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여성이 진정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면,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언어화하여 자기 이해를 형성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정치적 목적에 그 경험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자기 이해를 기반으로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할지 혹은 하지 않을지는 여성 개인의 선택이다. 기독교인들은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하나가 이제 낙태가 되었으며,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앞으로 찾아가야 할 과제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지난번 글에서 낙태는 성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을 논하였고, 그래서 한국 성문화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박완서의 소설을 예로 제시했다. 좀 오래된 소설이기는 하지만, 성을 대하는 문화적 패턴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택한 작품이다. 이처럼 낙태를 생명 관점이 아닌 성과 연관 지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연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접한 생명론의 추상성과 선별성 때문이다. 생명을 추상적으로 대한다는 말은, 뱃속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이미 사람이 되어 나온 사람들, 그리고 그 생명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그 소중함이 연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달리 말해,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외치는 것은, 이론으로만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살과 뼈를 갖춘 생명을 대하는 자세는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기독교에서 ‘이웃’의 정의는 매우 포괄적인데, 내가 잘 아는 나 자신부터 말도 섞지 않을 사람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또한, 뱃속의 태아가 지켜야 할 생명이라면 유산이나 사산의 경우에도 생명의 상실로서 마땅한 애도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도, 생명의 문제를 추상적으로만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생각한다.
생명을 선별적으로 대한다는 말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형 제도나 전쟁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경우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낙태를 반대하면서도 장애아 감별 낙태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말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임신을 하는 것은 부도덕하게 보면서도 그 임신이 낙태로 이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정해진 수순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결국 생명론의 입장에서 낙태를 반대할 때, 그 생명은 모든 생명이 아니라, 정상적인 결혼 관계에서 정상아로 임신된 태아에 국한된 생명이고, 그런 점에서 선별성을 보인다는 뜻이다. 즉, 모든 생명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 존중 받을 만하다고 판단되는 생명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택적 생명론은 인간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낙태에 대해서는 입이 아닌 발을 따라가 봐야 한다’라는 말도 있는데, 말로 낙태를 반대하는 것과 실제로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우 이러한 비일관성은 이해할 수 있지만, 남자들이 보이는 비일관성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입으로는 낙태를 반대하면서 정작 여자 친구나 아내에게 낙태를 종용하는 것은 매우 위선적인 태도로서, 여성의 의사결정권과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자만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비겁하고, 심지어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태도이다. 낙태를 좋아서 하는 여성은 없으며, 그에 대한 모든 신체적 심리적 후유증은 여성이 고스란히 안게 되는 상황에서 (물론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서 남자도 심리적 후유증을 겪을 수 있다) 남자들의 섣부른 발언은 되도록 자제하는 게 좋다고 본다.
낙태를 생명 관점이 아닌 성과 연관해서 이야기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생명에 대한 이러한 선별적 태도와도 연관이 있는데, 이 글의 제목이 말하듯 낙태 문제는 어떤 관계에서 생긴 어떤 생명을 존중할 것인가를 둘러싼 싸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국가, 교회, 그리고 여성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겹치기도 하고 갈리기도 하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중첩적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한다.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번에 낙태죄가 폐지된 것은 낙태가 비범죄화되었다는 말로서, 낙태로 인한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래서 낙태가 자유로워졌다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법 개정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낙태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무엇인지가 좀 더 분명해지리라 본다. 일례로, 서구보다 앞선 1948년부터 낙태를 비범죄화한 일본의 경우, 낙태가 허용되는 예외 범위는 넓지만 여전히 낙태가 불법이라는 기조는 유지하고 있다. 또한, 낙태를 원하는 여성에게 형식적이나마 남성 파트너의 동의서를 요구하고 있어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 관점에서 낙태가 허용되는 것이라 보기 힘들다.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단지 낙태가 가능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의 하나로서 보장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그동안 낙태를 묵인해왔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갈린다. 그럼 먼저 그 두 관계부터 설명을 해보겠다. (이어지는 아래 내용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은 제도 페미니즘을 일컬으며, 이 그룹이 반드시 ‘여성을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한국에서 그동안 낙태가 묵인되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구 조절의 목적으로 낙태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산아를 제한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었을 때는 낙태에 대한 묵인은 물론이고 무료 불임시술까지 이루어졌다. 남편이 정관 수술을 하면 하루 휴가를 준다고 해서 회사를 하루 빠지고 성경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정관 수술을 하는 바람에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만큼 한국의 산아 제한 정책은 공격적이었는데, 그러다가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 재생산에 문제가 생기자 낙태를 규제하기 시작했고, 불임 시술은 비싸졌다. 서구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낙태권의 쟁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정책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페미니스트 낙태 담론이 부재했던 이유는, 이처럼 인구 정책과 맞물려 여성들에게 낙태에 대한 큰 제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보수적인 성문화로 인해서 여성들이 피임에 대한 지식이나 교육을 접하기 어렵고 남성에게 피임을 요구하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이러한 낙태에 대한 접근성은 여성들이, 비록 인구 정책이라는 명목하에서나마, 행사할 수 있는 자기 몸에 대한 (건강을 담보로 한) 최소한의 통제력이기도 했다.
