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일을 할 때 찾아오는 기쁨의 맛을 아는 사람, 그렇지 못할 때 침울해지고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올바른 길을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한 마디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한다. 『레미제라블』 1부 1권 1장의 제목이기도 한 이 표현은 원래 미리엘 주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에는 올바른 사람 미리엘 주교를 만나고도 사력을 다해 저항했던 장 발장이 어느새 주교와 같은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장 발장이 빠진 딜레마

 

마들렌 시장이 된 장 발장에게는 두 가지 신조가 있다. 하나는 이름을 감추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혼을 성화하는 것. 즉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신조가 충돌하는 경우, 그는 한결같이 두 번째 신조를 지킨다. 덕행을 위해 안전을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주교의 촛대를 간직하고, 주교를 위해 상복을 입고, 굴뚝청소부 소년이 지나가면 모두 불러서 물어보고, 가족들에 관해 알아보고, 자베르가 자신을 의심하는 줄 알면서도 포슐르방 영감의 목숨을 구해 준다.

그러던 중 마들렌 시장은 샹마티외라는 좀도둑이 장 발장으로 지목되었다는 말을 자베르에게 듣는다.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단순했다. “달려가서 자수하고 그 샹마티외를 감옥에서 꺼내고 내가 감옥에 갇히자.” 날카로운 고통과 함께 마음을 정한다. 그것은 이후 이어지는 씨름과 고뇌의 시작일 뿐이었다. 곧 자기보존 본능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그는 재판정으로 달려갈 마차를 새벽에 집 앞에 보내달라고 예약한다. 그리고 심각한 고민이 이어지면서 그는 “머리가 타는 듯”했다. 운명의 장난에 엉뚱한 사람이 구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오려면 다른 누군가가 거기에 빠져야만 했다. 장 발장이 무슨 일을 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이 모두가 그와 별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되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가슴 졸이던 시절은 끝났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이제 살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안도감과 더불어 거북함과 불편함이 찾아온다. 그에게는 자기 정당화가 필요하다. 가장 확실한 정당화의 근거는 물론 신이다. “누구한테 불행이 온들 그것은 추호도 내 탓이 아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주님의 뜻이다! 주님이 정하시는 것을 방해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자신이 오랜 세월 열망해 온 목적인 일신의 안전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도왔던 그 오랜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마음을 굳게 먹기만 하면 된다. “만사는 이미 결정이 내려졌다. 되어 가는 대로 두면 된다! 천주님의 손에 맡겨두자!”

그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고, 이제 결심은 섰다고 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런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 된다고,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맡겨두면 된다고 스스로 다독여보지만, 이야말로 끔찍한 일임을 자신이 잘 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전부 다하는 것”이었다.

두 신조가 다시 충돌하고 있었다. 자기보존, 일신의 안전이 영혼의 성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는 샹마티외가 장 발장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벌을 받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삶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과거에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열고 있었다. 도둑이 되고 살인자가 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존, 생명, 평화를 빼앗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마음을 정리한다. “자수하고, 그토록 비통한 오류의 희생양이 된 그 사나이를 구출하고, 내 이름을 밝히고 의무를 다하여 다시 죄수 장 발장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 부활을 성취하고 자기가 벗어난 지옥의 문을 영원히 닫는 일”이 될 터였다. 그는 “최대의 희생, 가장 비통한 승리,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걸음”을 내딛기로 한다. 치욕을 당하고 영혼을 건지기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가 시장으로 있는 도시 전체가 그 덕분에 수많은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잡혀서 떠난다면 그곳은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팡틴과 코제트.

