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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는 ‘기쁠 환’(歡)과 ‘기다릴 대’(待)가 결합한 말로, 타인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감정적 태도와 한결같이 기다려 주는 의지적 태도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 상대의 존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진심’(眞心)과 한결같이 받아들이는 ‘지심’(至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를 넘어, 오늘날의 시대정신 속에서 교회의 네 가지 본질인 케리그마(복음 선포), 디다케(가르침), 코이노니아(교제), 디아코니아(섬김)는 ‘환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전유되어야 합니다.(본문 중)
박형순(평화교회연구소)
일반적으로 우리는 ‘환대’를 어떤 존재든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더욱이 ‘신앙 공동체’에서 서로를 환대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환대’라는 한자어의 뜻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대는 ‘기쁠 환’(歡)과 ‘기다릴 대’(待)가 결합한 말로, 타인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감정적 태도와 한결같이 기다려 주는 의지적 태도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 상대의 존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진심’(眞心)과 한결같이 받아들이는 ‘지심’(至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환대를 현실로 이어 가려면, 다소 진부해 보일지라도 다시금 교회의 본질을 기억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를 넘어, 오늘날의 시대정신 속에서 교회의 네 가지 본질인 케리그마(복음 선포), 디다케(가르침), 코이노니아(교제), 디아코니아(섬김)는 ‘환대’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전유되어야 합니다.

신적 환대로서의 케리그마(κῆρυγμα, 복음 선포)
기독교적 환대를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은,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환대하셨다는 복음, 곧 케리그마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 곧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환대의 출발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환대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 이전에, 이미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신적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존재라도 환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신의 환대를 받은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오늘날 사회와 교회를 병들게 하는 ‘혐오’는 내면의 혐오에서 시작되어 관계적·공동체적 감정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그렇기에 타자를 환대하는 일은 단순히 올바름에 대한 당위만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혐오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에 발생하는 중대한 신앙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혐오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감정이 아닙니다. 혐오할 수 있는 자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혐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산물이며, 이는 명백한 죄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에는 신앙으로 둔갑해 자행되기에 치명적인 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타자를 환대하는 것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지키는 가장 본원적인 신앙 실천입니다.
상호 배움의 환대, 디다케(διδαχή, 가르침)
일반적으로 디다케는 초대교회의 열두 사도가 교인들을 가르쳤다는 말씀에서 비롯한 개념입니다. 가르침은 성도로서의 교육과 배움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동시에, 공동체의 권위를 세우는 차원에서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환대의 정신 속에서 디다케는 주체와 객체의 ‘평등’을 전제한 ‘상호 배움’으로 새롭게 전유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 혹은 직분에 따라 관습적으로 작동하는 인위적인 권력과 위계를 점검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부재를 감각하는 환대,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교제)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동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어울리는 본능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참된 환대의 교제는 서로가 ‘다르다’는 명확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름’은 무엇일까요? 존재의 다름을 인식하는 데에도 무척 다양한 층위가 있습니다. 단지 취향이나 성향이 다른 것, 취미나 기호가 다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한 존재가 타자에게 느끼는 ‘다름’에는 연약함, 부족함, 결격, 하자, 장애, 없음 등으로 인식되는 다름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분명 구성원 사이에 다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잃어버린 다름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코이노니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없거나, 있어도 없는 것처럼 존재합니다. 환대의 코이노니아는 바로 그 ‘부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다름을 더 이상 문제로 여기지 않는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 그러한 다름으로 더 이상 서로를 구분 짓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며 기꺼이 함께 교제하는 것, 함께함에서 오는 불편함마저 스스로 기꺼이 감당해야 할 ‘기다림’(환대는 곧 기다림이므로)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야 할 환대의 코이노니아입니다.
‘서로-주체’적 사회 선교로서의 환대,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봉사)
디아코니아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교회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 곧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환대의 디아코니아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그간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자리매김해 왔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오해, 혹은 반대로 교회가 타락한 세상을 일방적으로 정화해야 한다는 오해는, 교회가 세상으로 올바르게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교회는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 교회는 사회 속에, 사회는 교회 속에 서로 머물러 있다는 인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교회와 사회를 둘로 나누는 틀 속에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홀로-주체’적 인식을 넘어, ‘교회가 곧 사회이며 사회 또한 일종의 교회’라는 ‘서로-주체’적 인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곧 사회를 사회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나누는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에서도 공유되어야 합니다. 사회 속 고난받는 이들을 향한 환대는 신앙이 성장한 뒤에 맺는 자연스러운 열매나 여분의 일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모인 공간을 넘어, 일상과 사회 곳곳에 박혀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은 환대하며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환대로 가득한 케리그마, 디다케,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는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만드는 본질적 존재 양식입니다. 오직 환대하는 삶을 현실에서 치열하게 실현할 때만, 교회는 자신의 교회 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의 또 다른 이름은 ‘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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