오늘날 페미니즘 진영에서 낙태권은 재생산권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생명옹호론 대 선택옹호론이라는 단순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넘어서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처럼 산아 제한이나 출산 장려와 같은 국가의 정책에 따라 여성의 몸이 도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즉,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시민으로서 여성에게 보장해야 하는 기본권의 하나라는 의미에서 ‘재생산 건강권’이라고도 하고, 그동안 이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재생산 정의’라고도 한다. 이 권리는 여성의 결혼 여부, 출산 여부, 그리고 장애 여부나 성적 지향성과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여성 누구에게나 건강권으로서 보장되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이다. 즉, 언제 어떤 여성이 어떤 식으로 어머니가 되거나 되지 말지는 여성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 국가가 강제할 일은 아니며, 따라서 여성의 재생산 기관과 관련된 건강권은 모성과 무관하게 모든 여성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와 페미니즘의 이해관계가 갈리는데, 국가가 낙태죄를 폐지함으로써 여성의 몸을 국가의 필요에 따라 도구화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국가는 건강한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려 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성도덕의 규범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생학적 관점과 이성애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상 가정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인정하려 한다.
국가의 우생학적 관점은 낙태 허용 사유에 우생학적 혹은 유전학적 정신 장애나 신체 질환이 부부에게 있는 경우를 포함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성애 부부 중심은 난임 치료 지원 정책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는데, 국가가 여성들의 아이 낳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보조생식술을 통한 난임 치료를 지원하지만 그 여성은 아무 여성이 아니라 법적 부부 관계에 있는 여성이다. 따라서 여성이 홀로 정자 기증을 받아 아이를 낳는 것은 직접적인 법적 금지는 없다 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이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혼인 여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는 최근 방송인 사유리의 임신 및 출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생학과 성 규범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그러나 일정 부분 자기 문화에 의존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은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데 국가가 일방적으로 장애인의 재생산권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차별과 편견은 존재한다. 이는 법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음에도 소위 기형아 검사라고도 불리는 산전 검사를 통해 낙태가 이루어졌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즉, 국민 구성원들 자신도 장애아를 낳기를 원하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일부 생명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법으로도 금지되는 기형아 검사에 기반한 낙태를 실천적 차원에서도 반대해온 것은 그런 점에서 반문화적인데, 그렇다고 장애인에 대한 불임 시술을 반대하거나 장애 여성의 재생산 권리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회의 이해관계와 국가의 이해관계는 어느 정도 일치해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산아 제한 정책이 한창이던 때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양적인 차원이 아닌 질적인 차원의 번성으로 해석하여 가르침으로써 국가의 정책에 동조하는 시민 양성에 기여한 바 있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박완서 소설에서, 낙태를 위해 산부인과 병원을 찾는 단골과 교회를 찾는 여성들의 인구가 겹친다는 설정은 그러했던 현실의 반영이라 하겠다. 한편, 페미니즘 입장에서 주장하는 재생산권은 장애 여성에게도 재생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 재생산권은 임신을 중지할 권리, 즉, 낙태도 포함하는 것이어서, 교회나 국가와는 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이자면, 우생학 관점의 낙태가 일찍부터 허용된 일본의 경우는 1970년대부터 장애인 인권 운동이 성장하면서 페미니스트 낙태 담론이 위축되었다고 한다. 서구 사회보다 빨리 낙태가 허용된 상황에서 도입된 산전 검사는 장애 태아의 낙태를 쉽게 만들면서 우려를 낳았고, 장애인 인권 단체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주장을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보면서 “내면화된 우생학주의”(internalized eugenicism)라고 비판했다고 한다.1)한국의 경우 장애인 인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동시에 지키는 것이 페미니즘 진영의 지향이지만, 이미 산전 검사를 통한 장애 태아 낙태 관습이 자리 잡은 문화에서 어떻게 그것을 실천적으로 이루어갈지는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한편, 성 규범 혹은 성도덕에 있어서도 국가와 교회의 이해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잠시 설명하자면, 서구 사회의 경우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일어나는 중에도 여전히 국가는 가정 윤리와 성 윤리에 있어서는 기존의 기독교 규범을 따랐는데, 나라별로 지배적 종교 전통에 따라서 이슬람교 혹은 유교 등이 성 규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의 경우 유교의 성 규범을 여전히 따르고 있지만, 그 규범을 대변하는 집단이 교회로 바뀌었고 시민 활동도 유교의 이름이 아닌 