는 중이라 하며, 전기 김명섭은 얼굴에 쓴 도적이란 글자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서 다니던 학교에서는 퇴학처분(退學處分)까지 당하게 되어, 아직 어린 그는 평생에 도적이란 간판을 가장 중한 면부에 붙이고 다니게 되었다 하여, 평원에서는 시민대회까지라도 열고 적극적으로 전기 허시모란 자를 처치하자고 여론이 물 끓듯 한다더라.

 

 

아래와 같이 <동아일보> 7월 4일 자(석간 5면)에는 소년의 사진까지 실렸다. 사진처럼 뺨에 쓴 글씨는 잘 보이지 않고, 긁어서 생긴 검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여론은 비등했다.

 

 

사회주의자 기자가 많았고 반기독교 기사를 자주 올리던 <개벽>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8월호에 바로 아래 기사를 싣고, 미국과 미국 선교사의 인종주의를 강력 규탄했다. 원문 그대로 옮긴다.

 

科學人 蠻行事件: 米人 許時模의 知慧로운 私刑

다음에 요사이의 조선사회에서 상당히 物論을 닐으킨 사건은 저 許時模의 蠻行事件이다. 조선 사람들에게 존대를 밧기 위함인지 조선사람을 下待하려 함인지 자기네들의 문명을 끗업시 자랑하고 후덕함을 한업시 선전하는 재류 미국인 선교사의 一人, 許時模라는 자가 그 近隣에 잇는 平原郡 順安 金明燮이라는 당년 12세의 學童이 自家一果樹園에 잠입한 것을 발견하고 현장에서 잡아다가 나무에 빗그러 매여놋코 그 모친을 불너서 果實갑으로 돈 5원을 가지오라다가 할 수 업슴을 말함에 硫酸水라는 劇劑의 약품으로 『盜賊』이라는 두 글자를 明燮의 두 뺨에 써서 아주 內皮까지 상하얏슴으로 1년이나 지내인 이제 이르러서는 의약으로도 고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얏다는 사실이다.

비록 유년학동의 일이라 할지라도 남의 果園에 잠입한 것은 잘못된 일이니 그를 징계하랴는 것은 누구나 잇슬 수 잇는 일이다. 그러나 愛인지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하야 저 멀리 태평양을 건너온 許時模가 그 간단하고도 씻지 못할 낙인을 面部에다 찍어서써 유아의 일생 운명을 망처주엇다는 사실에 대하야는 누구의 寬厚한 생각으로도 尋常視할 수 업슬 것이니 경찰의 책임자도 아니오 사법의 당국자도 아닌 우리는 오직 그 범행의 잔인성이 얼마나 酷甚한 것인가를 말할 뿐이다.

『盜賊』이라는 두 글자를 面部에 肉刻한 許時模의 본의는 그 아희로 하야곰 아주 도덕적 死亡者를 만들려 한 곳에 잇슬 것이다. 文明한 者가 아니면 그러한 만행은 될 수 업는 일이다. 문명할수록 범죄의 수단은 더욱 교묘해진다는 것과 갓치 許時模의 만행은 야만인의 만행이 아닌 것만치 속깁히 보이지 아니하는 잔학성이 훨신 더 심한 것이다. 더욱 그는 선교사이오 의사이라. 그러한 잔학성을 포장한 자로서 그 잔학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식의 행동, 표리부동의 설교가 몃해를 계속하는 동안에 幾百幾千의 조선사람이 거긔에 속히여 중독되고 취하야 미혹하얏슬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참으로 전율을 금치 못한다. 혹은 치료와 설교는 직업적이라 그 만행의 잔학성을 거긔에 비겨 말할 바 아니라 하겟지마는 사람의 인격이 둘이 아닌 이상에는 만행자의 심리를 비만행자의 심리로는 볼 수 업는 것이다. 그것이 취중의 일이라던지 또 비상시의 일이 아닌 이상에는 掩護할내야 업호할 수 업는 본능의 만행이다.

