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복(福) 글자는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手)으로 잘 빚은 미주(美酒)의 술잔을 신에게 바치는 모습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며 예배하는 형상이다. 부복하여 복을 복걸(伏乞)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신이 주신 재복이 집안에 가득하고 그것을 누리고 있으므로 기쁘고 행복한 상태에서 감사하며 예배하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 찬양과 노래가 나오고, ‘복음’(福音)을 고백한다.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복’의 어원

 

흔히 복(福) 자를 一(한, 하나)의 口(입, 사람)에 田(밭, 땅)이 있다는 뜻으로 파자(破字)해서 뜻풀이를 한다. 요즘 같으면 네 식구 한 가족에 밭 네 개 대신 아파트 한 채로 풀어도 되겠다. 그러나 틀린 글자 풀이다.1) 한자의 구성 원리인 육서에서 이 복 글자는 지사+상형=형성에 해당한다. 뜻을 나타내는 왼쪽 부수 示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나 신(神)을 나타낸다. 곧 복 자는 신과 연관된다. 소리를 나타내는 오른쪽 부분은 복이며, 또한 배가 좌우로 부푼 술 단지를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이기도 하다. 즉, 술이 가득 차 있는 술 단지라는 뜻도 된다.

 

한자 福의 서체 변화

 

 고대 중국의 청동 술잔(BC 5세기)2)과 福 자의 형성 과정

 

고대 중국에서 이해한 복의 원래 뜻은 제단 앞에서 두 손으로 술잔을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도 제사의 자세는 동일했다. 무릎을 꿇고 양손에 술잔을 들고 왕이나 신에게 바쳤다.

 

이집트의 제사 모습3)

 

구약 히브리어에서 복을 나타내는 동사 ‘바라크’(ברך)는 야훼 앞에 ‘무릎을 꿇는다’라는 뜻이다. 시편 95:6의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에서 동사 ‘바라크’가 사용되고 있다.

 

복을 받은 자가 감사하여 드리는 예배가 복

 

따라서 복(福) 글자는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手)으로 잘 빚은 미주(美酒)의 술잔을 신에게 바치는 모습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며 예배하는 형상이다. 부복하여 복을 복걸(伏乞)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미 신이 주신 재복이 집안에 가득하고 그것을 누리고 있으므로 기쁘고 행복한 상태에서 감사하며 예배하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 찬양과 노래가 나오고, ‘복음’(福音)을 고백한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축복할 때,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복을 받는 자의 자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곧 복을 비는 자세이기도 하지만, 방점은 복을 받는, 복을 받은 자의 자세에 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어긋나게 축복하는 모습 (렘브란트 그림)

 

따라서 ‘바라크’(ברך)는 ‘무릎을 꿇다’(跪, 궤)와 ‘누리는 행복을 감사하며 예배하다’(福)라는 두 글자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복을 비는 기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감사하며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 ‘복’이다.

 

복은 우연히 일어나는 좋은 사건으로 인한 행복(happening→happiness)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blood. 피 흘림)으로 인해 내가 수동적으로 복을 받는(being blessed) 것이다. 그때 두 손에 큰 복의 술잔을 들고 감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됨으로써 진정한 복의 향유자가 된다.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서 ‘엎드린다’고 할 때 그것은 대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지,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궤(跪)의 상태이지, 개가 주인 옆에 배를 땅에 대고 엎드린 복(伏)의 상태는 아니다. 복(伏)은 ‘매복’(埋伏)한 복병(伏兵) 등에서 보듯이 어두운 곳에 몰래 숨어 있다는 뜻이 강하다. 복마전(伏魔殿)처럼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부패 정치꾼이나 관료, 장사아치들로 인하여 백성들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예배(προσκυνέω)의 정신과 자세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여기서 ‘예배하다’의 헬라어는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έω)이다. 이 단어는 아마도 (1) “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다”에서 나왔고, (2)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키스하다”가 되고, (3) 페르시아 등 중동의 관습처럼 상급자에게 경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며 절하는 것”을 말하고, (4) 구약과 신약에서는 복종의 의미나 간구의 의미로 하나님이나 상급자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자세를 말한다.4)

 

따라서 히브리어 바라크(복을 빌다)가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자세와 연관된다고 한 것과 요한복음의 헬라어 프로스쿠네오(예배하다)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위의 요한복음 구절에서 개의 모습이 어원에 있으므로 주인을 향한 충견(忠犬)의 자세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썩 좋지 않은 이해이다.

