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써 소금과 빛이 되는 직무를 위해 고용되었고, 그 의를 실천하는 일에서 중요한 세 가지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긍휼, 기도, 금식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직무에는 팔복 선언에 나타난 화해 사역(5:9) 같은 것도 포함되며, 예수님이 행하셨던 복음 전파, 가르침, 치유 사역(마 4:23)을 더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언급하신 세 가지, 긍휼, 기도, 금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직무에서 중요한 부분임이 틀림없습니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너희는 주의하여라. 너희 의를 사람들 앞에서 행하여 그들에게 보이려 하지 않도록. 그렇게 되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로부터 보상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6:1)

 

마태복음 6:1-18에서 예수님은 긍휼(또는 구제)과 기도와 금식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중에 삽입된 부분으로 보이는 기도에 관련된 가르침(7-15절)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아래에서는 6:1-6과 16-18을 살펴보려고 합니다.1)

 

1절에서 주님은 “너희 의를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은 팔복 선언의 네 번째와 여덟 번째 말씀에서 언급되었던 말입니다.2) 예수님은 제자 공동체에게 주어진 직무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그들의 “아름다운 행위들” 곧 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16). 이것을 ‘직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이 일을 충실히 수행한 자들에게 ‘보상’(헬, 미소스: 급여, wage)이 따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5:12, 46).3) 그리스도인이 의를 행하는 것은 상(prize)을 받을 특별한, 부가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상 또는 급여를 받는 직무의 일입니다. 즉, 의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신 직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은 공직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써 소금과 빛이 되는 직무를 위해 고용되었고, 그 의를 실천하는 일에서 중요한 세 가지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긍휼, 기도, 금식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의 직무에는 팔복 선언에 나타난 화해 사역(5:9) 같은 것도 포함되며, 예수님이 행하셨던 복음 전파, 가르침, 치유 사역(마 4:23)을 더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여기서 언급하신 세 가지, 긍휼, 기도, 금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직무에서 중요한 부분임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직무인 “의를 행할” 때, “사람들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려고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5:16의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아름다운 행위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말씀과 표면적으로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두 말씀을 비교하면서 묵상해 보면, 5:16의 말씀은 세상에서 의를 행함으로써 소금과 빛이 되라는 직무를 부여하신 말씀이고, 6:1의 말씀은 그 직무를 행할 때, 사람들의 반응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히 행하라는 말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5:16은 직무의 내용과 목적에 관한 말씀이고, 6:1은 그 직무의 실행 방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행할 자신의 직무로서 의를 행할 때, 사람들의 즉각적 반응이나 인정이나 칭찬에 주목하지 말고, 이 일이 하나님이 주신 직무요 사명이라는 점에 계속 초점을 맞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직무는 사람들의 반응에 의해 평가받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신실함으로 평가받는 직무이며, 이 직무를 신실하게 수행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랄 만한 급여 또는 보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6:4, 6, 18).

 

이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긍휼과 기도와 금식 각각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긍휼’(또는 구제)에 관한 말씀(6:2-4)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서 두 종류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걷어 가는 세금을 내고 난 다음, 남은 소득의 첫 번째 십일조를 성전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바쳤고, 소득의 두 번째 십일조는 예루살렘 순례시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에 사용하거나, 자기 마을의 가난한 사람의 구제(매 3년 마다)를 위해 사용했습니다.4) 예수님의 예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두 번째 십일조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와서 그 돈으로 곡식과 빵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듯이, 회당 앞이나 저잣거리에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자기가 구입한 곡식이나 빵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5) 그렇게 자선을 베푸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경건한 사람으로 칭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긍휼을 행할 때, 그런 구제 행위의 어떤 부분은 본받지 말고, 오히려 정반대로 아무도 모르도록 은밀하게 긍휼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다음에는 기도에 관한 말씀(6:5-6)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전의 제사 시각에 맞추어 하루에 세 번씩 정기적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시각에, 오후 세 시에, 그리고 해가 지는 시각에 기도를 드렸고, 이렇게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은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대로 따랐습니다.6)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마도 오후 세 시 성전 제사 시간에 맞추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리고자 집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제시간에 성전에 도착하지 못했고, 3시가 되자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렇게 행동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까지도 사람에게 보이고 칭찬받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마음속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런 위선적인 행동을 본받지 말고, 정반대로, 아무도 볼 수 없는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금식에 관한 말씀(6:16-18)입니다.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24시간 동안 물과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율법(토라: 모세오경)이 필수로 요구하는 의무는 아니었습니다. 금식은 본래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감정이나 슬픔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금식을 하면서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거나 표정을 일그러뜨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정반대로, 금식할 때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처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환하게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금식은 보통 참회의 기도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도와 금식은 항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금식을 정신을 맑게 하는 일종의 수행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의 경우에는 레위기 16장 대속죄일 규정에 나오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16:29, 31)라는 말씀을 어느 시기 이후 ‘금식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하면서 ‘참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행위’와 금식이 점차 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유대인들의 금식은 ‘참회나 슬픔의 감정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몸으로 표현하는 기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금식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금식에는 세례받기 전에 하는 금식과 정기적으로 하는 금식이 있었습니다. 세례받기 전에 하루나 이틀 동안 행한 금식은 ‘참회’의 금식이었다면, 수요일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행했던 금식은 중보기도를 위한 금식이었던 것 같습니다(디다케 7:4-8:1;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하다”).

