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서비스’가 아니라 ‘사회적’ 서비스일 것이다. 즉, 그 강조점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혜택을 더 많이 주는 것뿐 아니라, 그 혜택에 근거해서 ‘사회적’ 관계, 즉, 공동체를 이루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서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시혜를 더 많이 베푸는 것에만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가운데 품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본문 중)
조성돈(LifeHope기독교자살예방센터 대표)1)
2022년 8월, 수원시에서 세 모녀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60세 어머니와 성인이 된 두 딸이 함께 그런 선택을 했다. 어머니는 암에 걸렸고, 두 딸은 희귀성 난치병에 걸려 있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중복된 기사인 줄 알았다. 이 ‘수원 세 모녀’ 사건에서 2014년에 있었던 ‘송파 세 모녀’ 사건이 보였기 때문이다. ‘세 모녀’라는 것만 아니라, 난치병까지 겹치면서 두 사건이 서로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 ‘보호 종료 아동’의 자살 사건도 비슷하게 들린다. 심지어 이게 언제 적 기사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시설에서 지내던 아동이 만 18세가 되면서 700만 원의 자립지원금을 가지고 나오고, 홀로 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최근 여러 번 듣게 되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나오는 말이 있다. ‘복지 사각지대’라는 말이다. 이들이 도움을 받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복지가 부족하다는 질책들이다. 특히 신문 등에 오르는 칼럼을 보면 이런 개탄이 이어진다. 근데 잘 살펴보면, 이런 개탄은 사실에 근거해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복지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다. 특히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복지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복지 사각지대’를 커버해 나가기 위해서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각 지자체들도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이번에 지적되는 바는, 복지 서비스가 많은데 이들이 그 혜택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있었던 보호 종료 아동의 경우는 정부 지원금 1,165만 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청년이 저금을 하면 매달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매달 10만 원까지 정부에서 같이 적립을 하는 혜택이 있었다. 그 결과가 1천만 원이 넘는 금액으로 남은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이 돈을 찾지를 않았다. 혹, 이 돈을 몰랐을지, 또는 찾는 것이 까다로워서 그랬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과만 보면 이 돈이 청년의 목숨을 붙잡았을 수도 있었는데 활용되지 못했다.
수원 세 모녀의 경우도 담당자들이 이들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이들을 찾았는데 못 찾은 경우이다. 세 모녀가 화성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하면서 주소지 등록을 안 한 것이다. 공과금 체납, 단전, 단수 등 33가지의 항목을 점검하여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면 공무원들이 찾아가는 시스템이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소 이전 신고가 없이 이사를 가 버리면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과정을 보면, 결국 복지는 시스템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야말로 자기 것을 잘 찾아내서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어진 것도 챙기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많다. 주민 센터에서 복지 업무를 담당하는 분이 하는 이야기가, 매일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더 챙길 것이 없는지, 나누어 주는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어도 달라고 떼를 쓴다는 것이다.
전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서 귀찮을 정도라고 한다. 주민 센터의 복지사도 찾아와서는 이것저것 챙겨주고, 나누어 주는 것이 있다고 물건을 놓고 가곤 한다. 그리고 복지관에서도 가끔 찾아오고 하니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사람들이 오간다는 말이다.
어쩌면 복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걸 연결해 줄 고리가 없어서 어려운 것이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부에서 이런 혜택을 주는지, 또는 지자체가 이런 혜택을 주는지 다 알 수가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도 이런 복지 혜택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러니 어려움 가운데 사회와 고립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수원의 세 모녀도 그렇고, 보호 종료 아동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서비스’가 아니라 ‘사회적’ 서비스일 것이다. 즉, 그 강조점을 달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혜택을 더 많이 주는 것뿐 아니라, 그 혜택에 근거해서 ‘사회적’ 관계, 즉, 공동체를 이루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말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서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시혜를 더 많이 베푸는 것에만 방점을 찍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가운데 품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마포대교는 ‘자살 명소’로 알려져 있다. 한때 그곳은 1년에 약 1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찾아오는 장소였다. 지금도 그곳에는 하루에 2-3명의 자살 의도자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마포대교에는 다양한 자살 예방 장치들이 마련되었고, 지금도 있다. 지금도 활용되고 있고 큰 효과를 본 도구는, 생명의 전화에서 설치한 전화기이다. 그냥 덩그러니 공중전화 같은 전화기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119와 생명의 전화로 연결되는 버튼이 있다. 그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생명의 전화 상담원과 연결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 사람이 마음이란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라도 한번 듣고 싶기에 전화기를 든다. 그런데 그렇게 전화를 하게 되면 근방 파출소에서 경찰이 출동하고, 아래로는 해양 경찰이 찾아오고, 119도 출동한다. 그래서 이제는 마포대교에서의 자살 건수는 많이 줄어들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수원의 세 모녀나 보호 종료 아동의 경우도 마지막에 도움을 청할 곳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 같다. 정말 어렵다고, 힘들다고 속을 터놓고, 해결을 위탁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마지막 순간에 생명의 전화를 드는 것과 같이 말이다.
나는 그런 이웃이 교회였으면 한다. 공적인 기관이 아니라 친근하게 다가가서 상담하듯이, 또는 가까운 친척을 대하듯이, 옛날에 급할 때면 가까운 이웃에게 돈 만 원 빌리기 위해 찾듯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이 동네의 교회였으면 한다. 골목길의 이웃이 사라지고,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친척이 사라져버린 빈자리에서 교회가 선한 이웃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서비스가 아니라 공동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이 시대는 그런 이웃이 필요하고, 그 이웃이 바로 교회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1)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기윤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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