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블은 이 책에서 폭력과 부재를 보여 줄 뿐 설명하지 않는다. 섣불리 하나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해설을 은혜롭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트리블은 네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의 목적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트리블이 독자를 끌고 가는 곳은 안전하고 완결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모순과 혼란, 부조리가 가득하며,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리는 공간이다. (본문 중)

[책 소개] 필리스 트리블 | 『공포의 텍스트: 성서에 나타난 여성의 희생』

도서출판100 | 2022년 1월 20일 | 280면 | 12,000원

 

박예찬(IVP 편집자)

 

버려지고, 강간당하고, 토막 나고, 불살라진 여성들의 이야기다. 아브라함에게서 쫓겨난 하갈, 오빠에게 성폭행당한 다말, 남편의 손에 토막 난 이름 없는 여인, 사사 입다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딸의 비극을 성서학자 필리스 트리블은 전한다. 트리블은 문학비평을 사용해 본문을 분석하며 교회에서 거의 들려지지 않는 네 여성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탐구한다.

 

이곳에서 각 장의 내용을 모두 소개하기는 어려우므로,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3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트리블에 따르면 이 여인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작은 자다.” 그가 누구이기에 불행한 인물이 넘쳐 나는 성서에서도 가장 작은 자일까? 이 질문에 앞서 트리블은 왜 그를 ‘레위인의 첩’이 아닌 ‘이름 없는 여인’이라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레위인의 첩, 이름 없는 여인

 

‘레위인의 첩’은 남성을 경유하는 정체성이다. 그것은 ‘~의 아내’, ‘~의 엄마’라는 호칭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 고유의 정체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남편에게 종속되지 않는 정체성이 필요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여인의 이름이나 특징은 찾아볼 수 없다. 여인은 이야기 내내 단 한 번도 발화하지 않는다. 결국 남성으로부터 독립된 특징이 없는 그는 ‘이름 없는 여인’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름 없는 여인’이라는 명명은 주체적인 동시에 공허하다. 이 텅 빈 정체성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불길한 전조를 띤다.

 

이 비극은 여인이 모종의 이유로 친정으로 떠나며 시작한다(삿 19:2).1) 이에 장인의 집으로 찾아온 레위인은 아내를 데리고 돌아간다. 그러다가 기브아의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한밤중에 주민들이 몰려와 집주인에게 소리친다(이 대목부터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와 유사하다). “집에 들어온 그 남자를 끌어내시오. 우리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좀 해야겠소.”2) 간곡한 부탁에도 그들이 돌아가지 않자 레위인은 아내를 문밖으로 밀쳐 버리고 이름 없는 여인은 밤새도록 강간당한다. 아침이 되어 문 앞에 쓰러져 있는 아내를 발견한 레위인은 나귀에 그를 태우고 기브아를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칼을 꺼내 아내를 토막 내려 하는데(삿 19:29), 트리블은 이 칼에 주목한다.

 

『공포의 텍스트: 성서에 나타난 여성의 희생』 표지, ⓒ도서출판100.

 

낭자한 폭력과 침묵하는 하나님

 

레위인이 아내를 자르려고 “칼을 들었다”(이카흐 하마아켈레트)라는 표현은 성서의 다른 곳에 한 번 더 등장하는데,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했을 때다(창 22:6, 10). 트리블은 이 표현을 매개로 두 장면을 겹친다.3) 가족을 베기 위해 칼을 든 두 가부장의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결말은 같지 않다. 아브라함에게 멈추라고 다급히 외쳤던 신은 레위인의 칼을 막지 않았다. 물론 기브아 사람들에게 여인이 던져졌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름 없는 여인은 죽임당했다. 그러나 인간, 그중에서도 남성의 폭력과, 신의 침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레위인은 토막 난 아내의 시체를 각 지파에 보내고, 기브아의 만행에 분노한 열한 지파와 기브아를 관할하는 베냐민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그 결과로 베냐민 지파는 남자 600명을 제외하고 전멸한다. 한 지파가 사라질 위기라는 사실에 당황한 이스라엘은 다른 지파 여성 600명을 베냐민 지파에 강제로 넘긴다. 마치 레위인이 문밖으로 아내를 밀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름 없는 여인에게 가해진 폭력은 이름 없는 여인‘들’로 확장되었고 하나님은 폭력을 전혀 막지 않으셨다. 이야기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폭력과 부재다. 이렇게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는 폭력을 들추고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하는 ‘공포’의 텍스트가 된다.

 

공포의 텍스트가 계시하는 것

 

트리블은 이 책에서 폭력과 부재를 보여 줄 뿐 설명하지 않는다. 섣불리 하나님을 끌어들여 자신의 해설을 은혜롭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트리블은 네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그의 목적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이다. 트리블이 독자를 끌고 가는 곳은 안전하고 완결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모순과 혼란, 부조리가 가득하며,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흔들리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이루는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매끄럽고 아름답기만 한 신앙과 신학을 어지럽히며 그것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리블의 작업은 오늘을 위한 고발이자 증언이다. 고통당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예외 없이 계속되며 쉽게 은폐되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이런 공포스러운 일들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기 위해, 희생당한 여성들을 대신하여 그 잔혹했던 이야기를 해석”한다고 선언하는 트리블의 연구는 폭력이 여전한 세계 속에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다.4) 그가 공포의 텍스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 더 덧붙이며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자기를 언약에서 제외된 하갈의 딸이라고 표현한 어느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뉴욕 거리에서 ‘내 이름은 다말’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던 학대당한 여성을 보며, 쓰레기통에서 어느 여성이 토막 난 채 발견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이름도 없는 여인들을 추모하는 예배에 참석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적대와 씨름하면서 이 특별한 이야기들을 이야기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1) 흥미로운 점은 사본마다 여인이 떠난 이유가 다르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사본과 시리아어 사본(개역개정에 반영)은 “첩이 음행했다”라고 기록하는 반면, 그리스어 사본과 구 라틴어 사본(새번역과 공동번역에 반영)은 “그의 첩이 그에게 화가 났다”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불화의 책임을 둘러싼 해석의 긴장을 발견할 수 있다.

2) 삿 19:22, 새번역

3) 이러한 접근은 트리블이 이 책 전체에서 사용하는 문학비평의 한 사례다. “문학비평은 텍스트의 최종 형태에 초점을 맞추면서, 본문을 창조하는 수사적 장치(이를테면 문장 구조, 플롯, 특히 희생당한 여성을 기술하는 방식)에 의미가 내포되는 방식이다.” 책에 나오는 다른 예는, 창세기 본문에서 하갈이 ‘아내’로 묘사되는지, ‘시녀’라고 묘사되는지 ‘노예’라고 불리는지를 플롯을 따라 분석함으로 하갈의 입지 변화를 살피는 것이다.

4) 물론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읽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 예로 팟캐스트 <여기 우리들의 신학>의 ‘납량특집(공포의 텍스트를 읽고)’ 편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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