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찾아지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순간에 섣부르게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참고 견디면 은혜가 있을 것이다.’ 라는 말은, 부끄럽고 외람될지 모르지만 도움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더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순간순간 고통이 찾아오는 그 시간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노력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나의 실수나 잘못으로 생긴 고통, 외부로부터 비롯된 고통,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억울함, 외로움, 불안, 억압 등의 고통 속에 있는 이웃에게 우리는 어떤 말과 행동을 취함으로써 좋은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고통은 결코 개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악과 죄로 물들어 있는 우리 사회는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는 조화로운 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샬롬은, 평화를 넘어서 본질적으로는 어려움과 적의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전폭적인 충만함과 조화루움,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바로 샬롬입니다.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어그러져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지금 내 곁의 이웃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호소하고 있는 얼굴들에게 다가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응답을 실천할 수 있기를, 나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글 김현아 사무국장
지난 4월 말, 기윤실 좋은사회포럼이 진행되었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좋은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 살펴보고 고민하는 시간었습니다.
포럼의 기획단계에서는 가장 먼저 ‘좋은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세상에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정의’를 기반으로 ‘샬롬(평화)’을 일구어가는 것이 좋은사회를 만들어가는 방향이며, ‘고통’의 문제는 개인적 선의와 호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권리가 약자의 권리를 지키고 생(生)을 버티게 하는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모았습니다.
월터스토프는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때까지>에서 “정의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와 각각의 존재들에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정과 평등의 감각으로 빈곤, 갈등, 차별, 억압, 자연훼손,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을 해결해야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로부터 그 문제를 들여다볼 때 실제적이고 정당한 정의론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기윤실은 먼저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이후로 달라진 삶 속에서 경제적, 정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부천에서 카페를 운영하다 코로나19 방역지침으로 운영에 직격탄을 입은 청년소상공인, 항공산업 위축으로 부당해고를 당해 고용노동청 앞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들, 이동권과 건강권, 돌봄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해 감염 예방과 자가격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애인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당하고 비난 받으면서도 고된 노동과 차별을 감수해야 했던 외국인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얼굴과 목소리’를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결코 알기 어려운, 감추어지고 들려지지 않았던 깊은 사연들이었습니다.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와 나에게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고 나에게 이미 주어진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들 앞에서 선 제 모습이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일상적으로 출근할 일자리에서 정기적으로 정당한 급여를 받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을 수 있고, 스스로 자가격리를 할 수 있으며, 신분증을 갖고 있으면 공적마스크를 구매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는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불편을 감내해야하고 간절히 바라는 일상이었습니다.
포럼 당일에는 숭실대 교수이자 기독교윤리연구소 소장 성신형 교수께서 ‘타인의 고통과 기독교윤리’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과연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 다양한 이유로 찾아오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이웃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고통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해석하고자 했던 틸리히와 레비나스의 이야기로 풀어주셨습니다.
틸리히는 비존재의 힘(=악)은 이 세계에 늘 있어왔고 존재를 존재하지 않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 악에 지지 않는 방법은 이 세계에 존재하면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누르고 죽이려고 하는 비존재의 힘에 대항해 버티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라고 말합니다. 존재가 이 세계에서 살아 남는 것이 중요한데, 자기를 인식(self-awareness)하면 창의적 생각(self-creativity)이 가능하고, 살아가면서 자아는 타인과 통합하려는 시도(self-integration)를 통해 윤리가 발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끊임없이 비존재의 힘에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며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며 고통을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레비나스는 세계 1차대전 상황에서 떠돌아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기 동족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전쟁 동안 철학은 왜이렇게 무기력 했을까 하는 질문하게 되면서 철학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고통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에 대답하려 했습니다. 레비나스는 ‘얼굴의 호소’를 강조합니다. 독일 군인들이 수용소에 끌려가는 유대인들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봤다면, 그들의 호소를 들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Responsibility(책임)은 respond + ability로, 대답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타인의 얼굴의 호소에 대답하는 능력을 키울 때에만 고통은 발생하지 않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스스로 대답할 할 수 있는 존재를 레비나스는 ‘윤리적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에의 참여를 통해 우리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의미있으려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견디겠다는 용기, 새로운 존재와의 만남입니다. 그 새로운 존재는 고통을 새로운 가능성(대속)으로 바꾸어 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존재의 힘에 저항하며 끝까지 버팀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레비나스는 고통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얼굴’은 상처받기 쉽고, 호소합니다. 고통은 당하는 것이기에 수동적인 것이지만, 그 고통의 호소가 누군가에게 들려질 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 고통은 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가 닿습니다. 그 호소를 들은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얼굴에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호소하는 얼굴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본회퍼는 “고난 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웃들의 인터뷰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던 부끄러움과 시선의 전환이 그러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고통은 결코 개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악과 죄로 물들어 있는 우리 사회는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는 조화로운 상태를 잃어버렸습니다. 샬롬은, 평화를 넘어서 본질적으로는 어려움과 적의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전폭적인 충만함과 조화로움, 즐거움과 풍요로움이 바로 ‘진정한 샬롬’입니다.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어그러져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지금 내 곁의 이웃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호소하고 있는 얼굴들에게 다가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응답을 실천할 수 있기를, 나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고통이란 인간이 자신의 실존(고통)의 자리를 넘어서(to cross)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매개로 무한의 자리를 넘어서(to cross) 인간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이러한 넘어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에서 완성되었다.
<참여와 책임-틸리히와 레비나스의 윤리적 대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