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소령 사건이 있었던 2013년이면, 내가 현역병으로 복무하던 시기이다. 당시 군대 내 성폭력 문제와 여성 인권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터라 해당 사건을 모르고 지나간 것이 부끄럽다. 이번 공군 성폭력 사건을 마주하며 과거 나의 군 생활을 다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에겐 군대 내 저급한 성인식과 성문화, 열악한 제도를 암묵적으로 일조하고 방관한 책임이 있다. (본문 중)
이명진(기윤실 간사)
최근 공군 내에서 직속상관이 후임 부사관에게 성폭력을 행사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해당 사건을 접하며 황망한 마음에 분노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8년 전인 2013년엔 이른바 ‘노소령 사건’이 있었다. 오모 대위가 직속상관인 노모 소령에게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고 성추행을 당하다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다. 당시 뉴스에선 ‘오대위 사건’이라 보도했지만 어떤 사건을 명명할 때 가해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아 ‘노소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복기한다. 오대위 아버지는 최근 공군 성폭력 사건 관련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과 내 딸 사건이 어찌 이리 똑같은지, 더는 피해자가 없게 해달라”고 읍소했다.
그 중대장은 괜찮았을까?
노소령 사건이 있었던 2013년이면, 내가 현역병으로 복무하던 시기이다. 당시 군대 내 성폭력 문제와 여성 인권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터라 해당 사건을 모르고 지나간 것이 부끄럽다. 이번 공군 성폭력 사건을 마주하며 과거 나의 군 생활을 다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에겐 군대 내 저급한 성인식과 성문화, 열악한 제도를 암묵적으로 일조하고 방관한 책임이 있다.
자대 배치를 받고 소속 중대에 도착했을 때 중대장이 여성이었다. 신병훈련을 도맡아 하는 중대라 편재가 독특했는데, 중대장 1명과 행보관 1명, 소대장 5명, 15명쯤 되는 조교들, 그리고 매 기수 약 200명 정도 훈련병들이 함께했다. 중대장 말고는 모두 남성이었으며 중대를 넘어 대대에서도 한동안 우리 중대장만 여군이었다. 대략 1000명쯤 되는 대대에서 혼자만 유일하게 여성이었던 것이다. (내가 전입한 후 1년쯤 지나서야 다른 중대에 여군 두 명이 새로 전입해 왔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은 집단에 여자 홀로 존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우선 중대 건물에 여자화장실이 없었다. 지금은 건물을 새로 지었지만 당시 오래된 2층짜리 건물엔 각 층마다 남자화장실만 2개씩 있었다. 중대장이 화장실을 가려면 걸어서 5분 거리인 옆 중대 건물로 가거나, 조교들이 화장실 앞 복도에서 망을 보고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 곳곳에 그려진 낙서들이었다. 약 두 달 주기로 훈련병들이 새로 들어올 때마다, 여성을 희롱하거나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그림과 문구들이 화장실 곳곳에 나타났고, 중대장님도 이를 보셨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면 해당 기수 전체가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중대장님의 권위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의문이다. 먼저 중대장님의 작전수행이나 행정업무, 체력적인 부분 등 군인으로 갖추어야 할 개인적인 덕목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특급전사’로 뉴스에 소개되기도 하고, 대위 임기 후 곧바로 소령으로 진급하실 만큼 능력을 인정받는 분이었다. 또 중대원들을 잘 챙겨주시고 실수에도 관대했던 분이라 중대장님을 좋아하는 이들 역시 꽤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분위기도 있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중대장님께 불만을 품은 어떤 소대장은 병사들 앞에서 종종 상관 ‘뒷담화’를 시전하며 꼭 성차별적인 사족을 달았고, 여군을 상관으로 둔 것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옆 중대 간부나 병사들이 여자를 상관으로 둔 나를 “창피하지 않냐”며 놀리는 경우도 흔했다. 중대장님 면전에선 이런 내색을 끼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을 깔보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중대장님을 무시하는 이유는 단지 ‘군(軍)’ 앞에 ‘여(女)’가 붙기 때문이었다.
군대 내 위문 문화, 괜찮을까?