이것은 도무지 부정하기 힘든 강력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 도둑놈, 부랑배가 분명한 놈이 있다. 억울한 점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다. 그런 놈을 형벌에서 구출하기 위해 한 지방 전체가 파멸해야 한단 말인가! 가엾은 여자가 병원에서 죽고, 가엾은 소녀가 길바닥에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아이러니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남들의 행복을 위해 나만 견디면 되는 이 가책을, 내 영혼에만 상처를 주는 이 악행을 감수하는 것은 그야말로 헌신이고 그야말로 덕행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웃을 위해 살기로,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을 위해 양심의 고통을 감내하는 희생을 하기로 마음먹고 주교의 촛대까지 태워버리려고 했을 때, 그에게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신사로 있어라, 너는! 시장님으로 머물러 있어라. 명예롭고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어라. 이 도시를 번영시켜라.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려라. 고아들을 길러라. 행복하고 유덕하게 칭송을 받으며 살아라. 그동안에, 네가 여기서 환희와 광명 속에 있는 동안에, 한편에는 옥중에서 네 붉은 죄수복을 입고 치욕 속에서 네 이름을 둘러쓰고, 감옥에서 네 쇠사슬을 끄는 자가 있으리라!”

그는 두 가지 결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락가락한다. 이 딜레마를 장 발장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해결하지 못한다. 괴로워하다 잠이 든다. 그리고 그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약해둔 마차가 집 앞에 왔음을 알리는 전갈이었다. 여기서 장 발장의 고민은 다른 단계로 넘어간다. 마차를 예약했을 때, 그는 이미 가만히 있지 않기로 선택을 해버린 셈이었다.

 

재판정에 이르는 멀고 험한 길

 

장 발장은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마차를 전속력으로 몬다. 머리로는 정리가 안 되고 확신할 수 없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까지 할 것인가. 정말 끝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할 만큼 했다는 시늉으로 만족할 것인가.

재판정으로 가는 200리 길은 그의 마음을 끝없이 시험하는 난관이 가득한 험로 그 자체였다. 첫째,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우편마차와 부딪쳐 바퀴가 부러지고 만다. 수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면 곧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될 거라고 한다. 수레 목수에 따르면, 내일이나 되어야 수리가 가능하다. 시내에 마차를 빌려주는 가게도 없고. 다른 수레 목수도 없다. 대안이 하나둘 막혀가는 것을 발견하고, 드디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장 발장의 심정을 이렇게 간단히 적어놓는다. “그는 이만저만 기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길에서 이루어진 장 발장과 수레 목수의 대화를 엿들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따라온 할머니는 집에 헌 마차가 있다고 말한다. 그 말에 장 발장은 식은땀이 흘렀고, 몸이 오싹해졌다. 그리고 헌 마차가 움직일 때, 그는 자기가 안 가도 되겠다 싶어서 희열감을 느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레미제라블> 스틸컷.

 

그 외에도 장애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장 발장은 굴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한다. 평소 같았으면 재판이 진작 끝났을 시간에 도착해 보니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는 숨을 돌렸지만, 자신이 느끼는 것이 만족감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재판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수위에게 제지당한다. “단 한자리도 없습니다. 문은 닫혔습니다. 이제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단서가 붙는다. 재판석 뒤 두 자리만 남았는데, 거기는 공무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장 발장은 쪽지를 써서 자기 신분을 밝힌다. 그리고 시장님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재판장의 쪽지와 더불어 입장허가를 받는다.

덕분에 그는 수위의 안내를 받고 재판정 문 앞에 선다. 그러나 막상 문을 잡았을 때는 땀을 뻘뻘 흘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다. 쫓기는 사람처럼 달아난다. 그렇게 바깥에서 추위에 떨고, 다른 곳을 생각하며 또 부르르 떤다. 그렇게 있기를 십오 분. 드디어 그는 한숨을 짓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다시 돌아온다. 그 모습은 “흡사 내빼다가 잡혀서 다시 끌려오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호랑이 눈을 쳐다보듯 문 손잡이를 보다가 주춤주춤 한 걸음씩 발을 옮겨 문으로 간다. 그러다 경련하듯 손잡이를 잡고 마침내 재판정에 들어선다. 그리고 재판의 결정적 순간에 장 발장은 진실을 밝힌다. 그의 길고 긴 여정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또 다른 길고 파란만장한 여정이 새롭게 펼쳐진다.

