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장에서 평화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현장은 우리에게 평화의 다른 면에 눈뜨게 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은 원치 않는 불행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집적해서 준비하고 기획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군사기지 건설이 그중 하나입니다. 브라덜 송은 국제 평화활동을 하다가 처음으로 국내의 분쟁지역을 방문하기 위해서 강정마을에 갔고, 거기서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본문 중)

조정래(평화공동체 ‘개척자들’ 활동가)

 

누구에게나 소중한 빵 하나의 평화

 

얼마 전, 주말을 맞아 아들 가족과 함께 빵 하나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식사였지만 그날따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송강호 박사(우리는 그를 ‘브라덜 송’이라고 부르는데 이 글에서도 그렇게 쓰려 합니다)의 빈자리가 도드라졌고 오래전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독일에서 논문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통과한 후 브라덜 송은 당시 전쟁의 포화로 파괴된 코소보로 갔습니다. 눈발이 날리는 겨울, 그는 추위를 막기 위해 깨진 유리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비닐로 막고 있는 할머니들을 보았습니다. 길바닥에는 포탄 자국이 국화꽃 문양으로 선명하게 패여 있었고 집집마다 대문에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사진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자유롭게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최소한 저 부서진 창틀에 올라간 할머니들을 대신하여 비닐을 붙여줄 순 있지 않을까, 그것이 절망에 빠진 이들이 일어서는 데 크나큰 희망과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탄식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갈망은 생사조차 알 길 없는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빵을 나누어 먹는 소박한 식사 아니었을까요? 전쟁은 그렇게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브라덜 송은 이전부터 청년들과 함께 해 왔던 ‘세계를 위한 기도 모임’을 실천하기 위해 동티모르에서 평화캠프를 진행했습니다. 동티모르로부터 시작한 ‘몸으로 하는 기도’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아체, 아이티 등으로 눈과 마음을 열게 했고 ‘개척자들’은 덩치에 맞지 않는 상대를 만나 씨름하는 것 같은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시작은 유학 전 지도하던 청년부 친구들과 함께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 폭발 현장에 가서 얻은 깨달음이었을 겁니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사랑은 공허했고 실체를 만질 수 없었지만, 용암으로 부서진 가옥들과 수북이 쌓인 화산재의 무게로 지붕이 무너지는 현장을 본 청년들은 비로소 사랑이 아니면 헤쳐 나올 수 없는 타인의 문제를 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개척자들이 천착하는 2가지: 평화와 공동체

 

거듭되는 동티모르 평화캠프를 보고 ‘개척자들’을 지원하던 어떤 교회에서 그곳에 교회를 지을 수 있다면 더 많이 지원해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이미 동티모르는 가톨릭이 그들의 해방 종교로 급속하게 성장해서 거의 96%를 넘어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제안은 ‘분쟁지역에서의 평화사역’(Peace Building in Conflict Area)을 목표로 하는 개척자들과는 맞지 않아서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티모르 캠프에는 다양한 나라의 참가자들이 있었고 일본이나 대만 등에서 온 참가자들은 우리에게 기독교 단체이면서 왜 전도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캠프가 끝나면 1년 이상 함께할 자원봉사자를 맞이하곤 했는데, 일본에서 온 자원봉사자 중에는 전도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얘기를 어떤 자리에서 꺼냈을 때 일본 선교사들이 눈을 번쩍 뜨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는 세례교인을 얻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같이 살았어요.” 그게 우리의 대답이었습니다. 평화나 환경, 인권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와 함께하던 친구들이 그런 가치를 통해 자연스레 기독교인이 되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개척자들이 공동체를 지향한 것은 저렴하게 생활을 꾸려갈 수 있겠다는 현실적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개개인의 신앙과 성장에 큰 배움터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우리가 달려가는 현장이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죽거나 다치더라도 공동체가 남은 가족들에게 울타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더러 공동체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개척자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공동체 상과 다르다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과는 다르게 개인의 삶이 너무 노출돼서 싫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공동체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와 우리가 품는 이상 사이에 가장 큰 교집합을 만들어 준다는 데 동의하는 이들이 지금까지 남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척자들은 평화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간이역 같은 공동체입니다. 개척자들을 통과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도 있고, 그들 중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울타리가 되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미진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품어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있습니다.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이유

 

개척자들은 현장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처음부터 포기했습니다. 이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단체가 자신들의 활동 범위를 큰 차로 물량을 나를 수 있는 지역까지로 제한할 때, 개척자들은 동사자가 나올 게 불 보듯 뻔한 그 겨울에 산 너머 파키스탄 마을을 발로 뛰어다니며 텐트와 난로를 지원했고 지진이나 홍수 피해에 대한 긴급구호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척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했던 일은 당장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쟁과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뒤 군인이나 경찰이 되어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는 전쟁터의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전쟁은 학교 건물을 군사기지로 바꿔놓았고 운동장을 지뢰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폐허가 된 학교를 다시 세워 50년 동안 여성 교육을 금지해 온 아프가니스탄 작은 마을에 여학교를 헌정했습니다. 분쟁지역에서 진행되는 평화교육은 해를 거듭하면서 더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갖추게 되었고, 9년 동안 단계적으로 심화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척자들은 그저 난민들을 돕는 ‘착한 단체’였습니다.