 

우리가 원어와 그 어원을 공부하는 것은 어떤 단어의 뜻을 좀 더 깊이 이해한 후 문맥 속에서 바른 뜻을 찾고자 함이다. 요한복음 4:24의 전후 문맥은 다른 유대인 남자들이 개처럼 취급했을 사마리아 여인을 동등한 영적 인간으로 대하는 예수님의 인간미와, 그런 여인도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으며 구원을 누리고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장소나 형식이나 전통에 매인 예배가 아니라, 누구나 영적이고 진짜인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므로 사람도 영적으로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개 취급받았을 사마리아 여인을 인간으로 만나 대화하고, 다시 하나님과 동등하게 영적으로 키스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을 그린, 인간 고양(高揚), 초월(超越), 성화(聖化), 영화(靈化)의 장면이다.

 

그것을 원어 어원에만 매달려 개가 주인에게 복종하며 혀로 핥고 충성하는 모습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런 뜻이 혹시 있다고 해도, 예배는 동물적 본능(本能)이나 훈련된 습관(習慣)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영적 차원으로 고양되는 예배라야 한다. 그것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의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친밀한 가족과 키스하듯이 하는 사랑과 애정의 교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종은 주인에 대한 존경의 표로 키스하지만, 요한복음 4장의 예배(또는 키스)는, 남편이나 애인과의 관계처럼 동등한 입장에서(대화 중에 남편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라), 혹은 부모-자녀 간의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는 예배요, 한 단계 더 나아가 영과 영으로 키스하는 초월적 영적 관계의 형성이다. 그 자세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자세일 수도 있고, 다윗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자세도 될 수 있고, 엘리야처럼 두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거나 찬양하는 자세도 될 수 있다.

 

요한 4장의 예배의 자세는, (1) 개가 주인의 손을 핥는 자세 → (2) 종이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리는 자세 → (3) 사랑하는 애인끼리 키스하는 자세 → (4) 예배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키스하며 연합하는 자세로 그 이미지가 고양, 진보하고 있다. 1번의 이미지에만 머물러 있는 이해는 굴종(屈從)하는 예배자만 만들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진리를 알게 되자, 물동이를 버리고 자유로이 달렸다. 설교자들이 원어 어원의 물동이만 붙잡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만 먹고 있으면, 그 교인들을 개처럼 복종만 하는 교인으로 만들 수 있다. 꼬리치며 환영하는 애완견(愛玩犬)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강아지 교인만 있는 교회는, 목사에게 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동등하게 대화하는 예수5)

 

영과 진리이신 하나님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충성스러우나 자유롭게, 순종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영 안에서 연합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영혼, 동서남북 전후좌우 땅의 갇힌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을 찾으신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의 결과는 감사의 예배이다.

 


1) 배 선(船)을 배 주(舟)+팔(八) + 구(口)로 파자하여 노아의 방주로 견강부회하는 해석도 엉터리이다. 뜻은 배이고, 오른쪽은 소리 부분이다. 한자 연(鉛, 沿 등)에서 오른쪽의 ‘연’ 발음 부분이 변해서 ‘선’으로 읽힐 뿐이다.

2)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5634

3) 포도주를 올리는 하트셉수트: 나란히 놓인 하트셉수트 여왕(ca. 1507-1458 BC)의 세 조각상. 여왕은 포도주를 신에게 바치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4) 참고: https://www.studylight.org/lexicons/eng/greek/4352.html

5) 앙겔리카 카우프만의 작품(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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