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련의 합리적 중심을 상정하는 질서에서 배제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러한 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모더니즘적 진리나 질서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이 작동한다.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적 진리로 여겨졌던 일련의 체계나 기호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묻는 작업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이 감행한다. (본문 중)

김동규(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이 연속 기획에서는 매월 한 차례 현대철학, 그 가운데서도 20세기 이후 유럽 대륙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현대철학에 대해 흔히 가지게 되는 오해들을 바로잡고, 현대철학으로부터 배우고 성찰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만큼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큰 오해를 불러오는 개념도 드물 것이다. 항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상대주의나 다원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치부되곤 한다. 더 나아가 절대적 진리를 상대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관을 위협하는 위험하고 파괴적인 사상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진리의 상대화나 다원화 같은 규정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다원주의적 시각은 근대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칸트가 생각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이 사물을 수용하고 개념화하는 틀을 인간의 마음에 주어진 것에 부여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에는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 체계와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전혀 다른 인식 체계를 가진 존재자는 세계를 인간과는 달리 인식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처럼 감각 기관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사물 그 자체를 온전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와 다르고, 잠시 후 살피겠지만, ‘어떤 것이든 다 좋다(anything goes)’는 식의 상대주의와도 다르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길은 역시나 해당 어휘 자체의 의미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modernism)에 접두어 ‘포스트’(post-)를 붙인 합성어다. 접두어 ‘포스트’는 ‘이후’ 또는 ‘다음’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나 ‘다음’에 도래하는 어떤 사유의 흐름을 가리키는 말일 테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통상 19세기까지 지속된 근대 사상의 지배적 사유 경향 다음에 오는 어떤 사유의 새로운 파고를 일컫는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이후’나 ‘다음’은 단지 시간적 선후 관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의 관습이나 사유를 답습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나 지향을 담고 있다. 만일 이전과 같은 사유 방식을 지향한다면 굳이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와 ‘다음’은 모더니즘 이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것, 모더니즘과는 다른, 모더니즘을 벗어난 어떤 것을 의도한 말이다.

 

이처럼 모더니즘 이후에 오는, 모더니즘과는 다르고 모더니즘을 벗어난 새로운 것은 필연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함축한다. 모더니즘의 정의에 대해서는 또 다른 한 꼭지가 필요할 정도로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므로, 여기서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에 대해 내리는 비판적 정의를 살펴보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모더니즘을 기본적으로 이성을 규준으로 삼아 인간과 세계, 그리고 삶의 다양한 양태들을 재단하는 태도로 본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이성적 사유나 이성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이성 바깥의 것, 이성의 기획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논리로 작동했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인 모더니즘 비판의 논지다.

 