우리는 현장에서 평화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현장은 우리에게 평화의 다른 면에 눈뜨게 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은 원치 않는 불행으로 일어나는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집적해서 준비하고 기획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군사기지 건설이 그중 하나입니다. 브라덜 송은 국제 평화활동을 하다가 처음으로 국내의 분쟁지역을 방문하기 위해서 강정마을에 갔고, 거기서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전쟁 피해자들을 돕는 일은 전쟁을 반대하는 일입니다. 전쟁의 맹목성과 잔인성을 매일 겪으면서 거대한 전쟁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에 뛰어들면서 개척자들은 ‘불온한 단체’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를 후원하던 큰 교회들의 후원은 끊긴 반면, 오히려 작은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중립국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얼마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만장일치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는 UNCTAD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 대한 다각도의 분석이 있었을 텐데 빠른 경제 성장, 높은 혁신 지수, 한국 문화에 대한 우호적 태도, 세계 6위의 군사력 등이 그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보내는 개도국들의 요구는 선진국들에게 자신들을 대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김구 선생님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돌아보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이제는 선생의 이러한 소원이 어느 정도 충족된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세계 6위의 군사력에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력이 종합적으로 높은 순위에 도달한 지금, 우리나라가 중립국을 선포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일상적인 미중일러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완충지대가 됨으로써 제국의 빛바랜 꿈을 버리지 못하거나 제국으로 회귀를 꿈꾸는 나라들에게 군사적 긴장을 벗어나 평화롭게 사는 새로운 나라의 표본이 될 수는 없을까요?

작년 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반복되는 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 한글로 쓴 손팻말 등장했습니다. “평화는 우리가 반드시 말해야 하는 언어다”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석유가 없으면 권위도 없다고?” “역사가 되풀이되도록 놔두지 마!” 등 한글로 쓴 구호를 보며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비슷한 일이 미얀마 사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한글로, 임금이 백성을 위해 만들어 태생적으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글자로 그들은 전 세계의 한류 팬에게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는 한글이, 한류가 이미 평화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김구 선생님이 바라던 높은 문화의 힘 아닐까요?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펴낸 ‘직지심체요절’(직지)보다 앞서는 1400년대의 실물 금속활자가 새롭게 발견됨으로써 우리가 높은 문화민족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호시탐탐 이웃나라 역사와 문화를 도적질하는 나라 사이에서 우리가 버텨낸 것도 바로 이 문화의 힘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나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자긍심을 지니려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지켜주고 싶은 나라’로 여겨지는 것이 더 높은 차원의 자기방어일 것입니다. 하드 파워보다 더 강한 것이 소프트 파워입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이 스위스나 스칸디나비아 3국처럼 인류 사회가 반드시 지켜주고 싶고 지켜야만 하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문화의 힘으로 그런 가능성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1948년 코스타리카의 혼란기에 민병대를 조직하여 정부군과 맞서 승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호세 피게레스는 병영을 박물관으로 바꾸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 자신이 힘으로 정권을 잡은 마당에 내린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급기야 그가 1949년 군대를 없애고 그 예산으로 교육, 보건의료, 환경, 문화 분야에 힘을 쏟기로 한 그 즈음, 남한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후 코스타리카는 한 차례 내전과 두 번의 침략을 겪었습니다. 거기에다 이웃나라 내전의 불똥이 튄 적도 한 번 있었습니다. 그렇게 코스타리카는 네 차례의 사변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중립 외교로 그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중남미의 주변 나라 니카라과, 에콰도르, 과테말라 같은 나라들은 쿠데타와 군사독재, 내전과 학살에 시달렸지만 군대를 없앤 코스타리카는 ‘예외국’으로 정치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2011년 니카라과와 국경분쟁을 겪는 등 고비도 있었지만 비무장원칙을 지켰습니다.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만일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이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동물의 처소로 오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온갖 조롱과 쓰라린 배신을 당하시면서 하나님께 “주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에 제물로 바쳐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의 순교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희생의 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말씀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Peacemaker)”(고후 5:18)에 교회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분쟁과 재난의 현장에 뛰어들어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교회가 지원 체계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혜자의 입장에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 전에 먼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개척자들은 모든 한국 남성에게 주어진 병역의 의무 대신 남녀 구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최소한 생애 1년에서 2년의 평화 복무에 자원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 평화 복무 기간은 온전히 하나님과 타자(이웃)를 위한 시간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계 곳곳의 역경에 처한 이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젊은이들을 평화의 일꾼으로 파송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게 하고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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