여성을 낮잡아 보는 문화가 비단 우리 중대장에게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한국 군대 내에서 여성을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여기고, 군을 위문하는 존재로 보는 문화는 오래 전부터 만연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군 경험만 복기해도 해당 사례를 수없이 열거할 수 있다. 고생하는 남군들을 위해 부대를 방문하거나 선물을 보내고,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누나, 여동생, 여자친구, 연예인 등 여성은 여러 역할로 남군들을 위문해 왔다. 그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여성 위주의 위문공연 문화다.
남군들에게 여성 가수들을 신봉하는 문화는 부대를 막론하고 어디든 나타난다. 이등병 때 기상 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TV에서 걸그룹 노래를 틀어놓는 것이었고, 주말마다 여성 가수들이 출연하는 가요프로그램은 늘 인기가 많았다. 장기자랑을 할 때 걸그룹 안무를 잘 따라하는 후임은 예쁨을 받기도 했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걸그룹 멤버 중 선임이 먼저 좋아하는 멤버를 후임이 좋아하면 혼나는 일도 있었다. 일요일에 훈련병들을 인솔하고 교회를 가면 ‘○○걸스’라 부르던 여학생 찬양팀이 등장했는데,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평상시에도 이러한데 가끔씩 걸그룹이나 여성 솔로가수가 부대로 위문공연이라도 오는 날이면 어떻게 될까.
올 들어 해체 직전까지 갔던 4인조 여성 그룹 ‘브레이브걸스’가 음원차트 역주행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브레이브걸스는 데뷔 후 일반 대중 사이에선 수년간 인지도를 쌓지 못해 힘들어 했지만, 군부대 위문공연을 자주 하며 ‘군통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즈음 가수 ‘미나’가 2003년 군대 내 위문공연 당시 계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함께 접했다. 고생 끝에 정상에 오른 이들의 이야기가 다행스럽게 들리면서도, 이들이 알게 모르게 겪었을 불의한 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하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이 글을 준비하며 장교나 병사로 복무하다 작년에 전역한 친구들과 아직 현역병인 친구에게 요즘 군대는 어떤지 궁금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여전히 걸그룹 노래를 자주 틀어놓는지, 위문공연은 여가수 위주로 진행되는지, 여자친구나 누나, 여동생 사진을 돌려보며 평가하는 문화는 바뀌었는지, 외박이나 휴가 시 성매매 업소 방문 이력을 자랑하거나 성인잡지를 사 오게 하는 문화는 여전한지, 아직도 여군을 무시하는지, 건물마다 여자화장실과 휴게실이 있는지 등등.
바뀐 것이 없진 않았다. 외박이나 휴가 시 성군기 위반 교육 및 처벌을 강화해 성매매를 대놓고 자랑삼아 언급하는 문화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또 병사 개인의 여자친구나 가족을 평가하거나 언급하는 일도 이젠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단다. 그 결과 신고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서로 자제하는 분위기가 조금은 형성됐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일들이 여전히 암암리에 있다 하더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졌단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위문공연 자체가 많이 줄었음에도 걸그룹에 열광하는 문화는 여전하다고 한다. 또 성인잡지를 보거나 TV에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엔 병사들도 휴대폰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알아서들 찾아본다고 한다. 그밖에도 너나없이 여군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자주 들었다고 했으며, 여자화장실과 휴게실이 없는 부대가 여전히 있다고 한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남군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해당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창고처럼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법과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물론 가해자 및 책임자를 처벌하고 군대 내 제도를 개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 여성을 낮잡아 보거나 위문하는 존재로 여기는 문화와 의식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더는 성폭력 피해자가 없게 해 달라던 오대위 아버지의 바람은 실현되기 어렵다. 군대 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남군들의 변화가 없으면 제도 밖 희생자는 앞으로도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여성이 남성을 위로하는 식의 기이한 위문 문화를 끝내야 한다. 여성의 위로를 원하면서 그 존재는 무시하는 모순적인 이중 잣대는 너무도 부끄럽다. 또한 군대뿐 아니라 일상에 만연한 남성들의 음담패설 문화와 그릇된 성 인식에 대한 처절한 반성도 필요하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저급한 인식 또한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당장 개개인의 근본 인식 개선이 어렵다면, 강력한 처벌을 통해서라도 그릇된 인식을 발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장난삼아’ 한다는 투로 내뱉는 저열한 농담도 안 된다. 저급한 문화들이 모여 거대한 성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더는 지켜볼 수 없다. 이를 위해 내 과거부터, 군복무를 경험한 많은 남성들의 군생활부터, 우리 일상부터 반성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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