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역사적으로도, 전염병이 돌았을 때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처럼 외면당하고 부흥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아니, 모든 종교를 통틀어도 이러한 사회적 위기, 팬데믹의 위험 속에서 한 종교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본문 중)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기윤실 공동대표)

 

세속화된 사회에서 맞는 팬데믹과 한국 교회

 

21세기 첫 팬데믹이 찾아왔다. 스페인 독감 이후 100여 년 만이다. 이제 세상은 완전히 세속화되었다. 이전 사회에서처럼 종교가 인간의 삶과 사회의 모든 부분을 책임지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학이 발달하였고, 정부는 종교와 철저히 구분되었다. 사회는 다원화되었고, 종교적 의미 부여나 주술은 필요가 없다. 심지어 코로나 시대에는 종교가 코로나 방역에 걸림돌이 되었다. 바이러스가 옮아가는 비말 전염 통로를 차단해야 하므로 사람들이 모여서는 안 되는데, 종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는, 여러 우려 가운데서도 모였다. 특히, 불교나 천주교가 코로나19가 확산되던 2020년 초에 이미 모임을 폐했던 것에 비해, 기독교는 모임을 고집하며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숨기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모임을 유지하며 정부의 방역 정책과 국민 정서에 반하여 ‘순교적 각오’로 대응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사회의 반감, 더 나아가서는 혐오를 불러왔으며 기독교는 위기에 처했다. 사람들의 혐오도 무섭지만, 교인들의 실망감, 그리고 이어지는 탈교회 현상이 무섭다.

아마 역사적으로도, 전염병이 돌았을 때 교회가 사람들에게 이처럼 외면당하고 부흥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으로 빠져들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아니, 모든 종교를 통틀어도 이러한 사회적 위기, 팬데믹의 위험 속에서 한 종교가 위기를 맞이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한국 사회가 종교를 바라보아 온 관점은 주로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다. 간단한 예로서 ‘호국불교’와 같은 키워드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로부터 종교에 관해 배우기 시작한다. 거기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 승려들이 승병을 꾸려서 외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럴 때 나오는 단어가 ‘호국 불교’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종교를 보는 것이고, 좀 더 나아가면 전체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신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적 종교이다. 특히, 칼뱅주의 입장에 서 있는 한국 개신교는 더욱 개인의 선택과 의견을 중시한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칼뱅주의에 속한 교회들은 트뢸치의 분류에 따르면 ‘교회 유형’(church type)에 속하지 않고 ‘종파 유형’(sect type)에 속한다는 점이다. 즉, 국가 교회나 국민 교회의 형태가 아니라 개교회가 중심이며, 개인의 선택을 더욱 중시한다. 이 전통은 국가나 사회와의 관계에서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한다. 한국 교회의 근저에는 이러한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는 그 역사가 짧다. 개신교 자체의 역사도 짧지만, 한국에서의 교회 역사도 짧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사회의 주류였던 적이 없었으므로, 사회에 대한 책임보다는 사회 안에서 존속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경향이 그 숫자가 미미했던 초기보다 한창 부흥했던 70년대와 80년대에 더욱 강해졌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 교회와 사회는 여러 지점에서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국가주의를 중시하는데, 기독교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가치관이나 성향이 전혀 달랐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현재의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사태 안에서 한국 교회는 두 가지를 고려했어야만 했다. 첫째는, 이 사회가 세속화된 사회이고, 다원화된 사회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 사회가 종교를 국가주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는 이런 측면들을 인식하며 코로나19 사태 가운데서 교회의 입장을 취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미숙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요구를 밀어붙이려 했다. 결국 이런 태도가 사회와 충돌하며 파열음을 내었고, 현실에서도 적지 않은 감염자를 내면서 사회적 지탄을 초래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나타난 한국 교회의 민낯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이 사회와 부닥친 부분들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한국 교회의 정치화와 보수 정치의 과잉 대표성이었다. 현실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두고 선동이 이루어졌고, 차별 금지법 반대로 정치적 행동의 불을 붙였다. 일부에서는 점점 극우 성향이 나타났다. 청와대 앞에 천막 교회가 서고 광화문에 십자가가 내걸렸다. 지방에서는 교회들이 조직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매주 광화문으로 올라왔다. 결국 전광훈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냈고, 많은 신자들이 그의 추종자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들은 방역 문제를 정치 문제로 이해했다. 최근에도 몇몇 교회들이 교회발 전염을 일으키고도 반성보다는 정권 비판에 열을 올렸던 일이 있다. 결국 이 문제는 8·15 광화문 집회를 정점으로 폭발했고, 사랑제일교회에서 나타난 집단 감염은 한국 교회 전체를 나락으로 이끌었다.

 

 

과연 한국 교회가 방역 당국의 권고를 거부하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정치 세력화한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 우리가 얻은 것이 있었을까? 오히려 전염병이라는 위기에 함께 대처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오명만 얻게 된 것 아닐까? 결국 이 사회에서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집단으로 낙인찍히기를 자초한 것은 아닐까? 한국 교회는 이 상황에서 ‘기독교=전광훈=극우=광화문’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최근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 정치권은 극우 광풍 시기를 지나 국민 정당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며 이미지 쇄신을 추구하고 있고, 또, 그것이 성공적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만 이런 방향을 포기하지 못하고 나아가다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철퇴를 맞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으로,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보수 정당에게서 배워야 할 바가 있다고 본다.