엇잿든 이 許時模의 만행사건은 許時模 개인의 所爲이지마는 조선에 잇는 미국인 선교 사업계에 큰 타격이 아니랄 수 업슬 것이니 이것이 집단 사업의 때때로 봉착하게 되는 큰 난관의 하나인 것이다. 비록 이러한 만행사건이 아니라도 최근에 이르러서 조선 기독교계에는 각지에서 선교사의 오만을 증오하는 소리가 놉하지고 배척하는 운동이 熾盛하는 오날에 그 만행의 一事는 확실히 그 포장한 심성의 일부를 우리의 眼前에 폭로식힌 것으로 보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저 미국인의 흑인에 대한 모멸 유린의 심하얏든 사실은 이미 세계인의 周知하는 사실이라. 이에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업는 바이지마는 저들 선교사들이 東洋諸國에 파견되는 것은 彼等의 所謂 『기독교의 복음』을 인류에게 선포하랴는 願望도 업지 안핫섯겟지마는 그보다도 차라리 인종적 우월의 권위를 가지고 저 劣等無道한 유색인종에게 인간다운 도리를 가르처 주리라 하는 대우월감 대오만성이 그 동기의 거의 전부를 점령한 것도 그들의 조선에서의 행동이 잘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他面으로 그들이 아직까지 적극적 배척의 세례를 밧지 안는 것은 그들의 수단이 너무나 음성적이어서 假裝의 설교와 施惠의 약병으로써 그 表皮를 감족가티 縫하야 나가는 동시에 민중의 총명이 아직 그를 투시할만치 밝아지지 못한 까닭이다. 아! 우리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문명인, 과학인의 소유한 蠻性이다.

 

 

 

 

오보 내용

위의 보도를 비롯한 여러 신문과 잡지들의 보도에서 잘못 보도되거나 생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허시모가 소년을 붙잡은 후, 부모에게도 경각심을 주기 위해 간호사 임신일(林信一)을 시켜 그 어머니를 불렀다.

(2) ​소년의 어머니가 오자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 테니 5원을 내든지 소년의 얼굴에 글씨를 쓰는 것을 택하라고 하였으나, ​어머니가 돈이 없다고 하자 5원을 2원으로 깎아주고 대신 소년에게 2주간 노동을 시키겠다고 제안했는데, 어머니 윤 씨는 2원마저도 낼 형편이 안 된다고 했고, 이에 일체의 금전적인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금전 배상은 감하는 대신 소년의 얼굴에 글씨를 쓰겠다고 했다.

(3) ​얼굴에 쓴 글씨는 2주가 지나면 깨끗이 지워진다는 허시모의 말에 소년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도록 했다.

(4) ​이에 허시모는 질산은으로 소년의 양 볼에 ‘도적’이라는 글씨를 쓰고 햇볕에 말린 후 돌려보냈다.

(5) ​그런데 소년은 씻어도 얼굴의 글씨가 지워지지 않자 다음날 허시모를 찾아가서 이에 대해 다시 물었는데, ​허시모는 곧 지워진다 말하고 돈을 못 낸 대신 1주일간 김을 매라고 호미를 주었지만, 소년은 일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

(6)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얼굴의 글씨를 지우기 위해 계속 문지르는 바람에 덧나서 얼굴이 흠집이 남게 되었다.

(7) ​또한 소년은 당시 평원보통학교 1학년을 마친 상태였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때부터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지냈다.

(8)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질산은(silver nitrate, AgNO3)은 ​피부를 괴사시키는 염산과는 달리 의료용으로 곧 소독제(disinfection)로 많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1% 질산은 용액은 신생아 결막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신생아에게 점안액으로 주로 사용되며, ​20% 용액은 신생아 배꼽에서 장액이 나오는 신생아 제용종(除茸腫)의 소독에 사용된다. ​사마귀를 없애는 데도 사용한다. 이런 농도의 질산은 용액이 피부에 닿으면 피부 표피에만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 검게 변하는데, 그 검게 변한 피부 조직은 2주일 정도 지나면 흔적 없이 깨끗이 소실된다. 이런 사실은 생략한 채, 신문은 반선교사 감정을 자극했다. 만일 소년이 적게 쓴 글씨를 문지르지 않았다면, 2주 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부가 검게 되자 계속 문지르면서 얼굴에 흠집이 남게 되었던 모양이다.

