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자신이 되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여자로 길러진다. 여자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현실이 그렇다. 혹,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라는 말을 들어도, 옆에 조그맣게, 여자가 할 일은 하면서, 라는 단서가 붙는다. 이렇게 나 자신이 된다는 것과 여성이 된다는 게 서로 충돌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은 종종 위기를 맞는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

 

얼마 전부터 시몬느 드 보부와르와 그의 대표 저서 『제2의 성』이 재조명받고 있다. 거의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문장 하나로 아는 체를 할 수 있을 만큼 잘 알려졌지만, 장식용으로 꽂아두고 읽지는 않는 많은 사상서 중 하나가 되어버린 면도 있다. 유명한 고전의 운명이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들어는 봤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잘 없는. 나도 박사과정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이 사람 이후로 페미니즘 이론이 딱히 더 발전한 것 같지 않다는 것. 하긴 몸 철학의 대표주자인 메를로-퐁티와 대화하며 작업한 인물이니 그럴밖에. 덧붙이자면, 서양철학은 영혼의 시대를 지나고 이성의 시대를 넘어 몸의 시대로 들어왔는데, 최근에는 기계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몸과의 씨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보부와르의 글은 계속 유효해 보인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문장은 단순해 보이지만 하나하나 따져볼 게 많다. 우선, 왜 하필 남자가 아닌 여자를 두고 이 문장을 썼느냐 하는 점이다. 여자를 따로 불러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나를 별도로 부른다면 그것은 특권인가 아니면 나를 ‘디스’하기 위함인가? 성경에 보면 두 가지가 다 나온다. 성경의 다양한 인물들은 특별한 사명을 받기 위해 불리는가 하면 야단을 듣기 위해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특별히 ‘여자’를 칭하는 것은 사명을 주기 위함이냐 야단을 치기 위함이냐 이전의 문제이다. 여자가 사명을 받든 야단을 듣든, 그것이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듣는다는 걸 이 문장은 전제하며, 그 단서는 ‘되는 것’이라는 말에 있다.

여자는 자신이 되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여자로 길러진다. 여자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현실이 그렇다. 혹,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라는 말을 들어도, 옆에 조그맣게, 여자가 할 일은 하면서, 라는 단서가 붙는다. 이렇게 나 자신이 된다는 것과 여성이 된다는 게 서로 충돌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은 종종 위기를 맞는다. 한때 내가 무섭다며 눈물을 흘린 남자와 데이트를 한 적 있는 여성으로서, 나의 지식과 언변이 남성에게 위협이 된다면 나는 어떻게 나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살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단지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그러한 고민을 넘어 50대 초반에 이르러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고 느끼며 살던 차에, 오랜만에 20대 초반 학생들에게 여성의 정체성을 주제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요즘 20대 여성에 대해서 잘 아는 바가 없어서 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도 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알려 하고 또한 알아야 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하나의 큰 여행이라는 사실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했던 강의에 신앙인의 관점을 더해 몇 차례 나누어 풀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첫 번째 글을 시작하려 한다.

 

‘사회’는 쉽게 뒤엎거나 떠날 수 있는 곳?

 

그런데 판을 좀 넓게 펼쳐서 시작하려 한다. 여성도 이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여성으로 집중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변 지형을 좀 살필 필요가 있어서다. 이는 보부와르가 어떠한 지형에서 여성의 상황과 조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다.

