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와 공정 사회라는 두 이념이 결합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이런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승자에게는 오만함을, 패자에게는 굴욕감을 안겨줄 뿐 아니라, 그런 감정이 정당한 감정이며, 그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는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능력주의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만들어내고 그 벽을 높인다. 능력주의는 엘리트의 유용한 도구다. 능력주의의 폐단을 능력주의가 해결할 수 없다. (본문 중)

김선욱(숭실대 학사부총장)

 

정의, 공정, 능력주의 등과 같은 단어는 누가 어떤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진다. 1980년대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기에 전국의 경찰서에 붙은 구호는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 어느 누가 전두환이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겠는가. 공정과 정의는 그것을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길을 함께 찾음으로써 현실이 된다.

공정은 중요하다. 공정은 사회에 대한 자긍심과 애착, 그리고 헌신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안정적이다. 그런데 공정성 인식은 절대적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공정성 인식은 어떤 대상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며 거기에는 만족과 불만의 감정이 수반된다. 이 감정은 사회적 응집력에 영향을 주고 또 사회적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에 중요하지만, 그 근거는 환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 말은 과정의 정당성에 초점을 둔 것이다. 과정만 공정하면 결과는 정의로울 것인가? 이제 우리 사회는 과정의 공정을 넘어, 실질적인 평등에 기초한 공정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능력주의가 도처에서 주장된다. 정치가는 모두 공정을 표방하지만, 실제로 어떤 철학과 정책이 공정을 일구어내는지 제대로 따져야 한다. 전두환이 아무리 “정의 사회 구현”을 써 붙였어도 실제는 그게 아니었다.

능력주의란 모든 사람은 자신이 노력하여 일구어낸 실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능력(merit)이라는 말은 타고난 소질(talent)이나 역량(abil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구현해서 보여주는 실력을 의미한다. 능력주의란 오직 이런 의미의 능력을 기준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를 말한다.

능력을 중시한다는 말과 능력주의를 채택한다는 말은 같지 않다. 능력주의는 당장 확인 가능한 능력만을 중심으로 공과를 따져 보상하며, 성별, 장애 유무, 출신 환경 등과 같은 요소는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 능력주의는 신분주의, 귀족주의, 정실주의 등을 혁파하는 긍정적 기여를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엘리트 계급을 형성하고 그 벽을 두껍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버린다.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마이클 영은 19세기 말 영국에서 의무 교육의 시행을 통해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뽑아 신분 사회의 비효율성을 일부 극복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1958년에 쓴 『능력주의』에서 능력주의 사회가 확고히 이룩된 미래 영국 사람들은 불행에 빠질 것이라 경고했다. 그가 그린 미래의 능력주의 사회는 개인의 능력을 수시로 정확히 측정하여 그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절차에 따른 불만의 여지를 완전히 없앤다. 물론 이런 사회는 소설 속에서만 가능하다. 어쨌든 그로 인해 높은 지위에 속한 사람은 우월감과 자만심을 갖게 되지만, 낮은 지위의 사람은 굴욕감을 느끼게 된다. 모두는 그런 감정을 그대로 수용해야만 한다. 절차가 정당하기 때문에 결과에 따른 그 감정은 모두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적 불만과 불행은 제도화된다. 또한 이 사회에서는 능력주의 원칙에 따라 유산 상속이 금지되므로, 사회적 유력자는 후손을 위한 값비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재산을 사용한다. 이는 결국 우월한 지위의 세습으로 이어진다.

 

 

이런 능력주의 사회는 정의로운가? 실력을 기준으로만 보상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공정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가? 이것이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마이클 샌델은 능력주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재능은 타고난 것이지만, 그것은 부모의 생물학적 기여 혹은 자연의 섭리의 산물일 뿐, 개인 노력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재능을 바탕으로 성공한 자가 그 보상을 온전히 향유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게 된다. 둘째, 고액 연봉과 같은 보상은 당대 사회의 선호도에 큰 영향을 받는다. 축구선수 손흥민이 거액의 연봉을 받지만 핸드볼 선수가 같은 노력을 기울여도 보상이 적은 것은 그 운동에 대한 사회적 선호도 때문이다. 당대 사회가 무엇을 선호하는가는 우연적인 것이다. 거액 연봉도 시대적 우연에 기인한다. 셋째, 본인이 기울인 노력조차도 주위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부모가 마련해준 좋은 환경을 가진 경우와 아르바이트를 해서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는 학습 노력의 양과 질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노력 또한 온전한 개인의 몫은 아닌 것이다.

능력주의와 공정 사회라는 두 이념이 결합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은 착각이다. 이런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승자에게는 오만함을, 패자에게는 굴욕감을 안겨줄 뿐 아니라, 그런 감정이 정당한 감정이며, 그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는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능력주의는 사회의 엘리트 계층을 만들어내고 그 벽을 높인다. 능력주의는 엘리트의 유용한 도구다. 능력주의의 폐단을 능력주의가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능력주의의 역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는 능력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는 시민의 능력이 제대로 형성되고 발휘되는 것을 막아 버린다.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철학을 점검해야 한다. 샌델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모든 직업과 일에 적절한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 모든 직업과 일은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사회적 기여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 사회적 필요의 다양성에 따른 활동들이 그에 상응하는 존중을 받을 때 사회적 연대는 회복된다.

둘째, 사회의 모든 영역에 대한 존중을 기초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그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중을 받는다면 그들의 의견도 존중을 받게 된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공동선을 공동으로 지향할 때 올바로 작동할 수 있다. 좋은 정책은 이러한 민주주의적 기반에서만 만들어지고 시행될 수 있다.

셋째, 유익한 공동선을 발견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이 중요하다. 시민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를 시민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토론할 때 사회를 바꾸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정치적 수사가 넘치는 시기가 왔다. 현명한 시민은 말의 수사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바른 길이 개인적 통찰로만 발견되기는 어렵다. 공부와 숙고와 토론을 통해 함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민주주의 시대에 마련된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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