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서 공정은 기회균등이 아니라, 약자 배려적인 동정심과 친절로 표현될 때가 많다. 구약성경은 절대적인 기회균등 조건에서 경쟁하는 상황을 공정 충족의 조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세상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며, 오히려 처음부터 불공평 요소를 안고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공정의 적극적 측면으로 보는 편이다. (본문 중)

김회권(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구약성서학)

 

공정화두에 빠진 사회

 

요즘 대선 예비 주자들이나 정치권이 ‘공정’을 화두 삼아 자신의 정치적 어젠다를 설정하거나 타당 후보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공정 시비’를 불러일으킨 쟁점들은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가들의 자녀들이 덧입은 각종 특혜였다. 취업, 입학, 사업, 기타 국책 사업 지원 등에서 부모의 권력 후광을 덧입은 특혜 사례들은 온 국민의 일치된 분노를 샀다. 이런 사안들이 제기한 ‘공정’ 쟁점은 특혜를 반대하는 논리가 공정이라고 믿게 만들었으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그런데 의대생들과 의전원생들의 의사 국가시험 거부 사태를 봐주면서 재응시 기회를 주는 문제나,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한 ‘공정’ 시비는 공정 쟁점의 또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한다. 의사 국가시험 거부자들에게 재시 기회를 부여한 것은 예비 의사나 의사 집단의 특권적 지위 요구에 대한 정부의 굴복이라는 차원에서 여론의 공분을 샀고, 인천공항 비정규직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은 특정 정당에서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공정’ 위반을 공격하는 빌미를 잡기 위해 일부 언론을 등에 업고 억지로 문제 삼은 측면이 있어서 전국민적 안타까움(인천공항 비정규직 당사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초래했다.

위에 예거한 사례들 중에서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공정’ 시비는 한마디로 특권이나 특혜에 대한 비판이므로 정당한 공정 시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직원들의 정규직화는 ‘공정’ 위반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랫동안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기회균등을 앗아가는 행위도 아닐 뿐더러, 20대 청년들의 취업 기회를 앗아가는 불공정 사태라고 보기 힘들다. 비정규직으로 2년간 일하면 정규직 전환의 기회를 부여하자는 법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긴 세월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던 일군의 직종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는 일은, ‘공정’의 위반이 아니라, 공정의 증장(增長)으로 볼 여지가 있다.

 

구약성경과 공정

 

구약성경에서 공정은 기회균등이 아니라, 약자 배려적인 동정심과 친절로 표현될 때가 많다. 구약성경은 절대적인 기회균등 조건에서 경쟁하는 상황을 공정 충족의 조건이라고 보지 않는다. 구약성경은 세상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며, 오히려 처음부터 불공평 요소를 안고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공정의 적극적 측면으로 보는 편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공정은 공평과 정의의 합성 개념으로서, 억강부약(抑强扶弱)1)적 형평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약자, 가난한 자에게 편파적으로 부여되는 ‘기회’는 질적인 공정 실현으로 볼 여지가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공평(미쉬파트)과 공의(체데크) 실천은 하나님의 고유 과업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최우선시해야 할 공공 미덕이요 가치였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공정은 공의(체데크)를 통해 성취된다. 그리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 공평을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입장이다. 왜 그런가? 공평(미쉬파트)은 부당하게 강하고 부유해진 자를 법적으로 견제하고 억제하는 사법적 활동이며, 공의(체데크)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행복을 박탈당한 약자들을 하나님의 언약적 보호망으로 부축하는 의리이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의 정의와는 다른 구약성경의 공의공평

 