교회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성 규범의 문제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 문제로 여겨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재생산권을 이성애 관계 및 기혼 여성 중심으로 접근하는 부분에서도 국가와 교회는 이해관계를 같이 했는데, 시민 세력으로서 페미니스트와 성 소수자 집단이 성장하면서 성 규범을 둘러싼 국가와 교회의 이해관계가 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민주주의의 적법한 절차를 거쳐 결정되는 일들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결정들이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수해 온 성 규범과 어긋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재생산권은 성적 자기 결정권2)과 분리된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성애 결혼 관계에만 성관계를 국한해온 교회로서는 단지 세속적인 세태 변화만이 아닌 국가 차원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갈수록 정치의 광장으로 몰려가는 것도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
낙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큰 그림을 제시하는 이유는, 이미 낙태가 그만큼 정치화된 이슈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처음부터 성 문제가 매우 정치적인 문제임을 표명해왔고, 따라서 섹스의 결과로 여성의 몸에 생기는 일도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정치적이었던 문제를 사적인 일로 치부해온 것이 문제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낙태를 반대하든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든, 그것은 ‘그냥’ 사적인 발언이나 신념의 문제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오히려 실제 낙태를 경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잠식시킨다는 우려가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일찍 낙태가 정치화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부 제기되고 있다. 정치화된 담론의 문제는, 개인의 사정에 따라 낙태를 하게 되는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정치적 언어에 국한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낙태 행위가 페미니즘을 대변하는 행위로 환원됨으로써 개인의 경험은 상실되고 따라서 개인도 상실된다. 반대로, 자신이 낙태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오직 교회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신앙의 행위로만 설명된다면, 이 또한 빈곤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한 여성이든 아니든,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고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보는 순간은 머리가 아찔한 순간이다. 이미 세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분이 넷째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 ‘아이고 하나님, 아이를 기다리는 다른 집으로 보내시지 왜 나한테 보냈어요’라고 한탄을 하면서 어떻게 자연적으로 해결되기를 기도했는데, 다행히 초기 유산으로 지나갔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낙태인가, 유산인가? 오늘날처럼 뱃속을 들여다보는 기계가 있기 전에는 임신한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는 때는 보통 태동이 있을 때였고 (생리는 불규칙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출산을 조절하려는 여성에게 낙태와 유산의 경계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는 유산이어서 다행으로 끝난 일이 누구에게는 낙태라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은 정치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경험이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플러그를 뽑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을 넘어서는 결과를 놓고 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고독한 시간인지는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경험을 페미니즘 입장이든 교회의 입장이든 정치적 결정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여성의 경험을 도구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으로서 여성이 진정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면,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제대로 언어화하여 자기 이해를 형성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정치적 목적에 그 경험을 동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자기 이해를 기반으로 어떤 정치적 행동을 할지 혹은 하지 않을지는 여성 개인의 선택이다. 기독교인들은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하나가 이제 낙태가 되었으며,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앞으로 찾아가야 할 과제이다. 다음번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의미 구성을 위한 시도로서 낙태 서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Ayako Kano, Japanese Feminist Debates: A Century of Contention on Sex, Love, and Labor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 86쪽에서 재인용.
2) 성적 자기 결정권은 성행위에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리만이 아니라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성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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