 

딜레마를 풀기 위한 3가지 접근

 

이 흥미진진한 대목에서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지만, 세 가지를 떠올려본다. 첫째, 마음으로, 논리로 결정하지 못할 때는 일단 움직이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장 발장의 고민은 머리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요, 샹마티외가 억울하게 벌을 받는 것을 그냥 방치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알게 될 때까지 선택을 미루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했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진실이 되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장 발장은 움직이고 행하는 가운데 비로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둘째,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가능 여부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수하러 가는 (또는 자수해야 하나 고민하는) 장 발장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힘닿는 선에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때 또 다른 길이 열렸다. 때로는 길이 열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순간에도 기어이 열렸다. 그가 사력을 다해 달려가다 앞이 막혔을 때, 이제 더는 안 된다 싶은 지점에서 오히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열리고 그는 떠밀리다시피 가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신의 뜻에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셋째, 장 발장이 결정을 내릴 때 정서적 반응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샹먀티외가 장 발장으로 처벌을 받게 그냥 내버려 두자고, 그것이 천주의 뜻이라고 마음을 정했을 때 그를 가로막은 것은 그런 결정에 자신이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중요한 선택 앞에서 그의 정서적 반응을 거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뒷부분에서 장 발장이 최후의 시험 앞에 놓일 때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관계를 알게 된 장 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증오’를 느낀다.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그가 아는 모든 사랑이 응축된 특별한 존재였기에, 마리우스는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려 하는 위협적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얼마 후, 그는 마리우스가 혁명군의 바리케이드에서 코제트에게 보낸 편지를 가로챈다. 그의 눈에 들어온 한 구절. “나는 죽는다. 네가 이것을 읽을 때 나의 넋은 네 곁에 가 있을 것이고, 너에게 미소를 지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분명했다. “이 쪽지를 호주머니에 간직하기만 하면 된다. 코제트는 ‘그 사나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영 모르리라.” 장 발장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된다. 그 사나이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아직은 죽지 않았더라도 곧 죽을 건 틀림없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그리고 바로 다음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나서 그는 침울해졌다.”

오랫동안 선을 행하고 바른 선택을 내리며 살아온 사람이 선을 행할 때 경험하는 특유의 감정‧반응‧느낌이 있다. 다름 아닌 올바른 일을 할 때의 기쁨이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런 일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해온 사람은, 그런 기쁨이 없는 일을 마주하거나 그런 선택을 내리려는 자신의 모습에서 이질감, 거북함, 불편함을 느낀다. 덕을 갖춘 사람이 아는 이 기쁨을, 당장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데서 오는 즉각적 반응으로서의 기쁨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장 발장은 올바른 일을 할 때도 기쁨을 느끼지만 증오하는 사람의 최후를 예상하면서도 기쁨을 맛본다. ‘기쁨’이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은 되지만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자주 듣는 욕으로 이걸 설명해보겠다.

학생들이 입에 욕을 달고 산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욕이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욕의 현상에만 주목해서도 곤란하다. 사회학자 엄기호의 진단에 따르면, 요즘 아이들이 뭔가를 깨달았을 때, 배움의 순간을 맞이하고 각성의 경험을 할 때 나오는 감탄사가 “씨발!”이다. 광범위한 상황에 두루 쓰이는 욕으로, 일반적인 부정적 감정 배설에 그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배움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장 발장의 ‘기쁨’을 두고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겠다.

올바른 일을 할 때 찾아오는 기쁨의 맛을 아는 사람, 그렇지 못할 때 침울해지고 견디지 못하고 기어이 올바른 길을 따라가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한 마디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한다. 『레미제라블』 1부 1권 1장의 제목이기도 한 이 표현은 원래 미리엘 주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에는 올바른 사람 미리엘 주교를 만나고도 사력을 다해 저항했던 장 발장이 어느새 주교와 같은 ‘올바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갖가지 장애를 넘어야 했으며, 많은 고뇌와 씨름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장 발장의 도덕적 노력이 전부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벌이는 영웅적인 모든 노력 와중에 그는 여러 다른 이들로부터 갖가지 이유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멈추고 싶은 지점에서 어김없이 나타나 길을 열어주고 등을 떠밀어 주었던 이들이 없었다면 그가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었겠는가. 미리엘 주교가 “하나님께 바친” 장 발장은 줄곧 작가의 ‘플롯’(이라고 적고 ‘섭리’라고 읽는다)이라는 형태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믿기로, 그 은혜는 책 속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우리의 인생이라는 플롯을 관통한다. 단테는 그것을 “해와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라고 부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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