구약성경의 공정 개념의 특성을 드러내는 단어는 공의(체데크)이기에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공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잠시 검토해야 한다.2) 구약성경의 공의는 헬레니즘적 정의 개념(각자에게 제 몫을 돌려줌)과는 전혀 다른 철저히 히브리적 개념이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시행되는 정의는 계급 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반면에 아모스 5:24의 ‘공의를 강처럼 흘리라’는 요구는 친절과 의리를 강물처럼 풍성히 실천하라는 요구이다. 구약성경의 공의 사상은 따뜻한 친절, 배려, 그리고 자비와 쉽게 연관되며, 냉정함, 정확성, 수학적 평형 상태, 창백한 합리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이상적인 관계 혹은 정적인 평형 상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구약성경의 공의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신실성(firmness)에서 우러나오는 신적 미덕이요 성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 속에 있는 집요하고 끈질긴 신실성을 가리킨다. 인간이 아무리 불의해도 하나님은 공의로 인간의 불의를 삼키고 상쇄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견지하신다. 인간의 부단한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치지 않는 당신의 공의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의의 단절을 일방적으로 메꾸어 가셨다.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이사야 46:1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공의란 냉혹한 합리주의와 창백한 공정성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랑의 원천이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은혜로운 하나님 자비이다. 이 부조리할 정도의 지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 세계를 향한 정복되지 않는 하나님의 선(善) 의지야말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공의의 진면목이다. 이 하나님의 공의가 야훼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심이며, 이 진심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행위에서 인간을 향한 단심(丹心)의 사랑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자기표현인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에 조응하지 못하고 끝없는 의의 왜곡과 일탈로 치달을 때,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를 쉴 새 없이 붙들었고, 이 세계를 보존해 오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로마서 3:21).

 

공의가 하수같이 공평이 강같이 흐르는 날이 올 때까지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 속에 있는 공의의 심층 전부를 과시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속에 굄 없이 흐르는 신적 공의는 이 세계를 유지하는 에너지요, 공의 관계가 훼손된 곳을 향해 하수와 강물처럼 돌진하는 흐름이다. 하나님의 공의 요구는 중립 지대에서 발생치 않고 하나님 공의의 은혜스러움을 미리 맛본 자에게서 발생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은 당사자로서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이 집중적으로 베풀어진 대상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일방적인 구원과 자비의 역사가 그들에게 강물처럼 흘렀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이 선행적이고 원천적인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응답으로서 정의를 하수처럼 흘려야 하고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한다. 야훼가 히브리 노예에게 해방자, 기업 무를 자(채무를 대신 갚아 줄 의무가 있는 친족)로 행세해 주듯이, 이스라엘은 동료 계약 당사자를 향하여 서로 해방자, 기업 무를 자가 되어야 한다. 야훼의 일방적인 공의 체험에 초대받지 못한 이교도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늑대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때도, 이스라엘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해방자’로 살아야 했다. 구약에서 공의란 자기의 노동과 공로에 따라 정확히 제 몫을 찾아 먹는 헬라적 정의라기보다는 제 몫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자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서 같이 사는 은혜로운 공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합리(?)하고 다소 부조리(?)하기까지 한 편애요 편중이다. 구약의 공의는 박애, 친절, 관용을 포함하며, 억압당하는 자에 대한 애타는 동정이며(신명기 24:10-13), 재판관들의 전문 영역이 아니라 계약 구성원 모두의 일상생활을 향한 공의 창시자 야훼의 초월적 요구이다. 가난한 자의 옷을 담보로 잡았을 경우라도 해 질 무렵이면 반드시 돌려주는 것이 공의다(출애굽기 22:26). 구약의 공의는 신적 호의와 친절함이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자 쪽으로 쏠리는 편애이다. 구약의 공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한 신적인 연민이요, 그들의 삶에 자신을 정서적으로 의지적으로 얽어매는 일이다. 자신을 일방적으로 노예 백성의 운명과 얽어맨 하나님은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어 자신을 얽어매시는 분이시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과 항상 계약관계에 있는 의로운 자처럼 도덕적 자질이 의롭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공의는 일차적으로 가난한 자에게로 기운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는 억압자에게는 시퍼런 정의의 칼이 되어 기울어진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불의의 방벽을 넘어 무너뜨리는 도전이며, 쉬지 않는 돌진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공의에 응답하는 응답적 공의를 실천할 의무에 매여 있다.

 


1)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움-편집자 주.

2) ‘체데크‘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대부분 ‘공의’라고 번역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역개정 본문은 ‘미쉬파트’를 ‘정의’라고 번역하고(창세기 18:18은 예외적으로 ‘의’라고 번역), 체데크를 공의라고 번역한다. 편의상 우리는 개역개정을 따라 체데크를 공의라고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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