이런 식의 이해를 가장 잘 보여준 포스트모더니스트로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입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던’을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Lyotard 2018, 21)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거대 서사’(meta-narrative)란 이성을 기반으로 삼은 합리적 정신이 벼리어 낸 보편적 질서나 과학적 진보의 이야기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계몽주의 시대의 서사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인의 해방과 이 개인들이 일구는 합리적 사회 질서의 확립’이나, ‘각성한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취’,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부의 창조’,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인류 전체의 진보’라는 관념 등이 모두 리오타르에게는 거대 서사로 여겨진다(Lyotard 2018, 20-21). 요컨대, 이런 거대 서사는, 어떤 중심적 관념과 체계에 잘 섞이지 못하는 타자를 배제한 채, 합리적 사유에 준거한 규정으로 이루어진 질서 잡힌 세계를 상상하며, 이렇게 질서 잡힌 세계 속에서 꾸준히 이성적 정신의 힘을 작동시키면 세계의 진보와 완성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리오타르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이처럼 거대 서사가 이성이나 합리성에 이질적인 타자를 소외시키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유 체계로 전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련의 합리적 중심을 상정하는 질서에서 배제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러한 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모더니즘적 진리나 질서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이 작동한다. 절대적인 진리나 절대적 진리로 여겨졌던 일련의 체계나 기호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묻는 작업을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이 감행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작업을 한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사상과 사상가를 획일적으로 묶을 수는 없다.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은 여럿일 수 있으며, 비판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한 예로, 어떤 이에게 근대적 인간 이성은 사회의 발전이나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광인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다른 이에게 근대적 인간 이성은 남성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 둘만 하더라도 근대성, 또는 모더니즘의 거대 서사 내용을 규정하는 방식이-다소간 유사성은 있겠으나-서로 다르다. 전자에게 모더니즘은 이성적 완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광인과 같은 타자를 배제하는 거대 서사이고, 후자에게 모더니즘은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를 꿈꾸는 거대 서사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도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하나의 이즘(ism)이란 범주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무차별적 시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이 자신은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무관하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영어권, 그 가운데서도 주로 미국의 문화 연구나 문학 비평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80~90년대 미국의 문학 연구자나 비평가들은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럽 대륙의 사상가들, 특별히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한데 모으는 경향을 보였고, 이 경향이 다시 유럽이나 아시아 등지로 퍼져 나가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학술적 규정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흔히 리오타르 이외에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질 들뢰즈 등을 핵심적인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스스로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철학자는 리오타르밖에 없다. 이런 점을 참작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규정하는 데에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야 한다.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당연시 여겨지던 기초적-토대적 관념들의 종말(또는 죽음)의 사유로 규정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다소 단순화한 정의이긴 하지만 충분히 유의미한 규정이다(강영안 2001; Paul Sheehan 2004, 20-42 참조). 이를테면 언급한 거대 서사의 종말만이 아니라 근대성의 이념의 토대 역할을 한, 형이상학과 인간 주체 개념의 종말 또는 죽음에 대한 언급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인간과 세계, 사유에서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자 일반이나 최고 존재자를 규정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존재자 일반이나 최고 존재자가 사유의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는 특정한 힘과 권력, 무의식의 작동으로 구성된 결과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불리는 사상가들에게 사유의 원천 역할을 했다고도 평가되는 하이데거는, 근대성을 “주체성의 형이상학”(Heidegger 2012, 181)으로 규정하였는데, 몇몇 포스트모던 사유는 근대의 정신에서 형이상학과 인간 주체가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삶과 세계의 질서 밑바탕에 자리한 최고 존재가 결국은 인간 주체라는 말이다. 근대의 존재자 일반이나 최고 존재자인 하나님 같은 존재자는 언제나 인간이 사유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로 이해되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가 생각하지 않는 한에서는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이 그 존재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의식적 사유의 기저에 작동하는 무의식을 지적하거나 인간의 존재에 앞서는 무의식적 언어 구조나 사회적 질서 및 권력의 역학 관계를 드러내면서, 근대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 역시 하나의 유의미하지만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비록 자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거부하지만) 푸코가 한 유명한 선언, 곧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Foucault 2012, 526)라는 말은 그런 형이상학적 인간의 ‘종말’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우선 한 가지 오해를 불식시켜 보자.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인가?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이 많으므로 다양한 주장들이 있겠지만, 상대주의를 모든 진리가 옳다거나 진리가 여럿이라는 주장, 또는 ‘어떤 것이든지 다 좋다’는 주장을 상대주의라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런 식의 단순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진리로 여겨지는 것을 상대화한다. 그들은 이른바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통념들이 실제로 정합적이거나 체계적이라기보다는 그 배후에 모종의 욕망이나 어떤 비합리적인 의지를 따라 움지인다는 점을 폭로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근대적 진리 관념의 토대가 그리 탄탄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절대적 진리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상대화한다. 이것은 진리가 없다, 옳은 것이 없다, 나쁘거나 틀린 게 아무것도 없다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옳다고 믿었던 것의 맹점을 드러내는 시도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진리 체계의 허약함을 폭로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우리가 알았던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무조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지 우리는 되물을 수 있다. 한 예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경전인 성서의 말들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절대성과 객관성을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일군의 신학자들은 저자의 의도를 객관성과 절대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성서 원저자의 유일무이한 의도가 있을 것이므로 그 의도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성서 지식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양한 난점이 제기된다. 성서의 원래 저자의 의도를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독자들은 이 세상을 떠난 저자에게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물을 수 없다. 또한 저자가 반드시 한 가지 의도만을 가졌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정황과 맥락을 기반으로 삼아 성서에 일종의 해석을 부여한다. 이스라엘인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라고 한 말을 오늘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여기에는 우리 시대의 맥락에 따른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또, 성찬례의 의미가 성서에 명석 판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왜 가톨릭교회와 루터와 칼뱅과 쯔빙글리는 성찬례의 의미를 왜 각기 다르게 이해했으며, 다르게 적용했으며, 심지어 이 문제로 서로 다투기까지 했는가?

 

이처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의미를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런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해석의 모험을 펼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이해하는 성서의 의미나 교회의 가르침이 순전한 이성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니라 교회의 권위 아래 특정한 해석 전승을 따라 이해된 것임을 다소간이라도 인정해야 한다. 특별히, 절대적인 진리로 인증된 개념이나 이야기들 역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펼친 의심의 해석학을 따라가 보면, 그 진리 형성 과정에서 작동한 모종의 의식적 무의식적 편견, 권력의 역학이나 힘의 타협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진리들이 실은 매우 취약한 근거를 가진 개념들이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특히나 앞서 언급한 리오타르의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며 살펴본다면, 적지 않은 이들이 쫓고 있는 거대한 담론이 실은 무의식적 힘과 권력관계 등을 기반으로 삼은 절대성의 추구임을 파악하게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승리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거나, 교회의 양적 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앞당김처럼 여기는 담론을 보라. 특정한 하나의 이념을 통해 세상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거대 담론의 어두운 그림자와 닮은 면은 없는가? 이런 교회의 거대 서사 속에서, 그 서사의 절대적 규준 속에 용해되고 소외된 계층은 없는가?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단순히 교회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상대주의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잘못된 또는 독단적 진리를 갈구하는 오만한 독선을 치유하는 치료제로 간주할 수도 있다. 미국 철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종교적으로 가장 잘 전유한 학자 중 하나로 여겨지는 철학자 메롤드 웨스트팔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을 잘못된 길로 들어선 발람을 가로막은 나귀의 목소리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본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한 이들보다 그 바깥에서 그리스도교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이 진리의 또 다른 차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혜는 이런 발람의 나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열어 두는 게 아닐까.

 

참고문헌

강영안, 『주체는 죽었는가?』. 서울: 문예출판사, 2001.

Heidegger, Martin (2012). 『니체 II』. 박찬국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12.

Lyotard, Jean-François (2018). 『포스트모던의 조건』. 유정완 옮김. 서울: 민음사, 2018.

Sheehan, Paul (2004). “Postmodernism and Philosophy.” The Cambridge Companion to Postmodernism. Edited by Steven Connor, 20-4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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