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보낸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42년에 책으로 나왔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신선하고 반짝거린다. 악마가 인간 영혼을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각종 지혜와 통찰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사람의 생각과 일상이 그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본문 중)

홍종락(번역가, 작가)

 

요새 사람들 책 안 본다는 말 많이 듣는다. 그게 사실이라면, 교회에서 좋은 책으로 청년 독서 모임을 해봐야 무슨 실익이 있겠나 싶어진다. 신청자도 별로 없을 거고, 주위의 압력에 못 이겨 참석한다 해도 ‘글자로만 이루어진 책’을 누가 보겠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본다 한들 뭐 그리 영향이 있겠는가. 책으로 어디 사람 생각이, 사람이 변하던가.

그런데 어느 교회에서 한 달 동안 책 읽기를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부모 손에 끌려 교회에 다녔던 이들,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기대가 애초에 없던 이들, 교회의 틀에서 벗어날 기회만 노리던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눈이 반짝이고 새로운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은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다.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보낸 31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42년에 책으로 나왔지만 지금 봐도 여전히 신선하고 반짝거린다. 악마가 인간 영혼을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각종 지혜와 통찰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사람의 생각과 일상이 그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평소의 일상, 생각, 관계, 선택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오롯이 ‘자기 것’이라 생각하던 사람들 중에서 이 책을 통해 정신이 번쩍 든 이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교회 좀 다녀본 청소년, 청년들은 틀에 박힌 설교와 교회 생활, 정형화된 언어에 익숙해지고서 기독교에 대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교회에서 배운 내용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다고, 별거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그런 생각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고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뻔하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내가 뭔가 중요한 걸 놓쳤던 것은 아닐까’, ‘여기 뭔가 진짜가 있는 건 아닐까.’ 루이스는 『기적』에서 더 작은 일들을 통해 겪는 충격에 빗대어 이런 각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잡고 있던 줄이 갑자기 반대쪽에서 당겨질 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경우에 말입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무언가 실마리를 따라가던 와중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생명의 떨림이 전달되어 오고, 그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살아 있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충격을 줍니다. “저기 봐!” 우리는 소리칩니다. “저게 살아 있어.”

 

일단 뭔가를 경험한 사람이, 새로운 것에 살짝이라도 눈을 뜬 사람이 무엇을 더 경험하고 더 보게 될지, 그로 인해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늘 옆에 있었으나 보지 못하던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을 환영한다.

 

악마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과 인간 세상, 영적 세상에 대해 대단한 통찰력을 갖춘 지혜로운 악마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이끈 탁월한 성취를 자랑한다. 그자가 풀어내는 인간 본성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는 무릎을 치게 만든다.

스크루테이프가 보는 인간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너무나 분명한 것도 보지 못하고, 당연한 의문조차 품지 못한다. 한 대목만 인용해 보자.

 

인간의 머리가 아무리 떨어지기로서니, 그렇게 당연한 의문이 떠오르는 걸 막는다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이냐고 묻고 싶겠지. 하지만 웜우드,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우리가 적당히 주물러 주기만 하면 그런 생각은 간단히 막을 수 있지. (2번 편지)

 

인간은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아주 작은 것에 정신이 팔려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는 허무하고 연약한 존재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이 ‘양서류’라는 점을 부단히 강조한다. 영으로만 된 악마와 달리 몸과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사실에는 수많은 결과가 따라온다. 악마와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는 것도, 몸의 자세와 상태가 영혼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그 결과 중 하나다. 인간이 늘 변화하고 자신이 먹은 음식, 소화 상태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거짓 영성에 빠지게 된다. 이웃의 구체적인 아픔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그를 위한 ‘영적인 기도’에 집중하게 하라는 교훈은 얼마나 섬뜩한지(3번 편지).

육신을 가진 우리 눈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뜻을 가늠하기 어렵고, 때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엄한 주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스크루테이프가 보는 원수(하나님)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를 들어 기도를 다루는 4번 편지를 보자. “영적 존재로서의 체통에 무관심한 나머지 인간 동물들이 무릎을 꿇을 때 아주 창피스런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지식들을 쏟아부어 준단 말이야.” 체통도 없이, 불공평하게 인간들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존재라.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를 멀리서 보고 (체통도 없이)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가.