 

긍휼, 기도, 금식에 관한 이 세 가지 말씀은 모두 당시 예루살렘 저잣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을 들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위선적인 사람들은 의로운 행위의 외양은 있었지만, 정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를 한다는 인식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지금 그들 곁에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속에서 그렸던 하나님은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과 멀리 떨어져서 아무 관심도 없이 다른 일에 열중하고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를 행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이스라엘 안에 안 계신 분 취급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치명적으로 손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은밀함 가운데” 계시며, 은밀함 가운데서 지켜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4, 6, 18절). 하나님이 왜 은밀함 가운데 계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적어도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아주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은밀한 데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때 은밀하게 있다고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는 감추어진 은밀한 곳까지도 모두 살펴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은밀한 데 계시는 하나님을 생생히 인식하면서 다시 위선자들의 행위를 돌아보면, 이들의 행위는 마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므로 얼마나 부적절한 것인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이 우주 어딘가에 계신다고 믿지만, 실천에서는 하나님이 아예 없거나 멀리 떠나 버리신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만 유신론자요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지행불일치와 더 나아가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아주 가까이 계시며,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것도 보고 계심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그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음(6:4, 6, 18)을 기억하고 든든히 여기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아름다운 일들, 의로운 행위들, 긍휼과 기도와 금식을 실천하며 우리의 하나님 나라의 직무를 신실히 행해야겠습니다.

 


1) 6:1은 2-18절 본문을 하나로 엮어주는 서문이다. 2-4절에는 긍휼(5:7의 ‘긍휼히 여기는 자’와 같은 어원의 단어), 5-6절은 기도, 16-18절은 금식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여기에 7-15절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들 즉, (1)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 (2)주기도로 기도하라는 말씀, (3)타인의 허물을 용서하라는 말씀이 삽입되어 있는 구조이다.

2) 팔복의 네 번째와 여덟 번째 말씀은 의라는 말로 괄호를 이루며 괄호 안에서 언급하는 세 가지 행위, 긍휼히 여김, 마음이 깨끗함, 평화를 이루는 것을 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부각시킨다. 또, 이 의의 행위들은 5:16절의 ‘아름다운 행위들’(헬, 타 칼라 에르가)과 관련된다.

3) 한글 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에서는 ‘상’이라고 번역했지만, 그 단어는 상(prize)이나 선물(gift)이 아니라 보상이나 급여(wage, payment)에 해당하는 단어다. 새한글성경(2021)은 ‘보상’으로 번역했다.

4) 요아힘 예레미아스,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한국신학연구소), 179-180.

5) 구제 헌금을 성전에 바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구제 사역을 하도록 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개인의 구제 행위를 언급하신다. 당시의 예루살렘에는 수백 개의 회당들이 있었고, 축제 때에는 회당 건물을 순례자들의 여관처럼 사용하였다. Corpus Inscriptionum Judaicarum, 1404. C. K. Barrett ed., The New Testament Background (HarperCollins, 1989), 54-55. Luke Timothy Johnson, The Acts of the Apostles (Sacra Pagina Series vol. 5)(Collegeville, MN: The Liturgical Press, 1992), 108, 행 6:9 주석 참조.

6) 초기 기독교 문서인 디다케 8:2-3은 주기도를 가지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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