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동쪽으로 선교에 나섰던 경교(네스토리우스파)의 복음 전파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동방 정교회가 확장되었을 때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중심 도시인 헤랏(Herat)에 교구 본부를 둘 정도로 이 지역에 기독교가 왕성했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개신교 선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통시적 시각에서 볼 때 오늘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본문 중)
권성찬(선교사, GMF 대표)
선교 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여러 개의 창(window)으로 구분하는데 아프가니스탄은 페르시아 창에 속한다. 중동은 모두 같은 아랍 사람들이 살며, 아랍어권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크게 보면 아랍 창과 페르시아 창으로 나누어진다. 이라크를 포함하여 서쪽은 아랍 지역으로 성경의 옛 바벨론 지역이고, 이란을 포함하여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은 페르시아 지역으로 성경의 옛 바사-메디아 지역이다. 바사(페르시아)가 제국이었을 때는 지금의 파키스탄과 인도 지역을 포함했으며, 예수님의 제자 도마와 동쪽으로 선교에 나섰던 경교(네스토리우스파)의 복음 전파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동방 정교회가 확장되었을 때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중심 도시인 헤랏(Herat)에 교구 본부를 둘 정도로 이 지역에 기독교가 왕성했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개신교 선교 역사를 돌아보면서 통시적 시각에서 볼 때 오늘 아프가니스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한 사람들
윌리엄 밀러(William M. Miller)라는 미국 선교사는 1919년부터 1962년까지 43년 동안 이란에서 사역했다. 그는 당시 막 선교의 문이 열린 이란 동부 지역의 마슈하드라는 곳으로 갔다. 이란 동부는 아프가니스탄 서부와 접경한 지역인데 1921년 밀러는 아프가니스탄과 더 가까운 자볼을 방문했다가 내친김에 아프가니스탄 국경까지 가게 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식 선교사가 한 사람도 없었고 선교에는 완전히 문이 닫힌 국가였기 때문에 밀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국경은 헬만드강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밀러는 수영으로 강을 건너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았다. 가져갈 것이 광야의 마른 풀뿐이라 풀 한 줌을 챙겨 와서 고국의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기도 편지에 마른 풀을 하나씩 넣고는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의 첫 열매입니다!”
밀러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된 사람 중에 윌슨 선교사가 있었다. 윌슨도 이란으로 갔는데 밀러와는 반대쪽인 북서부의 타브리즈로 갔다. 밀러가 수영을 해서 아프가니스탄 땅을 다녀오던 1921년, 타브리즈에서 사역하던 윌슨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후에 아프가니스탄 선교사가 된 크리스티 윌슨(J. Christy Wilson)이다. 윌슨 가정에서도 늘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했기에 어린 크리스티 윌슨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듣고 기도하며 자랐다.
크리스티 윌슨과 아프가니스탄
밀러가 이란에 갔던 1919년은 아프가니스탄이 당시 그들을 지배했던 영국과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을 얻은 해이다. 이후 1933년에는 자히르 샤라는 젊은 왕이 즉위하여 개혁을 시작했다. 미국과도 외교 관계를 열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영어 교사로서 입국할 기회가 생겼으며, 크리스티 윌슨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지원하였지만 바로 들어갈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1951년에 목사가 된 윌슨은 드디어 영어 교사로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게 되었다. 윌슨은 ‘텐트 메이커’(자비량 선교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이 용어는 전문인 선교사, 비즈니스 선교사 등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수도 카불에 살던 윌슨은 영어를 가르치고 주말에는 자신의 집에서 외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였다. 점점 사람들이 많아져 집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마침 1959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통령에게 세례를 준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무슬림 외교관들을 위해 모스크를 지었는데, 윌슨은 대통령이 왕을 만나 카불에도 외국인들을 위한 교회 건축을 부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카불을 방문했을 때 왕에게 허락을 얻었고, 전 세계에서 모금하여 1970년에 첫 예배당을 카불에 아름답게 지었다.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3년 후 왕정이 무너지면서 무슬림들이 몰려와 예배당을 부수어 버렸다. 그 후로 아직까지 아프가니스탄에는 그와 같은 공식 교회 건물이 세워진 적은 한 번도 없다.
IAM의 설립, 그리고 톰 리틀
윌슨은 우연한 기회에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년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선천적인 장애우들이 많다. 내가 속했던 구호 단체도 시각 장애, 청각 장애 등 여러 장애우를 섬겼다. 물론 전쟁이나 지뢰 사고 등으로 후천적 장애를 가진 이들도 많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종족들은 마치 구약성경 이야기처럼 4촌 간에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선천적 장애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장애우들이 많다. 시각 장애 소년과 윌슨의 만남은 시각 장애인 사역으로 확장되었고 후에 안과 병원 등이 세워졌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66년에 국제 아프간 선교회(International Afghan Mission, 후에 이름이 바뀜)가 세워졌다. IAM이라는 이름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는 말씀의 첫 두 단어 “I am”을 나타내기도 했다. IAM 사역자들은 그 후 다양한 사역을 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며 많은 희생을 치렀다. 지금까지 55여 년간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특히 의료 부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IAM 이후에 여러 기독교 구호 기관들이 세워졌고 우리 가정도 그중 한 기독교 구호 기관을 통해 사역하였다.
1970년대에 안과 사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 IAM 사역자 중에 톰과 리비 리틀(Tom & Libby Little)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이 침공했을 때나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을 때도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현지인들을 섬겼던 헌신적인 사역자들이다. 2010년, 톰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가장 험한 북쪽의 누리스탄에서 안과 의사로 사역을 하고 있었고, 아내인 리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제3차 로잔 대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아내 리비는 고통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 어려운 순간에 현지에 남은 것이 오히려 현지인들과 유대감을 깊게 하고 복음이 열매 맺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나눌 때, 누리스탄에서 안과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남편 톰 선교사와 그 일행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30여 년을 성실하게 섬기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톰과 그 외 여러 사람들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많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지금도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아프가니스탄을 마지막으로 떠난 미군 장성의 사진을 보며 감동하지만, 언젠가는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남아서 조용히 어려운 사람들을 섬긴 사역자들의 이야기가 발견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빛나게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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