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논쟁의 내용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날(day)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날에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이다. 세부 내용을 아래에서 차근차근 정리해 보고자 한다.(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
복음서의 시기를 지나면서 기독교는 디아스포라 상황을 맞이한다. 유대 사회를 벗어나서 이방인들의 사회에서, 즉,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의 문화권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바울을 중심으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유대적 전통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유대 사회 안에서 유대인들만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이제 로마 사회 안에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부분은 할례였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져 온 할례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했다. 그분의 백성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정체성의 표지였다. 어쨌거나 유대인들은 당연히 할례를 받았다. 할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맞이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대 사회 안에 있을 때에는 할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 믿는 것과 할례 받는 것 사이에 어떤 충돌도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이방인에게 나아갔다. 이제 예수를 믿는 것과 할례 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신자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먼저 유대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생각이 달랐다. 예수를 믿는 것과 유대인이 되어 유대적 관습을 따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유대인이 아니어도, 더 나아가서 유대화가 되지 않아도, 예수를 믿을 수 있었다. 복음은 유대인 써클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그 써클 안으로 편입되는 것과 예수 믿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치열한 논쟁은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타결점을 찾았다. 베드로는 율법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행 15:10)라고 했고, 주의 형제 야고보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15:19)고 했다. 그리고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단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고 권고한다(15:20, 29). 즉, 이방인의 유대화를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도, 또 윤리적 기준으로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한 관행들을 내려놓고 단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15:19)만을 중요한 문제로 간주했다.
안식일 이야기를 이어가다 갑자기 할례 문제를 언급하니 의아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도행전 이후 이어지는 서신서에서 ‘안식일’ 또는 ‘첫날’의 주제는 초대교회의 할례 논쟁의 연장선에 있다. 할례 문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화되며 오히려 빨리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안식일 논쟁은 꽤 오래 이어진다. 바울의 서신에서 이 문제는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유대적 기독교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리고 복음의 본질에 대한 논쟁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의 집회
안식일 논쟁의 내용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날(day)에 관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지키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날에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이다. 세부 내용을 아래에서 차근차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초대교회에서 생겨난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명칭은 일찍이 사도행전 20장에 등장한다. 우리가 알듯이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도행전 12장까지는 그 주 무대가 유대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후 바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무대는 유대 지역을 넘어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넓혀진다. 사도행전 20장에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들렀던 드로아에서의 일화가 나온다. 드로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즉, 유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인의 도시다.
여기서 집회가 열린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두고의 이야기가 나온다(행 20:7-12). 창틀에 앉아 바울의 이야기를 듣다 졸았고,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그 청년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단서가 나온다. 그들은 그 “주간의 첫날”에 모였고, 모여서는 ‘떡을 떼었다’(행 20:7). 즉, 언제 모였는지에 대한 첫 번째 단서가 있고, 모여서 무엇을 했는지를 가리키는 두 번째 단서가 나온다.
먼저 날에 대한 문제를 보자. 개역개정 성경은 이 날을 “주간의 첫날”이라고 칭하고 있다. 다른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현재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 이전에 썼던 개역본을 보면 “안식 후 첫날”이라고 적고 있다. 표준새번역이나 새번역 등에서는 “주간의 첫날”로 되어 있다. 공동번역은 좀 더 명확한데, “안식일 다음 날”로 번역한다. 한국어 성경은 번역본에 따라서 ‘주간의 첫날’과 ‘안식 후 첫날’로 번역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루어진 번역본에서 ‘주간의 첫날’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와 독일어 성경을 보면 ‘주간의 첫날’로 번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헬라어 원문은 ‘사바톤’(Sabbatōn)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사바톤은 히브리어 ‘사밧’(Sabbat)을 헬라어화한 ‘사바톤’(Sabbaton)의 복수소유격이다. 번역이 갈리는 것은 헬라어에서는 외래어라고 할 수 있는 사바톤에 대한 번역의 차이다. 이를 주간(week)으로 번역하는 것이 현대의 추세이나 그 어원에서 보듯이 유대적·기독교적인 영향이 있다.