그래서 태초에 사회-지구가 아니라-가 구성되었던 때의 이야기로 시작하자면,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태어날 때 지도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앞의 ‘지도’ 및 뒤에 나오는 ‘책상’의 비유는 피터 버거의 『The Sacred Canopy』〔“종교와 사회”라는 제목으로 과거 종로서적에서 나왔으나 절판되었음〕에 나오는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고안한 사례이다.) 아주 작은 개미에서부터 커다란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생명체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지도가 있다면, 인간의 경우는 스스로 그 지도를 그려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사회의 시작이고, 이 과정을 그는 세계 만들기(world-building)라고 했다. 이 세계 만들기의 중요한 부분이 인간의 관습‧제도‧규범 같은 것인데, 인간은 이러한 틀 없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거할 세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사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사회를 따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 사회 규범이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윗사람이냐 아랫사람이냐에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의 각도가 달라지는 인사에서부터, 우리가 하루 일과를 영위하면서 생각 없이 하는 많은 일이 사실은 인간으로 사는 법을 아주 어려서부터 학습한 결과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것과는 아주 다른 사회를 경험하거나,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자기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 한, 사회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일부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까지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인간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인간이 되지 못할 때, 즉 사회인이 되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낙오자라는 표현을 쓰지만, 산다는 것의 무게가 제법 무겁게 짓눌러올 때면 낙오자가 되는 건 실상 한 끗 차이 아닐까 생각도 한다. 그만큼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두 번째 이유는, 쉽게 떠날 수 있는 양 생각하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우리가 바로 사회의 산물이면서 사회를 자신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떠날 수 있는 양 생각하거나, 단번에 뒤엎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종교나 이념이 그러한 경향을 더 부추기기도 하는 것 같다. 기독교 전통에는 사막으로 나간 은둔자도 있고 세상과 담을 쌓고 봉쇄수도원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혹여 세상을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해도, 거기서 제대로 성숙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세상으로부터 떠나지지 않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회, 또 다른 세상과 대면하여 씨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세상의 여러 혁명이 이념을 토대로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 세상을 쉽게 뒤엎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념이 기여하는 면도 상당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러나 혁명 후에도 민중은 또다시 어렵게 살아간다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노랫말에서 보듯이(“새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더니 싸움 후 그 새 세상은 어디 갔는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해마다 또 한 놈이 태어나고 먹일 입은 늘어난다. 또 같은 이야기인데 눈물이 무슨 소용인가? 들을 자가 없다면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세상이, 그러니까 인간 사회가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묵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방 안의 책상’ 같은 ‘인간 사회의 규범’

 

이처럼 인간이 그 일부이면서 정작 자기 외부에 있는 것처럼 사회를 인식하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지는 방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 규범은 인간이 모여서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규범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 되어 인간 밖에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방안에 처음 들여놓은 책상처럼 견고한 사실성을 가지는데, 책상을 치우고 가든 둘러 가든 해야지 책상이 없는 것처럼 그것을 뚫고 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일단 만들어진 규범은 부인하거나 외면할 수는 있어도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규범은 인간에게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달리 말하자면, 일단 책상이 생기면 그 방은 책상이 있는 세상으로 지형이 바뀌게 되고 그 바뀐 지형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책상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책상과 부딪혀 다리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면, 그는 분명 (여러 의미에서) 범상치 않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규범은 인간의 세계 만들기의 산물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고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다시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을 치워버리고 그 기능을 하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그냥 바닥에 앉아 일하자고 할 수도 있다. 애초에 인간이 만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책상을 치웠다고 하자. 그러면 책상이 없던 원래 상태로 초기화되는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책상을 없애는 일에 맞서 누군가는 저항하고 시위를 할 수 있다. 또한 어찌어찌 책상이 치워졌다고 하더라도 책상을 사용했던 몸은 책상에 대한 기억이 있고, 그래서 계속 책상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된다. 혹 나는 책상 없는 세상에 적응하고 책상에 대해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다시 책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하여 책상이 복원될 수도 있다.

책상이 다시 복원될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질지는 나 혼자의 결정으로 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책상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복원되면 복원되는 대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는 우리가 한때 어떻게 책상을 사용했는지, 혹은 어떻게 책상이 사라질 뻔하다가 남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풀며 기억을 이어갈 것이다. 책상이라는 인간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 이럴진대, 인간이 태어나 구성되는 가부장제라고 하는 제도는 어떻겠는가? 보부와르가 고민한 핵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의 산물인데, 심지어 아비 어미를 아예 모르는 걸로 친다 해도 그것은 있는 것의 부정이지 없는 게 되지는 않는다.

요즘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묵상 성경』(The Message Devotional Bible, 복있는사람 근간 예정)에 수록된 묵상 글을 번역하고 있는데, 400년 넘게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난 공동체에 새로운 규칙이 주어지는 대목에서 이 이론의 생생한 예를 보게 된다. 노아의 경우는 기존 사회를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방식이었고, 아브라함은 따로 불러내는 방식이었다면, 출애굽은 이 두 가지를 다 사용한, 제법 초기화에 가까운 새 출발이었다. 물론 이집트가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왕의 장자의 죽음으로 끝난 열 차례의 재앙은 제법 막강한 쓸어버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따로 불러낸 이 무리가 40년을 광야에서 살면서 아예 세대가 갈렸으니 이 얼마나 초기화에 가까운 새 출발인가. 그런데도 이 사회는 끝내 이집트에서 익힌 규범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새로운 규범으로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생긴 것일 텐데, 메시아가 한번 왔다 간 이 세상도 다시 메시아가 올 날을 기다릴 만큼 인간 사회의 규범은 그 모든 잘잘못과 함께 계속 인간 안에 있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조건을 늘 초월하기를 꿈꾸었고, 18세기 무렵부터 등장한 인간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믿음은 또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그 가능성과 여성 정체성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 글에서 좀 더 살펴봐야 하는 부분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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