둘째는, 다양한 소영웅들의 창궐이다. 2020년 8월 사회가 경악하는 일이 있었다. 종교별로 종교 단체 대표들을 대통령이 만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한교총 대표인 김태영 목사가 대통령 면전에서 기독교의 입장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일견 맞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언론에 보도된 것은 ‘반발’이었다. 구체적으로 그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이 ‘특정 교회’라고 했지만 교계 지도자들 앞에서 방역 상황에서 기독교의 태도를 꾸짖는 형태가 되었고, 이에 지지 않겠다는 태도로 김태영 목사가 ‘그래도 우리는 예배로 모일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자리는 국민통합의 차원에서도 서로 덕담이 오가야 하는 상황이다. 공개적인 자리였고, 언론을 위시해서 국민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중간에 소통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면 김태영 목사가 소영웅심으로 청와대에서 큰 소리를 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건 한 예이고, 광화문 광장에 섰던 여러 목사들, 자칭타칭 교계 지도자라고 하는 분들이 했던 발언에서 사용한 언어들을 보면 수위를 넘는 것들이 많았다. 방역 문제로 언론 앞에서 목소리를 낸 목사들의 태도나 발언들도 수위를 넘었다. 어떤 대형 교회 목사는 선글라스를 끼고 단상에 올라서 나라 구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며 극우적 선동을 해댔다. 대표되는 한 목사는 대통령을 향하여 “끌어내려야 한다”, “개자식”이라는 쌍욕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주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는 교회발 집단 감염이 일어난 후, 대면 예배 금지에 반발하며 ‘위헌’이라는 말도 하고, ‘하나님이 더 복을 주시려고 주는 훈련’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정제되지 않는 언어들과 발언들을 조정해야 한다. 자신들의 발언이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발언으로 인해서 시험 드는 우리 교인들을 생각해서라도 멈추어야 한다.

셋째는 우리 내부의 불건전한 소통 방식이다.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가 카톡교가 되었다. 카톡을 통해서 그룹 지어지고, 각종 유언비어가 소비된다. 교회의 조직이 유언비어의 온상이 되었다. 얼마 전 정치적 유언비어의 진원지가 한 선교 단체였다는 보도가 있어서 크게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당시 기자는 그 단체를 언급하며 ‘동성애 난민 혐오 가짜뉴스 공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만들었다. 기사는 인터넷의 연결망 분석을 통해 결과를 도출했다. 그 결과 기독교의 환경 속에서 이 선교 단체의 유언비어가 과장되어 전달되고, 증폭된 것들을 증명했다. 또, 최근에도 백신과 ‘짐승의 표’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기도 했다. 백신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표인 666이라는 것이다. 백신이 유전자 조작을 일으켜서 어느 세력에 속하게 된다는 허황된 이야기이다. 그 외에도 정치적인 것이나 반사회적인 내용이 카톡을 통해서 전파된다. 매우 불건전한 집단에서나 나타남직한 각종 유언비어들이 기독교인들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확대 재생산되어 동력을 얻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결국, 교회가 거짓 뉴스의 근원지가 되는 부끄러운 상황이 되었다.

 

결론과 제안

 

한국 교회의 특징은 개교회주의에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이런 부분은 현저히 드러나는데, 팬데믹 상황에서 더 두드러졌다. 비교할 수 있는 천주교나 불교는 방역 상황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문을 닫았고 정부의 방역 권고를 잘 따랐다. 그런데 개신교는 연합기관이나 교단의 입장이 있어도 개별 교회로 잘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 많은 교회들이 자신이 속한 교단의 입장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중에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대부분 교회들이 방역 지침을 지키며 교인들을 전염병에서 보호하려 노력했지만, 곳곳에서 구멍이 드러났다.

그러면 개신교회의 구조가 문제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신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는 너무 소중하다. 이에 근거한 개인적인 신앙 고백들, 그리고 개교회 중심주의는 500년의 역사 가운데 우리가 소중히 이어온 전통이다. 우리는 이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고, 교리나 전통보다도 개인적 신앙 고백과 개교회의 공동체를 더 소중히 여긴다.

문제는 합리성이다. 개신교는 이성에 근거한 종교 생활을 근본으로 삼아왔다. 말씀을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개인의 결단과 헌신을 중요시해 왔다. 그래서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다. 다른 누가 제사장으로 우리를 대신해 주고 우리는 그에 순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신의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구에게 종속된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제사장이 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흩어진 개인들이 합리성에 따라 함께하는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집단의식이 아니라 각 교인들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하나임을 인식하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는 이 부분에서 부족함을 보였다. 합리적이기보다는 점점 더 선동이 난무하는 집단적 히스테리의 모습을 나타냈다. 광기가 난무하고 폭력이 자행됐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의 모습이 한국 교회에서 보인다. 이런 폭력적 모습은 이번 팬데믹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사회와 소통하지 못했고, 우리를 이해시키지 못했다. 특히, 세속화된 상황에 맞는 변증이 부족했고,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는 대응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종교적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정치 집단으로 각인됐다. 결국 이웃을 향해 십자가가 아니라 칼을 들이미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우리가 이 시대와 이 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 지혜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연속토론회 – 시즌2>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교회의 민낯, 외부의 시선으로 성찰하다.”

기윤실은 지난 4월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시즌1 토론회를 “코로나가 드러낸 한국 교회의 민낯, 정직하게 마주하고 아프게 성찰하다”라는 주제로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 토론회를 통해 코로나19 집단감염을 통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교회들은 개신교 내에서도 비판을 받던 일부 교회지만, 그들이 그러한 집단감염을 일으키게 된 왜곡된 신앙의 양태는 한국 교회 전반에 퍼져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한국 교회 전반에 퍼져있는 왜곡된 신앙을 개혁하지 않으면 이 사회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음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6월 한달 간 매주 월요일마다 <코로나19와 한국교회> 시즌2 토론회를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교회의 민낯, 외부의 시선으로 성찰하다”라는 주제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연속 토론회 시즌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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