악마들도 하나님도 인간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관심의 목적이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먹을 가축이지만, 그 작자가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8번 편지). 그리고 이 대목에서 스크루테이프가 18번 편지에서 밝힌 지옥의 철학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원수의 속셈

 

지옥의 철학은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별개’, 특히 ‘하나의 자아는 다른 자아와 별개’라는 원칙이다. 바꿔 말하면, ‘나한테 좋은 건 나한테 좋은 거고, 너한테 좋은 건 너한테 좋은 거’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자기가 확장되려면 다른 사물을 밀어내거나 흡수해야만 하지. 자아가 확장될 때도 마찬가지야. 짐승한테 흡수란 잡아먹는 것이고, 우리한테 흡수란 강한 자아가 약한 자아의 의지와 자유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한다’는 뜻이다.

 

제로섬 게임. 지옥의 철학은 사실 현재 인간 사회의 철학이 아닌가! 인간 사회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면 이것은 반박 불가의 현실 진단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크루테이프에 따르면 “원수의 철학은 이렇게 명백한 진리를 계속해서 회피하려는 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자의 철학에 따르면) 한 자아한테 좋은 것은 다른 자아한테도 좋은 것이란다. 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천편일률적인 만병통치약은 그 작자가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작자의 모든 성품에서도 감지해 낼 수가 있다.

 

원래 18번 편지의 주제는 결혼과 성(性)이다. 그 문제를 다루며 지옥의 철학을 설파하고 그에 맞선 원수의 철학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에서 이어지는 삼위일체, 성(性)에 대한 짧지만 기막힌 통찰은 깊이 묵상해 볼 만한 대목이다.

그러나 그런 지혜로운 스크루테이프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18번 편지에서 그자는 ‘원수가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웜우드의 문제 제기를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19번 편지에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부주의로 헛나간 말이었다고 정정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옥의 철학에 반대되는 주장이니까.

그럼 원수도 악마와 마찬가지로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스크루테이프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 “대체 원수는 인간들에게서 무얼 얻으려는 심산일까?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사랑의 신비라 부르는 것을 악마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에, ‘그 작자의 진짜 속셈’을 알아내어 해결하려 부단히 연구하고 노력한다. 언젠가 성공할 날을 기대하며.

 

루이스의 통찰들이 담긴 보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루이스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책이다. 1942년에 나온 이 책에는 이후에 루이스가 판타지, 변증, 에세이, SF소설 등 다양한 장르에서 보다 깊이 있게 발전시킨 착상들과 개념들, 또는 그 맹아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대목들은 루이스가 다루는 내용이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대단히 압축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착상과 개념을 제대로 풀어내자면 책 한 권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 하나만 소개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10번 편지는 교우 관계를 다룬다. (교우 관계의 문제는 루이스가 ‘내부 패거리’라는 에세이에서 깊이 다루었고, SF소설 『그 가공할 힘』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는 주제이다.) 스크루테이프는 환자(그리스도인)가 ‘바람직한’ 친구들을 새로 사귄 것을 기뻐하며 어떻게 그들과의 관계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것인지 웜우드에게 조언한다. 그들은 환자가 무의식적으로 한편이 되고 싶어 하는 ‘인싸’들이지만, 환자의 신앙과 정면 배치되는 생각을 드러내는 말을 한다. 환자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길게 이어갈수록 환자는 “자꾸 진심을 가장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온갖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들을, 처음에는 “말을 해야 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침묵해야 할 때는 웃어버리는” 식의 행동으로만 인정하다가, “결국에는 입으로도 인정하게 될 테고 … 그런 태도들은 아예 환자의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스크루테이프는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했던 대로 변하는 법이니까. 이건 기본이야.”

인간은 자신이 가장했던 대로 변한다. 나쁜 짓을 따라 하면 나쁜 사람이 될 것이다. 머리로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반대로 좋은 일은? 아니, 신앙의 문제에서도 그럴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더불어 루이스의 대표작이라 할 『순전한 기독교』에서 그는 과연 그렇다고 당당히 논증한다. 『순전한 기독교』 4부에서 그는 6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한 다음, 7장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는 비결을 말한다. 그런데 그 7장의 제목이 바로 ‘가장(假裝)합시다’다. 주기도문의 첫 문장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가장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시작으로, 올바르게 ‘가장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새사람이 되는 길로 이어지는지 설명한다.

여러 해 동안 이 책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다시 읽게 되는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이 책은 내 마음속 더께를 걷어내고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다시 떠올려준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현실이 가진 영적 성격에 눈을 뜨게 해주고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인 동시에 C. S. 루이스라는 걸출한 기독교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출입문이기도 하다. 신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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