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존재가 대상(객체)이 되어 고유함을 잃어버리면 그 주위에는 벽이 생긴다. 그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하는 벽이 세워진다. 이 공고한 벽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 바꾸어 질문하면, 대상화된 장애인은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소란스러운 동거』를 경유하여 모색하고자 하는 방법은 ‘들음’, 목적어를 붙인다면 ‘질문’을 들음과 ‘이야기’를 들음이다. (본문 중)

[서평] 박은영 | 『소란스러운 동거: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이’의 이야기』

IVP | 2022년 4월 18일 | 260면 | 15,000원

 

박예찬(IVP 편집자)

 

“저는 장애가 영감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로 칭찬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1) 호주의 코미디언이자 장애 여성인 스텔라 영이 한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그가 살아온 세상은 장애가 영감이 되는 세상, 장애인으로 산다고 칭찬받는 세상이었다. 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많은 매체가 장애인을 굉장한 영웅이나 불행한 이웃으로만 “전시”2)해 왔다. 그렇게 장애인은 대상화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해’ 또는 ‘불쌍해’ 이외의 다른 가능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존재가 대상(객체)이 되어 고유함을 잃어버리면 그 주위에는 벽이 생긴다. 그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도록 하는 벽이 세워진다. 이 공고한 벽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 바꾸어 질문하면, 대상화된 장애인은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소란스러운 동거』를 경유하여 모색하고자 하는 방법은 ‘들음’, 목적어를 붙인다면 ‘질문’을 들음과 ‘이야기’를 들음이다.

 

질문 되돌려 주기

 

책에 실린 저자 소개를 살펴보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질문 세례에 시달려 왔다. ‘장애여성정체성연구소 공간’에서 장애여성학을 배우면서, 그 물음표들을 모아 세상에 되돌려 주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3)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응답의 자리에 매여 있었다. 응답, 대답, 반응과 같은 단어는 모두 어떤 행위 후에 일어나는 종속적·수동적 의미를 가진다. 한자를 봐도 그렇고, 영어도 마찬가지다(‘re’spond, ‘re’ply, ‘re’action). 반면 질문은 능동적이며 주체적이다. 그 예로 이기호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하나님을 ‘답변하는 이가 아니라 질문하는 이’4)라고 정의하며, 신의 주체성을 다름 아닌 질문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대답하는 자리에서 질문하는 자리로의 이행은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존재로 나아가는 행위다. 이 책에서 박은영 작가가 보여 주는 모습도 이것이다. ‘정상’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간단히 나누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왜 유독 장애인에게만 포기와 체념을 쉽게 강요하는지 묻는다. 저자는 대답을 요구해 왔던 세상에 질문을 되돌려 줌으로써 대상화의 벽을 허문다.

 

『소란스러운 동거』표지, ⓒIVP.

 

이야기 들려주기

 

두 번째 방법은 이야기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능동적 주체가 된다.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5)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서사를 힘 있게 풀어 나간다. 삶이라는 길을 걸으며 만난 내밀한 고민과 에피소드가 책에 한가득 담겨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역경을 이겨 낸 간증이지도, 괴롭기만 한 삶의 전시이지도 않은 한 사람의 매일이며 일상이다. 타인의 관찰이나 평가가 아닌 자신이 직접 이끌어 가는 이야기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사의 반경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진폭을 키워 간다. 손녀를 병원에 태워 주기 위해 환갑이 넘어 운전면허를 딴 할아버지, “은영이랑 놀아 주다니, 착하다”는 칭찬에 “놀아 주는 게 아니라 같이 노는 건데요”라고 대꾸했던 친구, “적당한 무관심”으로 저자의 곁이 되어 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서사를 소란스럽게 지탱하고 있다. 다양하고 고유한 사람들과의 역동 속에서 저자와 세상 사이의 벽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길게 설명했지만 책의 부제에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다. “장애와 비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이의 이야기”라고 말이다. 벽을 허무는 주체는 바로 이야기다. 이렇게 이야기는 저자에서 시작해서 그의 친구들을 아우르며 이내 독자에게 도달한다. 독자는 책을 읽음으로써 기어코 이 이야기에, 벽에 균열을 내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여리고성 부수기

 

허무하게 무너지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건물이 여리고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리 한 번 질렀다고 무너졌으니 말이다. 여기서 잠시 위치를 바꿔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해, 여리고성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읽어 보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림’으로 벽이 무너진 것이다. 성벽은 본래 출입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외부인과 내부인을, 적과 우리 편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여리고의 성벽 역시 도망친 히브리 노예이자 난민을 단순히 객체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얼굴 없는 군집으로 분리했던 이 벽을, 그들의 ‘소리’가 보란 듯이 뚫고 들어갔다.

 

여리고 성벽을 허물었던 이 ‘소리’는 일회성의 외침이 분명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주위를 돌던 첫날부터 성안에는 소문(이야기)이 퍼졌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의 노예 생활과 출애굽 서사가 성안을 휘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 그 서사의 주체가 실제 목소리로 발화하자 벽은 힘 한번 못 써 보고 무너져 내렸다. 이처럼 여리고성이 무너진 소동은 이스라엘 백성의 소란함, 다시 말해 ‘이야기가 담긴 외침’으로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외부인과 내부인,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소리’로 와해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앞서 여리고성이 허무하게 무너졌다고 했지만, 이 정도면 허무한 게 아니라 환상적으로 무너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들음을 이야기하면서 글을 너무 많이 써 버린 것 같다. ‘들음’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딜레마에 이내 발이 꼬여 버린다. 모쪼록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어서 빨리 소란스러움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회와 각자의 내면에 굳게 자리한 벽이, 여리고성이 그랬듯 아름답게 붕괴하기를 희망해 본다. 우리의 소란함으로 말이다.

 


1) 이은희, “시선”, 「홍주일보」.

2) 김원영, 『희망 대신 욕망』.

3) 본문 발췌. 이하 주가 없는 인용구는 본문에서 발췌 한 것.

4)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5)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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