같은 표현이 요한복음 20:1에도 나온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하는데, 개역개정은 그 날을 ‘안식 후 첫날’로 명기하고 있다. 즉, 사도행전 20:7과 같은 어휘를 ‘주간의 첫날’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로 번역한다. 물론 여기서도 헬라어로 쓰여진 성경에서 특이하게 ‘사바톤’이라는 히브리어 외래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첫날’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의 특징인데, 이들은 요일의 개념이 없이 안식일을 기준으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등으로 불렀다. 즉, 이 표현은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직역한 표현이다.
‘안식 후 첫날’은 본래 요일을 지칭하는 유대적 표현이었으나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었다. 그 날은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에게는 다른 날과 구별되어 거룩해졌다. 그리고 점차 이방인들 사이에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표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방언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안식 후 첫날에 기독교인들이 모여야 할 신학적 근거는 분명했다. 또, 이 날은 유대교의 안식일과도 구별되어 디아스포라 기독교인의 집회일 명칭이 되었다. 모든 일과 행동을 쉬는 날로서의 안식일이 아니라, 함께 모여 떡을 떼며 예배하는 날로 새로운 날을 정한 것이다.
그들의 모임과 예배
그러면 이들은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 이들은 모여서 유대식으로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았다. 이들의 모임은 ‘떡을 떼는’, 의역한다면 ‘밥을 먹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이었다. 즉, 모든 것을 멈추고 쉬는 안식일의 개념도 아니었고, 회당에서처럼 말씀을 읽고 예배하는 안식일 예전을 행하는 날도 아니었다. 즉, 고린도전서 11장에 나타나는 것처럼 함께 식사를 하며 주님을 기억하는 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집회는 ‘떡을 떼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모여서 주인이 제공하는 빵과 물을 가운데 두고, 자신들이 각자 가져온 사이드 메뉴, 즉, 빵에 더하여 먹을 것들과 포도주 등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은 사람이 강론을 했다. 분위기로는 예식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임이었다. 식사 자리의 연장과 같았다.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것이 일반적인 로마인들의 모임 형식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유두고처럼 창틀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 떨어지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예식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다면 참여자가 이렇게 창틀에 걸터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정식 모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취해 있었다. 실은 이런 행동이 바울의 분노를 샀다. 하루 일을 마친 후에야 모임에 오는 가난한 자들이나 종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유로웠던 귀족들이나 부자들은 집회 에 일찍 모였다. 이들은 주인이 제공한 빵에 자신들이 챙겨온 고기와 햄 등을 얹어 잘 먹었다. 여기에 곁들인 포도주까지 거하게 마시고 나니 모임 시작 전에 취한 것이다. 뒤늦게 와서 이를 본 가난한 자들이나 종들은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온데간데없고, 먹고 즐긴 현장에 빵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고린도 교회가 좀 특이하긴 했지만 이런 것이 당시 집회의 모습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였다. 이런 자연스러운, 그러나 한편으로 부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말씀이 나누어졌다. 그 어느 곳에도 유대교의 흔적이나 유대식 회당 예식의 형식도 없다. 확실히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와는 완전히 구별된 신앙 모임을 가졌다.
그렇다면, 안식 후 첫날, 주간의 첫날은 확실히 유대인들의 안식일과는 구별된다. 형식도 다르고 모이는 시간도 다르다. 특히 바울은 종종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곳에 기독교인들이 모였다는 말은 없다. 즉,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그 장소와 때에 찾아간 것이지, 안식일에 기독교인의 집회를 위해 회당에 간 것이 아니다. 이방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바울과 연관된 기독교 공동체들은, 안식일과는 구별된 집회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이었다. 집회의 날짜와 시간은 로마 사회의 일반적 형편에도 맞추어 그들과 시간의 사이클을 맞추며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디아스포라 상황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된 그들이 모이기에 좋은 날에 모였을 것이다. 그날이 바로 일요일이었고, 안식일과 연관한다면 ‘안식 후 첫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확실히 그 당시 유대인이 주축이 되었던 예루살렘 중심의 기독교에 충격을 주었다. 이방 기독교인의 유대화를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보았던 유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안식일 규정이 부정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자였던 예수의 후예들은 오히려 이 유대적 관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피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확실히 기존 유대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형식에 기반을 둔 기독교와도 확연히 결별하게 된다. 오히려 이를 통해 복음의 선명성을 드러내고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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