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여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방향, 즉 지향점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도 종교개혁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은 종교개혁이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물음이다.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이 말은 역사학자 조운 켈리(Joan Kelly)의 “여성에게 르네상스가 있었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 질문은 ‘암흑의 중세에 이성의 빛이 비취기 시작한 르네상스’라고 하는 진보 사관의 서사가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운동은 여자와 남자에게 같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여성에게도 종교개혁이 있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개신교인에게 종교개혁은 자기 종파의 기원으로서 예수의 부활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운 켈리가 위의 질문을 제기한 무렵부터 학자들은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종교개혁이 가지는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하게 지적된 것은 여성들의 영적 권위의 상실이다. 개신교인들에게 수녀원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할지 모르지만, 사실 수녀원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자들끼리 모여서 스스로 조직을 운영하며 독자적인 영성 생활을 하는 곳이었고, 수녀원장에게는 상당한 권한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수녀는 여성에게 허락된 성직으로서, 제도적으로 보호받는 자리였다. 이들은 결혼의 종용 없이 독신으로 살면서 심지어 성직자로서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당시 개혁파들은 독신주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도원 문을 닫았다. 일례로, 1535년에 제네바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성 클라라 수도회의 한 수도원에 쳐들어가 성화와 성상을 파괴하고 봉쇄 수도원이었던 그곳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래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녀들은 프랑스의 앙씨(Annecy)로 가서 다시 공동체를 세워서 “앙씨로 피난 온 제네바의 성 클라라의 자매들”이라는 이름으로 그 후 2백 년간 프랑스 혁명 때까지 그 공동체를 유지했다. 자신들의 독자적 영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

 

그러나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여성도 많았고, 마르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처럼 자발적으로 수녀원을 나와 수사와 결혼하는 여성도 있었다. 여성들에게 종교개혁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문맹을 벗어나야 했기에, 합법적으로 글을 배울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이 여성에게는 큰 매력이었다. 여성에게 교육은 수녀원에서나 가능했던 데다가 수녀원도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는 종교개혁에 동조할 만한 제법 큰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물론 겨우 문자를 해독하는 정도의 교육이었으나, 문해 교육은 중산층 여성의 성장에 중요하게 기여했다.

 

하지만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한 마르틴 루터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려 한 재세례파는 박해한 것처럼, 여성들이 교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루터파처럼 칼뱅주의자들도 여자가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을 싫어했고, 여성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칼뱅의 경우 모든 여성을 동일하게 대한 것은 아니며, 여자는 남자와 영적으로 평등하지만 현실에서는 남자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는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고 단정 짓기도 힘들다.

 

우선 칼뱅은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귀족층의 여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역할을 인정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아무리 자신을 열렬히 지지한다 해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전히 신분제가 지배하던 사회였기 때문에, 귀족 여성들은 자신의 계급 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었고, 그래서 그러한 정치적 지형을 염두에 두고, 여성이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진의는 의심되나 표면적으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인문주의자도 있었다. 여성사 혹은 젠더 관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의하는 바이지만, 젠더 규범과 실제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시대마다 여자는 이러해야 하고 남자는 이러해야 한다는 규범이 있지만,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그 규범은 자주 타협이 된다. 그래서 연구자는 말과 행동 두 가지 다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 자체도 일관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나아가 말이라고 하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있어서, 같은 말을 놓고도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성경을 보는 데도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비단 성경만이 아니라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해 온 칼뱅과 같은 신학자의 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동안 제법 일관되게 유지되던, 여성의 지위에 관한 칼뱅의 입장을 해석하는 방식도 1980년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에서 원페미니스트(proto-feminist: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 시대의 페미니스트적 사상)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해석에서부터 애초에 젠더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일관성이 없었다는 해석도 나오고, 나아가 칼뱅 신학의 원리인 semper reformanda(원래 문구는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를 여성 해방의 영역에도 적용하는 해석까지 나왔다.2)이러한 해석들은 칼뱅주의를 여성 해방의 적으로 간주해 온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 여성의 영성 및 교회 생활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여지를 크게 열어 준다. 즉, 자유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남녀평등의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해석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유학을 연구하는 여성들이 늘면서 유교 전통을 부인하지 않고 여성의 동등한 지위를 논할 수 있는 해석들이 많이 나왔다. 흔히 미국에서는 1980년대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3)가 일어난 시대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특정 부류의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이고, 칼뱅 연구의 예에서도 보듯이, 오히려 그 시기는 자신의 종교/문화 전통을 버리지 않고 남녀평등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페미니즘들에 대한 논의와 연구물이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여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방향, 즉 지향점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도 종교개혁이 있었는가?’ 하는 물음은 종교개혁이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물음이다. 종교개혁은 오늘날 미국으로 대변되는 개신교의 승리 서사로 자리 잡았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와 결합되어 진보를 상징하게 되었지만, 성직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한 형제들로 새로운 연대를 구성한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가정에서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영적 소명을 실현할 길도 잃었다. 다시 말해서, 자유와 평등도 여성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여성의 영적인 특권도 상실한 것이다. 여성 종교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이 후자의 사실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여 세속 정치의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종교의 특수한 역할에 대한 논의를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었고, 칼뱅 신학에 대한 재해석도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성 평등이 이루어질수록 종교를 믿는 여성은 사라질 것이라는 예견과 달리, 여전히 여성들에게 종교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가르침이라 믿고 칼뱅을 따른 여성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더 나은 것’을 찾아간 여성들이며, 오늘날처럼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게 아무것도 없는 양 흘러가는 시대에도 여성들은 종교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구성해 가고 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종교가 주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 거기에 종교의 특수한 역할, 종교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여성에게도 종교개혁이 있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은 무엇인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 생각해 보면 좋겠다.

 


1) Elizabeth A. Lehfeldt, “Calvin and Women”, R. Ward Holder ed. John Calvin in Contex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162.

2) Nico Vorster, “John Calvin on the Status and Role of Women in Church and Society”,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S, Vol. 68, Pt 1, (April, 2017): 183-185.

3) 사회 변화 등에 대한 대중의 반발-편집자 주.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관련 글들

2024.12.12

묵시문학의 덫, 의도된 모호성(기민석)

자세히 보기
2024.11.06

국내 최초, 손으로 보는 AL 촉각 성경 지도(정민교)

자세히 보기
2024.11.01

피정,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김홍일)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