 

 

왜 “문제의 간호부”일까?

다른 중요한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동아일보>는 7월 5일 자에서, 양측이 합의하자, 이를 음계라고 비난했는데, 이때 간호부 임신일을 “문제의 간호부”로 칭했다.

“부녀를 달래어 야반(夜半)에 화해 성립.” 『東亞日報』, 1926년 7월 5일.

피해자 모친을 밤중에 찾아가 여러 가지로 달래어 화해 성립. 만행미인(蠻行米人)과 안식교의 음계(陰計).

 

순안 안식교회 허시모(許時模)가 김명섭(金明爕)에게 만행을 한 사건에 대하여 민중의 여론이 날로 높아간다 함은 누보한 바어니와, 평원시민대회 집행위원 송계은(宋繼殷), 김달요(金達堯) 양 씨가 안식교회 조선포교 관리자 미국인 우국화(禹國華)에게 대하여 피해자 김명섭의 면부를 고쳐줄 일, 각 신문지에 사죄할 일, 허시모를 처치할 일, 피해자의 생활 안정을 도모할 일, 위자료를 줄 일 등 여러 조건을 요구하므로, 그는 그 조건 전부를 승인한다는 것을 언명하고 피해자 교육은 자기네 교회의 소학교로부터 중학교까지 책임을 지고 공부를 시켜 생활의 안정을 시킬 터이고, 허시모는 세상의 요구대로 본국으로 보내려면 보낼 수 있다 한 후, 교역자 대회를 열겠다고 말까지 하였다는데, 그들은 돌연히 1일 오후 12시가 지난 후 가해자 허시모의 양인과 문제의 간호부 임신일(林信一) 등이 피해자의 집에 가서 화해를 청하매, 피해자의 친권자 윤 씨(尹氏)가 1만원의 위자료를 내면 화해를 하겠다고 말하였는데, 가해자는 위자료로 420원과 치료비로 200원을 합하여 620원으로 화해를 하고 말았다는데, 이것을 알게 된 일반 시민들은 그들의 음흉한 계책에 대하여 극도로 분개하는 중이라더라.

 

 

허시모(許時模, Clyde Albert Haysmer: 1897-1983)는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안식교 선교사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20년 미국 서부 오리건주에서 의대(Alberta Sanitarium)를 졸업했으며, 1920년 포틀랜드 요양소 간호사 양성 학교를 졸업한 아이다 루이스(Ida Louise)를 만나 1922년에 결혼하고, 포틀랜드 요양소(Portland Sanitarium)에서 근무했다. 부부는 한국 선교사로 부름 받아 1925년 3월 20일 밴쿠버를 떠나 서울로 왔다. 잠시 한국어를 배운 후 순안에 가서 진료소를 개설했다.

따라서 1925년 9월이면 (대개 의사들은 환자 치료에 전념하기 때문에 전도하는 목회 선교사에 비해 한국어 습득이 늦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내한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은 28세의 젊은 의사로서 한국어에 전혀 능하지 못했고, 한국의 과수원 ‘서리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았을 때, 간호부 임신일이 통역을 했을 것이며, 이어서 소년의 어머니를 불러서 대화하고, 처벌을 위해서 진료소에 있는 질산은을 가져와서 뺨에 ‘도적’이라고 쓴 일은 모두 간호부 임신일이 했을 가능성이 크다. 간호부로서 평소 사용하던 질산은을 사용했을 것이며, 그런 글씨를 허시모가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허시모는 병원장으로서 그 일을 시켰고, 만일 간호부가 그 일을 한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녀의 장래가 심히 우려되므로, 허시모 의사 본인이 모든 도덕적, 형사적 책임을 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블로거 ‘하늘계단’이 운영하는 블로그 “콩깍지 속의 콩”에는 이근화 의사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임신일 간호사가 질산은으로 소년의 뺨에 ‘도적’이라고 썼으며, 허시모 의사가 끝까지 이를 밝히지 않고 그녀를 보호했다고 말한다.

 

서울위생병원 원장을 역임했던 이근화 씨는 1958년에 미국에서 허시모를 만나 당시 사건에 대한 뜻밖의 증언을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허시모의 말에 의하면 “당시 순안병원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간호사가 소년의 양쪽 뺨에 도적이라는 글씨를 썼으며 그녀가 간호사였기에 병원에서 사용하는 질산은을 사용한 것 같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여론화되었을 때, 사실을 그대로 밝히지 못했던 것은 책임이 간호사로 밝혀졌을 때 그 간호사가 조선의 흥분된 군중과 경찰에 의해 크게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염려되어 병원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증언의 진실 여부를 더 이상 확인해 볼 방법이 없겠지만, ​이 증언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허시모가 일방적으로 이 사건을 주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1)

 

블로그 기사의 결론처럼, 이근화 씨의 말을 뒷받침 해 줄 문서 자료가 없다. 허시모도 미국에서 이 사건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고, 글로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책임을 진 일이고, 사퇴하고 돌아왔기에 그랬을 것이다.

 

사건 후 허시모의 삶

허시모 사건은 조선일보 등에서 사실 이상으로 비판하고 사회주의자들이 반선교사 운동에 이용하면서 큰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허시모는 복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허시모는 이후 보스턴과 유럽에서 추가로 의학을 공부하고 외과의사가 되어 매사추세츠 스톤햄 요양소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은퇴 후 캘리포니아 유카밸리(Yucca Valley)에서 살았는데, 부인은 1979년에 사망했고, 헤이스머는 1983년 앨러배마에서 별세했다.

 

말년의 허시모 부부

 

사건 후 김명섭의 삶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건이 잊혀 갈 무렵, 1930년 7월 19일 <중외일보>는 김명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반전이었다.

12살 소년 김명섭은 허시모 과수원에 여러 번 와서 서리를 했다. 그런데 일반 사회의 지원과 안식교 순안병원과의 합의에 따라 장학금 1,000원 넘게 받고 학교에도 다니게 되었으나, 공부는 하지 않고, 그 돈도 흐지부지 낭비하고, 과거에 하던 대로 나쁜 친구와 어울리며 상습적으로 다른 사람의 과수원에 침입하여 절도를 하다가 붙잡혔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소년 김명섭이 거액의 장학금을 받고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으며, 절도를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허시모 사건은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운동이 가장 고조되던 1925-26년에 발생했다. 사회주의자들과 신문 잡지들은 이 사건을 반선교사, 반미 운동에 이용했다. 일본 언론도 마찬가지였고, 미국에서도 일부 언론이 반선교운동을 위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이 이 사건을 반미제 운동에 적극 활용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 사건을 심심찮게 인용하면서 미국 제국주의 선교사의 전형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내한한 지 5개월이 되지 않은 한 청년 선교사 의사가 상습적으로 과일을 훔쳐 먹는 소년에게 다른 방법으로 처벌을 하고, 자비를 베풀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선교와 전도에서 한 개인의 언어 소통 능력과 문화적 감수성은 민족적 감정을 건드릴 수 있고 민족적 적의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허시모가 임신일 간호부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그녀가 한 것을 숨기고 자신이 모든 비난과 책임을 졌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어떤 한 사건에 명암이 섞여 있는 게 인간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잘못된 사건이라면 재고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짜 뉴스에 시달렸는가. 또, 잘 알지 못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믿고 그대로 옮긴 일은 얼마나 많은가? 정직, 언행일치, 거짓말하지 않기를 새삼 다짐하고 반성한다. 동시에, 내가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고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약자를 지켜주고 그에 따른 수난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1) 하늘계단, “허시모 사건의 진실”, 2016.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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